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조건을 바꾸는 사람
10. 조건을 바꾸는 사람
다음 날, 지은은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와 전날 밤 현우에게서 받아온 계약서 초안을 다시 펼쳤다. 표지에는 계약 당사자로 ‘차현우’와 ‘윤지은’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고, 본문에는 10개월 동안의 결혼 생활에 관한 기본적인 조항들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녀가 주의 깊게 살핀 것은 금전적 보수보다 기간과 종료 조건이었다.
현우는 10개월 동안 부부로서 생활을 유지하자고 했지만, 계약서 본문에는 기간이 종료된 후 ‘합의이혼 절차를 진행한다’고 적혀 있었다. 10개월이 지나 계약상 의무가 끝나더라도 실제 혼인관계가 자동으로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혼 과정에서 분쟁이 발생할 여지도 남아 있었다.
지은은 해당 조항 옆에 확인이 필요한 내용을 적어두고 다른 항목들도 검토했다. 공식 행사에 참석해야 하는 범위는 모호했고, 동거 기간 중 사적인 공간을 어떻게 구분할지에 관한 기준도 부족했다. 계약이 중도 종료될 경우의 정산 방식이나 혼인관계가 회사 생활에 영향을 미쳤을 때의 대응 절차 역시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반면 계약서에 적힌 보수의 규모는 상당했다.
총액 10억 원.
혼인신고 이후 2억 원을 지급하고, 나머지 8억 원은 10개월의 계약 기간이 끝난 뒤 지급한다는 조건이었다. 지은이 지난 5년간 태경라이프에서 일하며 모은 돈과 앞으로의 예상 소득을 감안할 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오미경 여사가 내밀었던 합의서와는 성격이 달랐다. 오미경의 돈은 지은이 하지 않은 잘못을 인정하는 대가였지만, 현우의 보수는 10개월 동안 계약에 따른 의무를 수행하는 대가였다.
물론 그 차이만으로 결혼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지은은 지금 당장 생활이 어려운 형편도 아니었고, 회사에서 맡은 업무 역시 정상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현우와 결혼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잃을 것은 없었다.
다만 지난 몇 주 동안 겪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태경그룹에서 계속 일하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당장 회사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지만, 언젠가 다른 회사로 옮기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어질 수도 있었다.
10억 원이라면 그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이 훨씬 많아질 것이다. 당장의 월급이나 생활비에 얽매이지 않고 이직을 준비할 수도 있었고, 이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독립적인 브랜드 기획 업무에 도전할 여유도 생겼다.
문제는 그 돈을 받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동생의 전 약혼녀와 결혼한 태경그룹 장남의 아내로 10개월을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부터가 부담이었다. 혼인신고와 이혼 기록은 계약서로 없앨 수 없었고, 가족들과의 갈등이나 회사에서 생길 소문 역시 예상하기 어려웠다.
지은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과 수정해야 할 항목들을 구분해 정리했다.
적어도 계약을 검토할 생각이라면 무엇을 감수해야 하고, 그 대가로 무엇을 보장받을 수 있는지는 알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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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퇴근 후, 지은은 언니 지혜와 동네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파혼과 회사 일로 힘들어하던 지은을 곁에서 지켜본 언니였기에 현우에게 결혼을 제안받았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 다만 처음부터 계약서를 꺼내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사람이 너한테 결혼을 제안했다고?”
“응.”
“제정신이야? 얼마 전까지 그 집안 때문에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그 형이 너한테 결혼하자고 한다고?”
“나도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어. 그런데 진심이더라고.”
“그래서? 당연히 거절했겠지?”
“거절했어. 그런데 계약서 초안을 받아와서 읽어보고 있어.”
지혜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너 지금 그걸 고민하고 있다는 거야?”
“아직 결정한 건 아니야.”
“지은아. 아무리 그래도 그 집안하고 다시 엮일 필요가 있어? 민석이 때문에 겪은 일도 겨우 끝났잖아.”
“알아. 나도 그게 제일 걸려.”
지은은 현우가 아버지의 정략결혼 요구를 피하기 위해 일정 기간 법적인 혼인관계를 유지할 상대를 찾고 있다는 사정을 설명했다.
“10개월 동안 같이 살면서 공식적인 가족 행사에도 참석해야 한대. 그 대신 보수를 주겠다고 했고.”
“얼마나 주는데?”
“10억.”
“……십억?”
지혜는 금액을 다시 확인했다.
“그 정도 돈이면 작은 돈은 아니지. 그런데 너, 그 돈 받으려면 정말로 그 사람이랑 결혼해야 하는 거잖아. 같은 집에서 살고, 그 부모도 만나고.”
“맞아.”
“그런데도 할 생각이 들어?”
지은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금액만 놓고 보면 분명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민석과 파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형과 결혼한다는 건 단순히 10개월을 함께 보내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회사 그만둘 생각은 없어.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여기서만 일하게 될지는 모르잖아. 나중에 다른 일을 하고 싶어질 수도 있고.”
“그건 그렇지.”
“그때 돈 때문에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솔직히 좀 크긴 해. 그렇다고 무조건 하겠다는 건 아니야.”
지혜는 지은의 설명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럼 뭐가 제일 걱정되는데?”
“계약이 끝난 뒤에도 문제가 남을 수 있다는 거. 그리고 그쪽 가족들하고 다시 얽혀야 한다는 거.”
“그럼 그 문제부터 해결할 수 있는지 알아봐. 돈을 얼마나 준다는 말만 믿고 결정하지 말고.”
지은은 언니의 말에 동의했다. 현우가 제시한 조건은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었고, 법적으로 어디까지 보장받을 수 있는지조차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수정할 부분을 정리했어. 한번 이야기해 보려고.”
“그 사람이 다 받아준대?”
“모르지. 만나서 얘기해 봐야지.”
지혜는 여전히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나는 네가 또 그 집안 사람들 때문에 고생할까 봐 걱정돼.”
“알아, 언니.”
“그리고 아무리 계약이라고 해도 결혼은 결혼이야. 그거 하나는 잊지 마.”
지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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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태경홀딩스 사옥에서 조금 떨어진 북카페 별실.
이번 만남은 지은이 먼저 요청했다. 현우에게 계약서에서 확인할 사항과 수정하고 싶은 조건이 있다고 연락했고, 두 사람은 업무가 끝난 뒤 따로 시간을 정했다.
지은이 건넨 수정안을 검토하던 현우가 입을 열었다.
“수정한 부분이 꽤 많네요.”
“그만큼 확인할 게 많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계약을 수락한 건 아니라는 점부터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알고 있어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지은은 회사 업무에 관한 조건부터 설명했다.
현우와 결혼하더라도 태경라이프에서 맡고 있는 업무는 그대로 수행할 생각이었다. 결혼을 이유로 인사나 업무 배치에 개입하거나,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퇴사를 요구하는 일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표님이 제 인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시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특혜를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혼인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도 있고요.”
“그 부분은 저도 생각했어요. 다만 결혼 사실이 알려지면 회사 차원에서 이해충돌 여부를 확인할 필요는 있을 겁니다. 그건 제가 임의로 생략할 수 있는 절차가 아니에요.”
“정식 절차가 필요하다면 따르겠습니다. 대신 제 업무에 개인적인 판단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히 해주세요.”
“그렇게 하죠. 실제로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는 별도로 확인해 볼게요.”
생활 조건에 대해서도 몇 가지 사항을 조율했다.
지은은 각방 사용과 동의 없는 사적 공간 출입 금지, 서로의 개인 일정에 대한 간섭 금지를 요구했다. 현우는 대체로 동의했지만, 가족 행사만큼은 사전에 협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가족 행사에 전부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은 받아들이기 어려워요. 부부로 지내기로 한 이상 어느 정도는 함께해야 할 테니까요.”
“저도 무조건 참석하지 않겠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일하고 있거나 개인적인 일정이 있는데 일방적으로 참석하라고 하시는 건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럼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행사와 조정할 수 있는 일정을 구분하죠. 일정도 가능한 한 미리 알려드릴게요.”
“그렇게 해주세요.”
두 사람은 참석할 행사의 범위를 미리 협의하고, 특별한 사정으로 참석하기 어려울 때에는 일정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해당 조항을 수정하기로 했다.
생활 조건에 관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지은은 보수 지급 방식에 관한 조항으로 넘어갔다.
“초안에는 혼인신고 후 2억 원을 지급하고, 나머지 8억 원은 계약 기간이 끝난 뒤 지급한다고 되어 있더군요.”
“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조건은 바꾸고 싶습니다. 제가 10개월 동안 의무를 다한 뒤에야 나머지 대가를 받는다면, 그사이에 계약이 중단되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불리해질 수 있으니까요.”
“어떤 방식을 원하세요?”
“혼인신고 이후 지급하는 2억 원은 그대로 두고, 나머지 8억 원을 계약 기간에 나눠 지급해 주세요. 매달 8천만 원씩요.”
현우는 지급 방식을 변경하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었다. 다만 지은이 이어서 제시한 중도 종료 조건에서는 의견이 달랐다.
“대표님 측 사정으로 계약이 중단된다면 남은 기간의 보수도 지급해 주셔야 합니다. 그로 인해 제가 입는 손해에 대해서도 별도의 보상 기준이 필요하고요.”
“분할 지급은 괜찮아요. 그런데 계약이 중단됐다는 이유만으로 남은 보수에 위약금까지 모두 지급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예요.”
“대표님께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끝내겠다고 하시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그 경우에는 책임을 져야겠죠. 다만 계약이 끝나는 이유가 모두 같지는 않을 테니까요.”
현우는 중도 종료 사유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어느 한쪽이 계약 조건을 위반했을 수도 있고, 양측이 협의해 계약을 끝내기로 결정할 수도 있었다. 실제 혼인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제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중단하는 경우와 윤 대리가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까지 같은 기준으로 처리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면 사유를 나누면 되겠네요.”
“네. 그게 좋겠어요.”
지은은 자신도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모든 보수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현우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종료하거나 합의한 생활 조건을 위반해 계약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경우에는 별도의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대표님 측 귀책으로 중단된다면 잔여 보수 지급을 원합니다. 추가로 발생한 손해는 따로 정산할 수 있도록 하고요. 반대로 제가 정당한 사유 없이 계약을 중단하면 그때까지 이행한 기간을 기준으로 정산하면 되겠죠.”
“쌍방 합의로 종료하는 경우에는 별도 정산에 합의하는 걸로 하고요?”
“네. 다만 어느 쪽 책임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을 테니까, 그 기준은 변호사 검토를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현우는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럼 그 방향으로 다시 정리해 보죠. 잔여 보수나 손해배상에 관한 조항이 실제로 어디까지 유효한지도 확인하고요.”
“저도 별도로 변호사를 선임해서 검토받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제 쪽에서 준비한 변호사의 의견만 들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번 논의로 모든 조건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어느 쪽이 어떤 의무를 지고, 계약이 중단되면 무엇을 기준으로 정산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을 좁힐 수 있었다.
지은은 수정할 내용을 정리하다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물었다.
“대표님. 이 결혼이 혹시 차민석이나 오미경 여사에게 복수하기 위한 수단은 아니죠?”
“아니에요.”
“제가 민석 씨와 결혼할 예정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저를 선택하신 건 아닌가 해서요.”
“그 일 때문에 윤 대리에게 결혼을 제안한 건 아니에요. 가족들이 반대할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제가 원하지 않는 혼담을 정리하려는 게 목적입니다.”
지은은 그 대답을 듣고도 의문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현우가 자신을 선택한 이유는 여전히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고, 가족들의 반대까지 감수하면서 계약을 추진하려는 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의 모든 생각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건 실제로 어떤 조건을 보장받을 수 있는지였다.
“그럼 저도 제 입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우가 기다리자 지은은 준비해 온 수정안을 다시 확인했다.
“오늘 이야기한 조건들이 반영되고, 제가 별도로 선임한 변호사에게 검토받았을 때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계약을 진행할 의사가 있습니다.”
“그러면 조건부로 받아들이시는 거네요?”
“네. 최종 계약서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확정된 게 아닙니다.”
“알겠어요. 수정안을 다시 정리해서 보내드릴게요.”
지은은 혼인신고나 가족들에게 결혼 사실을 알리는 일도 최종 계약이 성립한 이후에 진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우는 그 조건 역시 받아들였다.
다만 두 사람이 이야기한 내용을 실제 계약서에 어느 정도까지 반영할 수 있는지는 별도로 확인해야 했다. 혼인신고나 이혼처럼 당사자의 신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문제는 계약서만으로 모두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은은 자신이 생각한 조건을 대부분 전달했다는 것을 확인한 뒤 서류를 챙겼다.
이제 남은 건 법적인 검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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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지은은 개인 이메일로 도착한 계약서 수정 검토안을 확인했다.
발신자는 현우가 개인적으로 선임한 외부 법무법인의 담당 변호사였다. 첨부된 문서에는 지난번 협의했던 사항들이 반영되어 있었고, 법률적으로 추가 검토가 필요한 조항들도 별도로 표시되어 있었다.
공식 일정의 범위와 생활 공간, 업무상 독립성에 관한 내용은 비교적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보수 역시 혼인신고 이후 2억 원을 지급하고 남은 8억 원을 10개월에 걸쳐 분할 지급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어 있었다.
중도 종료와 정산에 관한 조항은 귀책 사유별로 구분되어 있었지만, 실제 효력과 분쟁 발생 시 처리 방식에 대해서는 추가 법률 검토가 필요하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지은은 자신이 선임할 변호사에게 해당 문서를 검토받은 뒤 최종 의견을 전달하기로 했다.
그때 현우에게서 개인 문자가 도착했다.
- 수정한 검토안 보냈어요. 확인하시고 더 조정할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 그리고 계약이 최종 성립되면 가족들에게 언제 결혼 사실을 알릴지도 의논해야 할 것 같아요.
지은은 두 번째 문장을 다시 읽었다.
언니에게는 이미 제안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부모님께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현우와 결혼한다면 얼마 전 자신과의 결혼이 취소된 민석 역시 그 사실을 알게 될 터였다.
계약 조건을 검토하는 동안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지은은 현우에게 답장을 보냈다.
- 검토안 확인했습니다. 변호사 검토가 끝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 가족들에게 알리는 문제는 그때 따로 이야기하시죠.
답장을 보낸 뒤 지은은 다시 계약서를 살펴보았다.
10개월이라는 기간과 보수, 서로 지켜야 할 의무들은 문서로 정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께 차민석의 형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