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두 번째 인사
12. 두 번째 인사
“……민석이 형이라고?”
인주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도 한동안 지은을 바라봤다. 얼마 전까지 그 집안과 결혼을 준비하던 딸이었다. 상대가 차민석의 이복형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인주의 얼굴에서 처음의 놀라움이 걱정으로 바뀌었다.
“너 민석이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니. 하필 상대가 그 사람 형이라니?”
“엄마, 나도 이상하게 들리는 거 알아.”
“알면서 왜 그래? 그 집에서 겪은 일 벌써 잊었어?”
지은이 대답을 고르는 사이, 아버지가 물었다.
“그 사람은 언제부터 알았어? 민석이랑 헤어지기 전에도 연락했니?”
“아니요. 그전에는 회사에서 업무 때문에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예요. 개인적으로 이야기한 건 파혼한 뒤부터고요.”
“결혼하자는 건 누가 먼저 말했어?”
“……현우 씨가요.”
“이유는?”
지은은 부모님에게 계약의 조건을 밝힐 수 없었다. 차정식이 추진하는 혼담을 피하려 한다는 사정만 꺼내도, 왜 그 일에 지은이 나서야 하느냐는 질문이 따라올 터였다.
“그분 쪽에 사정이 있어요. 저도 듣고 결정한 거고요.”
“무슨 사정인지 부모한테는 말도 못 하면서 결혼은 하겠다고?”
아버지의 말에 인주가 거들었다.
“그냥 조금 더 만나 보면 안 되니? 네가 민석이하고 오 년을 만나고도 무슨 일을 당했는데, 얼마 알지도 못한 사람하고 또 결혼을 서두르냐고.”
인주는 결혼을 준비하던 때의 이야기를 잠깐 꺼냈다. 파혼 직후 지은의 짐을 함께 정리하고, 친척들에게 취소 소식을 알렸던 일도 있었다. 그때 인주가 얼마나 속상해했는지 지은도 알고 있었다. 지은도 그때 어머니가 직접 전화를 돌리며 사정을 설명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은은 그 말에 대꾸할 수 없었다. 현우를 잘 알지 못한다는 건 그녀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변호사 역시 계약서를 아무리 꼼꼼히 써도 열 달 뒤 상대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알 수 없다고 했었다.
“민석 씨한테 복수하려고 이러는 거 아니에요. 누가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요. 위험한 부분까지 생각해서 제가 결정했어요.”
“그 사람이 좋아서 그런 거야? 만난 지도 얼마 안 됐는데도?”
인주의 질문에 지은은 잠시 말이 막혔다.
“기간이 뭐가 중요해. 그리고 나도 아무 생각 없이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니야.”
“엄마는 그게 더 걱정이야.”
인주는 더 따지지 않았다. 아니, 좀처럼 대화가 정상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탓에 포기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아버지는 지은에게 상대를 직접 만나 보자고 했다. 지은은 현우가 얼마 전 부모님이 원하시면 찾아뵙겠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일단 연락은 해 볼게요.”
“그리고 지은아.”
“응.”
“엄마가 그 사람을 만나서 괜찮은 분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게 네 결혼에 바로 찬성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건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도 알아, 엄마.”
“그래. 그 사람 말도 들어 보자. 그전에는 결혼을 허락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본가를 나서면서도 지은은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부모님께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현우가 온다고 해서 그 빈틈이 모두 메워질 리도 없었다.
* * *
지은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모님께 말씀드렸어요. 역시 많이 반대하세요.”
— 예상은 했어요. 직접 뵙고 이야기하자고 하시던가요?
“네. 왜 결혼을 서두르는지 대표님께 물어보고 싶으시대요.”
— 그럼 찾아뵈어야죠. 두 분 편하신 시간을 알려주세요.
“그리고 저희가 합의한 내용은…….”
— 가족에게 계약 조건을 알리지 않는다는 거요? 기억해요.
“그렇다고 사귀던 사이였다고 말을 맞출 수는 없잖아요.”
— 그럴 생각도 없어요. 결혼을 먼저 제안한 사람이 저라는 것도 말씀드릴게요.
지은은 집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현우는 어렵지 않게 동의했다. 회사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라지만, 이번에는 지은의 아버지에게 왜 딸과 결혼하느냐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그 대답을 현우도 준비해 두었을까.
* * *
다음 주말, 지은은 현우보다 한 시간 먼저 본가에 도착했다. 인주는 손님용 찻잔을 꺼내 놓았고 아버지는 거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현우가 올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집안은 오히려 평소보다 조용했다.
“그 사람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물어봤어?”
“오늘은 식사 안 하기로 했잖아.”
“알아. 그냥 물어본 거야.”
인주는 찻잔이 놓인 탁자를 한번 살펴보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지은도 현우가 뭘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계약서에 함께 지킬 규칙은 자세하게 적어 놓았으면서 그런 간단한 취향은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초인종이 울렸다. 현우는 짙은 색 정장 차림에 과일 상자와 차 세트를 들고 있었다. 지은이 문을 열자 그가 작게 인사했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뇨. 들어오세요.”
거실로 들어온 현우는 부모님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차현우입니다.”
인주가 자리를 권했고, 아버지도 현우와 인사를 나눈 뒤 맞은편에 앉았다. 지은은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회사에서 보던 현우와 특별히 달라진 건 없는데, 그가 어머니에게 차를 건네받는 광경은 이상하리만큼 낯설었다.
인주가 먼저 일상적인 질문을 했다. 혼자 살고 있는지, 일이 바빠 집에 들어갈 시간이 있는지. 현우는 길지 않게 대답했고, 함께 지내게 되면 생활에 필요한 부분은 지은과 상의하겠다고 했다.
“그쪽 부모님도 결혼 이야기 들으셨어요?”
“아직 아버지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지은 씨가 이쪽 부모님께 먼저 말씀드리고 싶다고 해서요. 오늘 돌아가면 직접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인주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 집에서도 쉽게 받아들이긴 어렵겠네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말은 이상하게 지은에게 더 현실적으로 들렸다. 여기서 부모님의 허락을 받더라도 현우의 집안에서는 같은 질문을, 아마 더 까다로운 방식으로 듣게 될 것이다.
아버지는 차가 반쯤 식었을 무렵 이야기를 꺼냈다.
“차 대표님. 우리 지은이하고 왜 결혼하려는지 듣고 싶습니다.”
“제가 먼저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그건 들었습니다. 왜 하필 우리 딸입니까?”
현우는 지은을 한번 본 뒤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회사에서 알게 됐어요. 함께 일을 하면서 자기 생각이 분명하고 맡은 일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는 걸 봤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기회도 있었고요.”
“그런 사람은 회사에 또 있겠죠. 결혼까지 결심한 이유를 묻는 겁니다.”
지은은 아버지가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다. 현우도 그 질문에 즉시 대답하지는 않았다.
“지은 씨와 이야기하는 게 편했습니다. 중요한 문제를 상의할 때도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대화를 피하지 않았고요. 제가 결혼을 제안할 수 있었던 건 그런 점 때문입니다.”
말을 꾸며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계약을 협의하면서 나눴던 대화를 부모님께는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지은을 불편하게 했다.
“민석이와의 일은 알고 계십니까?”
“네.”
“우리 딸이 그 일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도요?”
“알고 있습니다. 제가 동생의 형이라는 사실 때문에 걱정하시는 것도 이해하고요.”
“이해한다는 말씀은 하시겠죠. 그런데 같은 집안과 또 엮였다가 비슷한 일을 겪으면, 그땐 어떻게 합니까?”
현우는 섣불리 약속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거라고 말해도 믿기 어려우실 겁니다. 다만 민석이의 일과 제가 내린 결정은 별개입니다. 지은 씨에게 제안한 것도 저고요.”
아버지가 되물었다.
“그렇게 본인이 원해서 하시는 결혼이라면, 몇 달 더 알아보고 결혼하셔도 되잖습니까. 왜 이렇게 급합니까?”
여태껏 나온 질문 중 지은이 가장 걱정했던 것이었다.
“제 가족과 관련된 사정이 있습니다. 지은 씨에게는 설명했지만, 부모님께 지금 전부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차 대표님 사정 때문에 우리 딸이 결혼을 서둘러야 한다면, 저희는 더욱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우는 부정하지 않았다. 인주가 딸에게 물었다.
“지은아, 너 정말 이 사람하고 살아도 괜찮겠어? 지금이라도 더 생각해 보면 안 되겠니?”
지은은 한 번 더 미루면 부모님이 안심하실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현우가 민석의 형이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걱정하시는 거 알아. 그런데 내 결정이야. 대표님이 먼저 제안하셨지만 받아들인 건 나고, 결혼하고 나서 어떻게 살지도 내가 직접 정했어.”
“엄마 아빠가 모르는 일이 너무 많잖아.”
“맞아. 내가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있어. 그래도 나도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가는 건 아니야.”
아버지는 지은의 말을 듣다가 현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오늘 와서 이야기하신다고 마음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두 분은 이미 결혼하기로 정했고, 저희한테는 그걸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게 들리셨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은이가 우리한테 먼저 말했다는 건 압니다. 두 사람끼리 얼마나 깊이 의논했는지도요. 그런데 부모가 오늘 처음 듣는 사정으로 결혼하겠다고 정해 놓았다면, 좋아할 수는 없죠.”
“네. 그 점은 저희가 서둘렀습니다.”
현우가 변명하지 않자 아버지는 더 추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심쩍은 기색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우리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주가 현우에게 가져온 차를 더 마시고 가라고 했지만, 그 말에는 평소 손님을 붙잡을 때의 다정함이 없었다. 지은은 부모님께 인사하고 현우와 함께 집을 나섰다.
* * *
아파트 주차장까지 걷는 동안 지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불편하셨죠. 부모님이 같은 질문을 계속하셔서요.”
“당연히 물으실 수 있는 것들이었어요. 저라도 그랬을 것 같고요.”
“아버지는 아직도 대표님을 못 믿으시는 것 같아요.”
“오늘 처음 봤는데 벌써 믿으시면 오히려 제가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은은 그 말에 조금 웃었다. 그를 변호할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부모님 앞에서 곤란한 질문을 피하거나 지은에게 대답을 떠넘기지 않았다는 점은 고마웠다.
“부모님께는 조금 시간을 드리려고요.”
“네. 그렇게 해요. 저는 오늘 아버지께 말씀드릴게요.”
“오늘 바로요?”
“윤 대리 부모님께 먼저 말씀드리기로 했잖아요. 이제 제 차례죠.”
그가 돌아간 뒤 지은은 인주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차 대표가 예의 있게 인사한 건 알겠지만 결혼은 다시 생각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지은은 집에 잘 도착했다고 답했다.
저녁 여덟 시가 넘어서 현우에게 전화가 왔다.
—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나왔어요.
“많이 반대하셨죠?”
— 네. 결혼 상대가 윤 대리라는 걸 듣고 놀라셨고요.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하세요.
“언제 뵈면 될까요?”
— 아버지 댁에서요. 날짜는 윤 대리 일정 보고 맞출게요.
“다른 분도 계신가요?”
— 오미경 여사도 함께할 거예요.
그 이름을 듣자 청담동 갤러리에서 마주 앉았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 오미경은 파혼의 책임을 지은에게 돌리는 합의서에 서명하라며 거액의 돈을 제안했다. 지은은 거절했고, 그 후로는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일정 알려주세요.”
현우와 통화를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 윤지은 씨? 오미경이에요.
“안녕하세요, 여사님.”
— 현우와 결혼하신다면서요. 민석이와는 끝났다고 그렇게 분명히 말하더니요.
“민석 씨와는 끝난 게 맞습니다.”
— 그럼 처음부터 형 쪽에 마음이 있었던 건가요?
“그런 사실 없습니다. 파혼한 뒤에 현우 씨와 결혼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 회장님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실까요?
지은은 무슨 뜻이냐고 되묻지 않았다. 오미경은 지은이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이어 말했다.
— 지난번에는 조용히 정리하자고 했더니 합의서에 서명도 안 하셨죠. 이번엔 회장님 앞에서 그 일까지 들추실 생각인가요?
“여사님께서 먼저 파혼 사유를 문제 삼지 않으시면 저도 굳이 꺼낼 이유는 없습니다.”
— 제가 문제 삼으면요?
“그때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잘못으로 파혼했다는 내용에 서명하라고 하셨던 것도요.”
전화기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 윤지은 씨는 아직 태경생명 다니죠?
갑자기 회사 이야기가 나오자 지은은 대답하기 전에 잠깐 말을 골랐다.
“네.”
— 회장님이 두 사람 관계를 확인하시겠다고 마음먹으면, 어디까지 알아보실 것 같아요? 민석이와 헤어진 경위만 보실까요? 회사에서 현우하고 어떻게 가까워졌는지, 누가 먼저 접근했는지까지 묻지 않으실까요?
“확인하실 게 있다면 사실대로 답하면 됩니다.”
— 말은 쉽죠. 전에 회사에서 소문 한번 돌았을 때 지은 씨가 얼마나 곤란했는지 벌써 잊었나 봐요. 그때는 자료가 남아 있어서 해결됐지만, 사람 사이의 일은 그렇지 않거든요.
지은은 지난번 사내 보안 조사 때 자신에게 쏠렸던 시선을 떠올렸다. 이미 정리된 일이었다. 그런데도 오미경은 그 일을 알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바로잡을 겁니다.”
— 그럴 기회가 늘 주어지는 건 아니에요.
목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했다.
— 회장님을 만나기 전에 잘 생각해 보세요. 이번에 지은 씨가 잃을 게 정말 없는지.
지은은 잠시 대답을 고르다가 말했다.
“지난번에도 제가 하지 않은 일을 인정할 생각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건 지금도 같습니다.”
— 회장님 앞에서도 그 말씀부터 하시겠다는 거군요.
“여사님께서 사실과 다르게 말씀하시면 바로잡겠습니다.”
— 그럼 저도 준비는 해야겠네요. 그날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기억을 잘해 두세요, 윤지은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