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허락과 계약
11. 허락과 계약
오후 반차를 낸 지은은 현우 측에서 전달받은 혼인 계약 수정 검토안을 가지고 개인 법률사무소를 찾았다. 회사 법무팀이나 현우가 소개한 변호사가 아니라, 직접 알아보고 선임한 사람이었다. 예약할 때 서류를 미리 보내 두었기 때문에 상담은 곧바로 핵심으로 들어갔다.
“가장 주의하셔야 할 건 열 달 뒤의 이혼입니다.”
변호사는 계약서의 종료 조항을 펼쳐 지은에게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은 기간이 끝나면 협의이혼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지만, 그 약속만으로 혼인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상대방이 이혼에 동의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협의이혼은 할 수 없겠죠. 그렇다고 이 계약서만으로 재판상 이혼을 바로 인정받는 것도 아닙니다. 법에서 정한 이혼 사유가 있는지 별도로 판단해야 하니까요.”
지은은 그 조항에 미리 표시해 둔 부분을 다시 읽었다. 보수와 생활 규칙은 여러 차례 수정했지만, 정작 계약을 끝내고 난 뒤에도 법적인 관계가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은 문구 몇 줄로 해결할 수 없었다.
“상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제가 불리해질 수도 있다는 뜻이네요.”
“네. 이건 서로 지키기로 한 약속을 문서로 남기는 일이지, 장래의 행동까지 강제하는 장치는 아니에요. 그래서 계약 조건뿐 아니라 상대방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도 중요합니다.”
차현우를 믿을 수 있을까. 지은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지은의 요구를 무시하지 않았고, 의견이 다른 부분에서도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몇 차례의 만남만으로 그가 열 달 뒤 어떤 선택을 할 사람인지 알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아직 서로를 잘 알지 못했다. 계약서를 믿고 서명하는 것과 현우라는 사람을 믿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변호사는 보수의 법적 효력과 세금 처리에 관해서도 주의할 점을 설명했다. 혼인과 연계된 금전 약정에는 다툼의 여지가 있고, 돈의 성격과 지급 방식에 따라 세금 문제가 달라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지은은 검토 의견을 서면으로 정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해했다고 해서 위험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모른 채 서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 저녁 지은은 검토 의견을 현우에게 이메일로 전달했다. 필요한 수정은 양쪽 변호사에게 맡기기로 하고, 가족에게 결혼 사실을 어떻게 알릴지만 직접 통화로 확인했다.
“대표님, 부모님께 오래전부터 연애한 사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얼마 전까지 민석 씨와 결혼을 준비했다는 걸 아시잖아요. 갑자기 대표님과 결혼한다고 하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실 거예요.”
“그렇겠죠. 그렇다고 없는 이야기를 만들 필요는 없어요. 어떻게 말씀드릴지는 윤 대리가 정해요.”
지은은 잠시 망설였다. 계약이라는 사정까지 설명할 수 없다면 부모님께는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결혼일 것이다.
“대신 계약금이나 생활 조건처럼 구체적인 내용은 양가 가족에게 공개하지 않는 걸로 했으면 합니다.”
“네. 저도 그럴 생각이에요. 서로 동의하지 않은 내용은 이야기하지 않는 걸로 하죠.”
며칠 뒤 수정 사항을 반영한 문서가 다시 도착했고, 지은은 자신의 변호사에게 마지막 확인을 받았다. 계약이 당사자에게 모든 위험을 없애 주지는 못한다는 설명도 달라지지 않았다. 지은은 그 내용을 알고 서명하기로 했다.
서명 전날, 지은은 언니 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계약을 진행한다는 사실만큼은 직접 알려주고 싶었다.
“언니, 나 내일 계약서에 서명해.”
— 너 정말 내일 서명하는 거야?
“응. 변호사 검토도 끝났어.”
— 집도 안 봤다면서. 같이 살 집이잖아.
“혼인신고 전에 보러 가기로 했어.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집을 알아보거나 계약을 끝낼 수도 있게 해 뒀고.”
— 그 사람이 그런 조건도 받아줬어?
“응.”
지혜는 한동안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작게 들렸다.
— 네가 생각 없이 결정할 애는 아닌 거 알아. 그래도 엄마 아빠한테는 어떻게 말할 건데?
“토요일에 직접 가서 말씀드리려고. 언니는 아직 아무 말 하지 마.”
— 당연하지. 대신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숨기지 말고.
“알았어.”
지은은 통화를 마친 뒤 다음 날 서명할 장소와 시간을 확인했다. 일정은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
* * *
계약서 서명은 태경홀딩스 사옥이 아닌, 김재훈 변호사의 법률사무소에서 진행됐다. 현우가 개인적으로 선임한 변호사라고 소개받았고, 지은이 선임한 변호사도 자리를 함께했다.
최종 계약서에는 그동안 합의한 지급 일정과 생활 조건, 각자의 책임이 정리되어 있었다. 지은은 이미 여러 번 읽은 내용 대신 마지막으로 추가한 주거 관련 조항부터 확인했다.
현우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을 우선 검토하되, 혼인신고 전에 지은이 직접 집을 보고 동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주거 환경이 합의한 조건에 맞지 않으면 다른 방안을 협의하고, 합의하지 못하면 혼인신고 전에 계약을 종료할 수 있도록 했다. 지은이 아직 보지도 못한 집에서 무조건 열 달을 지내기로 약속할 수는 없었기에 요구한 조건이었다.
“수정 요청하신 내용까지 모두 확인하셨습니까?”
지은의 변호사가 물었다.
“네. 확인했습니다.”
김재훈은 앞으로 혼인신고가 이루어지면 계약서와는 별개로 법률상 배우자로서의 지위가 생긴다는 점을 짧게 설명했다. 지은은 이미 상담에서 들었던 내용이었지만, 마지막 설명이 끝날 때까지 서류를 덮지 않았다.
서명란에는 현우와 자신의 이름이 각각 인쇄되어 있었다. 지은은 자신의 이름 옆에 서명했다. 며칠 동안 검토하고 수정했던 조건들이 이제 실제로 두 사람의 약속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어 현우도 서명을 마쳤다. 변호사들이 서류를 확인하고 각자 보관할 사본을 건넸다. 절차는 생각보다 간단하게 끝났다.
아직 두 사람이 부부가 된 것은 아니었다. 혼인신고는 주거 확인과 가족 통보를 마친 뒤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본을 건네받자, 막연하던 일정들이 갑자기 해야 할 일의 순서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법률사무소를 나온 뒤 두 사람은 근처 카페에서 남은 일정을 의논했다.
“집부터 보여드리는 게 좋겠네요. 제가 사는 곳을 생각하고 있는데, 직접 보고 결정하세요. 방은 따로 쓸 수 있어요.”
“상주하는 분은 없나요? 관리나 청소하시는 분이 계실 수도 있어서요.”
“상주하는 분은 없어요. 청소하시는 분이 정해진 날에 오시는데, 앞으로는 방문 전에 알려드릴게요.”
“제가 없는 날로 조정할 수도 있을까요?”
“가능해요. 집을 보면서 생활 방식도 같이 정하죠.”
지은은 원룸 임대차 계약도 아직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현우는 집을 확인하고 혼인신고 일정이 정해진 다음에 이사를 준비해도 된다고 했다. 지은 역시 자신이 살던 곳을 서둘러 비웠다가 문제가 생기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알리는 순서도 정해야겠어요.”
현우의 말에 지은은 준비해 둔 부탁을 꺼냈다.
“회장님께 말씀하시기 전에 제가 부모님부터 뵐 시간을 주실 수 있을까요? 다른 분에게 소식을 듣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요.”
“물론이죠. 윤 대리가 먼저 말씀드리세요. 저는 그다음에 아버지께 이야기할게요.”
“민석 씨나 오미경 여사께도 따로 연락하실 건가요?”
“아버지께 먼저 말씀드릴 생각이에요. 그쪽에 어떻게 전달할지는 그다음에 결정해야겠죠.”
아버지에게 알리겠다는 현우의 말은 간단했지만, 지은에게는 그 후의 일이 더 신경 쓰였다. 민석이 이 결혼을 알게 되면 무슨 말을 할까. 얼마 전까지 자신을 붙잡으려 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반응까지 예상하며 지금 결정을 바꿀 수는 없었다.
“저희 부모님이 대표님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실 수도 있어요.”
“그럼 같이 찾아뵈어요. 필요하시면 제가 먼저 연락드려도 되고요.”
“아뇨. 우선은 제가 말씀드릴게요.”
현우는 더 묻지 않았다. 지은은 그 점이 편하면서도, 부모님께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는 여전히 막막했다.
* * *
다음 날 회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브랜드전략팀에서는 신규 브랜드 홍보 일정과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고, 지은도 팀장에게 수정 보고서를 제출한 뒤 맡은 업무를 처리했다.
회의 자료에 차현우 대표이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회의의 최종 승인권자로만 보던 이름이었다. 이제 그 사람과 같은 계약서에 서명했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지은은 곧 보고서의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다. 회사에서는 아직 누구도 두 사람의 결혼 계획을 알지 못했다.
퇴근 후에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모님께 말을 꺼내는 순서를 머릿속으로 여러 번 바꿔 보았지만, 정작 상대가 누군지 묻는 질문에 다다르면 어느 쪽도 수월하지 않았다.
“엄마, 토요일에 집에 갈게.”
— 그래? 무슨 일 있어?
“얼굴도 볼 겸. 드릴 말씀도 있고.”
— 회사에서 또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지?
“아니야. 그건 다 해결됐어.”
— 그래, 알았어. 아빠도 집에 계실 테니까 와.
지은은 통화를 끝내고도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결혼한다고 말하면 부모님은 누구인지부터 물으실 것이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순간에는, 왜 하필 그 사람인지도 설명해야 했다. 준비해 둔 말은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 충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주말 오전, 지은은 부모님 댁을 찾았다. 어머니 인주는 딸이 들어오자 반갑게 맞으면서도 얼굴부터 살폈다. 파혼 이후 연락할 때마다 괜찮다고 답했지만, 직접 만나면 꼭 한 번씩 안색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회사 일은 이제 괜찮아?”
“응, 다 끝났어.”
“그럼 다행이고. 밥은 잘 먹고 다니니? 지난번보다 조금 마른 것 같은데.”
“잘 먹어. 엄마, 아빠는?”
“방에 계셔. 왜, 무슨 일 있어?”
“두 분한테 같이 말씀드릴 게 있어서.”
인주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남편을 불렀다. 아버지가 거실로 나오자 지은은 두 사람 맞은편에 앉았다. 인주가 과일을 꺼내겠다며 일어나려 하자 오늘은 괜찮다고 말렸다. 평소 같으면 먼저 무슨 반찬을 했는지 물었을 텐데, 오늘은 밥 이야기를 할 여유가 없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심각하게 앉아 있어?”
아버지가 묻자 지은은 말을 골랐다. 며칠 동안 생각해 두었던 설명보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엄마, 아빠. 저 결혼하기로 했어요.”
“……뭐?”
인주는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아버지도 바로 말을 보태지 않았다.
“결혼할 사람이 생겼어요.”
“너 파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결혼 이야기가 나와? 그동안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었니?”
“아니요. 오래 만난 사이는 아니에요.”
“그런데 결혼을 한다고? 지은아, 엄마는 네가 누구 만난다는 얘기도 못 들었어.”
“최근에 회사 일로 알게 됐어요. 저도 갑자기 결정한 건 아니고,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 충분히 이야기했어요.”
인주는 딸의 설명을 듣고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 예식장과 신혼집 문제로 분주했던 딸이었다. 그 결혼이 취소된 뒤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도 가까이서 지켜봤다.
“엄마가 결혼하지 말라는 게 아니야.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괜찮은 사람인지 알아야 하잖아. 지난번 일도 있었는데, 이렇게 서두르면 어떡해.”
“그런 걱정 하실 거 알아요.”
“그럼 조금 더 만나 보고 결정하면 안 되니?”
지은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충분히 시간을 두고 만나 보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하려는 결혼은 부모님이 생각하는 방식과 달랐다.
아버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일단 상대가 누군지부터 들어보자. 나이는 몇이고, 무슨 일 하는 사람이야?”
“저보다 열 살 많아요. 서른여덟이고, 회사 대표예요.”
“회사 대표?”
“네. 태경홀딩스요.”
“태경홀딩스면 네가 다니는 회사랑 같은 그룹 아니냐?”
“맞아요.”
인주의 얼굴에서 잠깐 다른 표정이 스쳤다. 상대가 회사 대표라는 설명보다 같은 그룹 사람이라는 사실이 더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회사에서 알게 된 사람이야? 그럼 네가 파혼한 것도 알겠네.”
“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자는 거야?”
그 질문에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현우가 자신에게 계약결혼을 제안한 이유를 있는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오래전부터 사랑해 왔다고 꾸며낼 수도 없었다.
“서로 결혼을 결정할 사정이 있었어요. 자세한 건 조금씩 말씀드릴게요. 다만 제가 충분히 생각하고 선택했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인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 지은은 그 표정을 보며 부모님이 이 정도 설명으로 납득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그럼 이름은 뭔데?”
아버지가 물었다.
“차현우 씨예요.”
“차현우?”
인주가 이름을 따라 말했다. 아버지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잠깐만. 태경홀딩스 대표면…… 차민석하고 같은 집안 사람 아니야?”
“네.”
“무슨 관계인데?”
지은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더 미룰 수 있는 말도 아니었다.
“차민석 씨 형이에요.”
“뭐라고?”
인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딸에게 결혼을 서두르지 말라고 하던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그 말조차 바로 나오지 않는 듯했다.
“……그러니까, 이번에 너랑 결혼한다는 사람이 민석이 형이라는 말이야?”
“응. 정확히는 이복형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