1. 결혼식 3주 전
1. 결혼식 3주 전
오후 5시가 넘어가자 사무실 내부의 공기가 한풀 늘어졌다.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석양이 서류함과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를 주황빛으로 길게 물들이고 있었다.
지은은 모니터 화면에 떠 있는 ‘태경라이프 신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출시 전략안’ 문서의 마지막 장을 점검했다. 시장 분석부터 마케팅 타깃 설정, 유통망 확보 방안까지 족히 석 달을 밤낮없이 매달려 다듬은 기획서였다. 마지막으로 유통 채널별 예상 수익률을 대조한 뒤 수정 사항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윤지은 대리. 입사 5년 차이자 브랜드전략팀의 실무를 총괄하는 그녀의 손끝에서 완성된 자료였지만, 최종 보고서 제일 앞장에 들어갈 이름은 따로 있었다.
`보고자: 전략기획실장 차민석`
지은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출력 버튼을 눌렀다. 어차피 이 회사에서 실무자의 이름은 서류 뒷장에 묻히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상대는 회장 일가의 재벌 3세이자, 자신이 몸담은 회사의 전략기획실장이기도 했다.
프린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종이를 뱉어내는 사이, 지은의 휴대전화 화면이 밝아졌다.
[태경호텔 웨딩홀 팀]
- 윤지은 신부님, 3주 뒤 예식 관련하여 보증인원 및 양가 친인지석 최종 배치도 확인 부탁드립니다. 금일 내로 1차 수정을 마쳐주셔야 메인 연회장 세팅에 차질이 없습니다.
지은은 입술을 살짝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딱 21일 남았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만나 5년 동안 이어온 연애였다. 다섯 살 연상인 민석은 언제나 다정했고, 가끔 재벌가 자제 특유의 오만함이나 무심함이 불쑥 튀어나올 때도 있었지만 지은은 그마저도 이해하려 애썼다. 그의 가문이 짊어진 무게와 그에 따른 스트레스를 곁에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 대리님, 아직 안 퇴근해요? 결혼식 3주밖에 안 남았는데 얼굴이 반쪽이 됐네.”
옆 자리에 있던 동료가 가방을 챙기며 물었다.
“이것만 출력해서 올려두고 가려고요. 거의 다 됐어요.”
“아무리 바빠도 예비 신부가 너무 고생하는 거 아니에요? 차 실장님이야 워낙 대단한 집안 분이시라 세세한 건 잘 모르실 테니 지은 씨가 고생이 많네.”
“아니에요. 민석 씨도 요즘 신규 사업 때문에 워낙 바빠서요. 이제 큰 틀은 다 끝났으니 한숨 돌려야죠.”
지은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까다로운 시댁의 눈높이를 맞추느라 청첩장 문구 하나, 답례품 종류 하나까지 전부 제 손을 거쳐야 했지만, 오랜 연애의 결실을 맺는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소소한 기쁨이 분명히 존재했다.
정리된 서류를 스태플러로 찍은 지은은 상의 재킷을 걸쳐 입었다.
사무실을 나오며 지은은 민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네 번쯤 울리고 나서야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 어, 지은아.
“민석 씨, 지금 어디예요? 퇴근 전에 제출할 전략안 출력해 뒀는데, 내려가면서 실장님 책상에 둘까요?”
— 아, 그건 비서 편에 올려 보내면 돼. 나 지금 외부 미팅 가느라 이동 중이라.
“그래요? 오늘 저녁에 호텔 담당자한테 최종 좌석 배치도 보내줘야 하는데…… 잠시 시간 내서 같이 볼 수 있어요?”
전화기 너머로 짧은 한숨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아주 미세했지만 민석이 지쳐 있다는 뜻이었다.
— 미안해, 지은아. 오늘 이사진 참석하는 저녁 자리가 갑자기 잡혀서 도저히 시간이 안 나네. 당신이 정리해서 보내주면 내가 밤에 집 들어가서 확인하고 서명할게. 알았지?
“네, 알겠어요. 술 적당히 마시고요.”
— 그래. 고마워.
통화가 끊겼다. 약간의 서운함이 밀려왔지만 지은은 이내 머리를 털어냈다. 태경그룹의 계열사인 태경라이프에서 전략기획실장을 맡고 있는 민석의 입지는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았다. 이복형인 차현우 대표가 태경홀딩스를 장악하고 있는 이상, 민석은 항상 성과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은은 그의 바쁨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퇴근길 주차장으로 향하기 전, 지은은 메신저 앱을 열어 가장 상단에 고정된 이름을 눌렀다.
[박수진]
수진은 대학 동기이자 지은이 가장 신뢰하는 절친한 친구였다. 현재는 태경라이프 홍보팀 대리로 재직 중이라 회사에서도 자주 마주쳤다. 연애 초기부터 민석과의 관계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봐 준 사람도 수진이었고, 웨딩드레스 투어를 할 때도 제 일처럼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어주던 친구였다.
- 수진아, 오늘 퇴근하고 컨디션 좀 어때? 아까 낮에 머리 아프다더니 괜찮아?
답장은 거의 즉시 돌아왔다.
* 응 ㅠㅠ 지은아 나 오전에 약 먹고 오후 내내 골골대다가 일찍 조퇴해서 집에 왔어. 오늘 저녁에 같이 청첩장 모임 리스트 정리해 주기로 했는데 미안해…
* 미안하긴 뭘! 몸이 먼저지. 약 먹고 따뜻하게 자. 내일 봐!
* 고마워 지은아 ㅠㅠ 나중에 내가 맛있는 거 살게! 예쁜 신부 파이팅!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 온 메시지를 보며 지은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바쁜 약혼자와 몸이 아픈 친구. 조금 쓸쓸하긴 해도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지은은 회사 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몰고 호텔로 향했다.
저녁 7시 무렵, 서울 중심가에 위치한 태경호텔의 로비는 화려한 조명으로 빛나고 있었다.
원래 호텔 담당자와의 최종 미팅은 사흘 뒤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회장 일가가 참석하는 가문 측의 하객 석 배치를 두고 약간의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지은이 직접 들른 참이었다.
“윤지은 신부님, 어서 오세요. 예비 신랑님은 오늘 같이 안 오셨나요?”
웨딩 매니저가 따뜻한 차를 내오며 물었다.
“네, 회사에 급한 미팅이 있으셔서요. 오늘은 제가 전달받은 내용만 정리하고 가려고요.”
“그러시군요. 회장님을 비롯해서 그룹 임원진 좌석은 단상에서 가장 가까운 A구역으로 배치해 두었습니다. 다만, 회장님의 재혼으로 인한 가족 관계상 오미경 여사님 측 친인척분들 좌석을 B구역과 조금 분리해달라는 요청이 있어서요.”
지은은 매니저가 제시한 평면도를 유심히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석의 집안은 하객 좌석 하나에도 요구가 많았다. 민석의 친모인 오미경 여사가 요구한 세부 사항들을 하나하나 체크하며 지은은 노트에 메모를 남겼다.
“이쪽 B구역 3번 테이블은 민석 씨 이복형이신 차현우 대표님 측 자리 맞죠?”
“네, 그렇습니다. 홀딩스 측 주요 인사분들이 함께 앉으실 예정입니다.”
“알겠습니다. 이대로 진행해 주세요. 제가 민석 씨에게 전달해서 최종 확정받고 내일 오전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약 40분에 걸친 미팅을 마치고 나자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밀려왔다. 지은은 로비를 나오며 민석에게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 호텔 미팅 잘 마쳤어요. 메모해 둔 거 정리해서 이메일로 보낼 테니까 시간 날 때 확인해 줘요.
하지만 전송된 메시지 옆의 숫자 '1'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미팅 중이거나 접대 자리에 있는 모양이었다.
지은은 가방을 고쳐 매고 자신의 차가 있는 지하 3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오늘 하루도 어떻게든 무사히 흘려보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지하 3층 주차장은 수입 대형 세단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어둡고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지은은 자신의 차가 있는 구역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다가, C구역 기둥 뒤편에 주차된 익숙한 차 한 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검은색 포르쉐 세단. 차종과 번호판 숫자까지 너무나 익숙했다. 민석의 차량이었다.
‘어? 미팅이 이 호텔에서 있었던 건가?’
지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혹시 지은이 아직 호텔에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방문이라도 하려 한 걸까, 아니면 이 자리에 태경그룹 임원진이 모여 있는 것일까.
지은은 반가운 마음에 조용히 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화라도 해볼까 싶어 휴대전화를 꺼내려던 순간, 차량 바로 옆 기둥 그늘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슈트를 정갈하게 차려입은 남자,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날씬한 체구의 여자.
지은은 순간 눈을 감았다 떴다. 주차장의 어스름한 조명 아래 노출된 남자의 얼굴은 방금 전까지 통화했던 자신의 약혼자, 차민석이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서 있는 여자. 베이지색 트렌치코트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웨이브 머리.
‘수진이?’
지은의 사고가 순간 정지했다. 아파서 집에 가서 쉰다던 박수진이 왜 지금 이곳에서, 약혼자인 차민석과 함께 서 있는 걸까. 회사 일 때문에 긴급하게 만난 걸까? 하지만 홍보팀 대리와 전략기획실장이 이 시간 지하 주차장에서 따로 만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의문이 꼬리를 물기도 전에, 지은의 시야 속에서 비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민석이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손을 올려 수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어떠한 망설임도 없는, 지극히 익숙한 손길이었다. 수진 역시 당황하거나 피하는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민석의 가슴팍에 몸을 기대었다.
이어서 민석이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다.
그것은 단순한 인사나 가벼운 스킨십이 아니었다. 주차장의 서늘한 공기를 단숨에 집어삼킬 만큼 진득하고 깊은 키스였다. 민석의 손이 수진의 등과 허리를 쓸어내렸고, 수진은 그의 목을 감싸 쥐며 까치발을 들었다.
지은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머릿속이 멍해진 지은은 한동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뭐지?’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민석은 이사진 미팅 때문에 바쁘다고 했고, 수진은 몸이 아파 누워있다고 했다. 그 거짓말들이, 지은을 완벽하게 따돌리기 위해 맞춰진 두 사람의 입속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실시간으로 뇌리를 때렸다.
두 사람의 스킨십은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상대를 탐하는 손길, 익숙하게 겹쳐지는 각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까지. 방금 막 불꽃이 튄 사이가 아니었다.
지은은 손에 쥔 휴대전화를 부서뜨릴 듯 움켜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갔다.
“……민석 씨.”
지은의 입술 사이로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주차장의 침묵을 깨부수기에는 너무나 작은 음성이었지만, 기둥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에게는 번개라도 떨어진 듯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움찔, 하고 몸을 떨며 입술을 뗀 수진이 가장 먼저 고개를 돌렸다.
지은과 눈이 마주친 순간, 수진의 눈동자가 흔들리다 못해 경악으로 물들었다. 수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셔나갔다.
“지, 지은아……?”
뒤이어 고개를 돌린 민석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민석은 얼어붙은 채 지은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슬그머니 수진의 허리에서 떨어졌다.
지은은 천천히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떨렸지만, 걸음걸이만큼은 기이하리만치 곧고 침착했다. 무작정 달려들어 뺨을 때리거나 고함을 지르는 대신, 눈앞의 이 기괴한 현실을 똑똑히 눈에 담겠다는 듯이.
“너…… 네가 왜 여기 있어?”
민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는 본능이 작동했는지, 그의 목소리에는 당혹감 속에 미세한 짜증이 섞여 있었다.
“여기 올 거면 미리 얘기라도 하지 그랬어.”
지은은 그 말을 듣고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자신이 왜 여기 있냐고? 약혼자가 다른 여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한 순간에 돌아오는 첫 질문이 그것이라니.
“그게 지금 중요한가요, 민석 씨?”
지은이 민석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섰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수진을 직시했다.
“수진아. 아파서 집에서 쉬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지은아, 그게…… 그러니까 내가 설명할게. 이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수진이 허둥지둥 손사래를 치며 민석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눈도 맞추지 못하는 태도가 이미 모든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면 뭔데? 친구 약혼자랑 호텔 지하 주차장에서 키스하는 게,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면 도대체 무슨 관계야?”
지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민석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하 주차장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는 태도였다.
결혼을 3주 앞둔 약혼녀의 상처보다, 재벌가 후계자로서의 평판과 남들의 시선이 먼저인 남자.
“지은아, 일단 누군가 볼지도 모르니까 차에 타. 장소 옮겨서 이야기하자.”
민석이 지은의 팔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지은은 그의 손을 차갑게 쳐냈다. 짝, 하고 정적을 깨는 소리가 주차장에 울려 퍼졌다.
“손 치워요.”
“윤지은!”
“언제부터였어?”
지은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지은의 태도에 오히려 민석이 흠칫했다. 지은이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을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실수였어. 오늘 잠깐 술 한잔하다가 분위기에 쏠려서……”
“거짓말하지 마.”
지은이 민석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실수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아니었어. 두 사람, 오늘 처음 이런 거 아니잖아.”
민석은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허술한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눈치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담배를 꺼내려다 그만두고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은은 시선을 수진에게 돌렸다. 가장 믿었던 친구, 제 연애사의 모든 과정을 알고 있고, 결혼식 드레스를 함께 골라주며 눈물을 글썽이던 여자.
“수진아. 말해. 언제부터야?”
“지은아, 제발……”
“말해!”
지은의 고함이 주차장 천장을 울렸다. 마침내 참아왔던 분노가 균열을 일으키며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수진은 어깨를 움찔거리더니, 결국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네 달 전부터야.”
네 달.
그 단어가 지은의 귓가에 둔탁하게 꽂혔다.
지은은 순간 거친 숨을 내뱉었다. 네 달 전. 석 달 전도 아닌, 네 달 전.
양가 상견례를 마치고 정식으로 결혼 날짜를 잡았던 바로 그달이었다. 수진이 지은의 손을 잡고 “드디어 결실을 맺는구나, 너무 부럽고 축하해”라며 환하게 웃어주던 바로 그 시기였다.
수진은 그 미소 뒤에서, 지은이 결혼 준비로 바빠 제정신이 아닌 사이 민석의 침대로 들어갔던 것이다.
지은은 천천히 민석을 바라보았다. 5년 동안 함께한 사람의 얼굴이 낯설었다.
결혼식까지 남은 시간, 단 21일.
그 날짜를 누구보다 먼저 기억해 주던 친구가, 네 달 동안 자신의 약혼자와 만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