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혼인신고
14화. 혼인신고
“회장님은 제가 회사를 그만두는 게 낫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어요. 대표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니요. 전혀요.”
“그런데 아까는 별다른 말씀을 안 하셔서요.”
“아버지가 물으신 건 회사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였으니까요. 그건 확인해야죠. 그렇다고 윤 대리가 일을 그만두는 게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지은은 그제야 자신이 묻고 싶었던 답을 들었다. 회장 앞에서 현우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길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결혼을 제안한 당사자마저 퇴사가 편하다고 생각한다면, 두 사람이 합의한 조건부터 달라지는 셈이었다.
“공식적으로 업무 조정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오면 협조할 생각입니다. 대신 사적인 이유로 제 일을 빼앗기는 건 싫어요.”
“나도 그건 바라지 않아요. 제가 인사에 끼어들면 더 곤란해질 테고요.”
“그 부분은 꼭 지켜주세요.”
“그래야죠. 대신 회사에 알려야 할 사항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절차대로 처리합시다.”
지은은 동의했다. 그 말이 회사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현우가 자신의 일을 그만두게 할 생각은 없다는 점은 확인했다.
현우가 주차된 차를 가리켰다.
“다음 주말에 시간 괜찮아요? 집을 보셔야 혼인신고 일정도 정할 수 있잖아요.”
“토요일 오후면 됩니다.”
“그럼 제가 주소 보내드릴게요.”
계약서를 쓰고 양가 부모님까지 만났는데도, 아직 현우가 사는 집이 어떤 곳인지는 몰랐다. 지은은 문득 그 사실이 조금 우스웠다.
* * *
토요일 오후, 지은은 현우가 보내준 주소를 찾아갔다. 보안 출입 절차를 거쳐 엘리베이터에 오르기까지 몇 번이나 방문 목적을 확인해야 했다. 층수 표시가 올라가는 동안 지은은 자신이 사는 원룸 건물의 낡은 공동현관을 떠올렸다.
현우는 현관에서 직접 문을 열어줬다. 회사에서 보던 정장 대신 어두운 니트와 편한 바지 차림이었다.
“찾아오기 어렵진 않았어요?”
“네. 다만 방문 절차가 좀 복잡하네요.”
“살게 되면 따로 등록할 수 있어요. 매번 저를 찾을 필요는 없고요.”
현관에서부터 거실까지 이어지는 복도는 넓었고, 커다란 창으로 오후 햇빛이 들어왔다. 벽에는 그림 한 점, 거실 한쪽에는 책장과 낮은 소파가 놓여 있었다. 비싼 가구가 많아 보였지만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꾸민 공간 같지는 않았다. 소파 팔걸이에는 읽다 만 책이 엎어져 있었고, 테이블에는 커피잔이 하나 남아 있었다.
“대충 보시고 불편한 부분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현우는 거실과 주방을 지나 복도 안쪽으로 지은을 안내했다. 그의 침실과 서재는 한쪽에 있었고, 지은이 사용하게 될 방은 반대편에 떨어져 있었다. 방 안에는 침대와 옷장, 작은 협탁이 전부였다. 욕실도 따로 딸려 있었다.
“손님들이 가끔 쓰던 방이라 물건이 별로 없어요.”
“그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제 물건을 가져올 수 있으니까요.”
지은은 옷장을 열어 수납공간을 확인하고 창문도 살펴봤다. 방 자체는 충분히 넓었지만, 당장 열 달을 생활하기에는 몇 가지가 부족했다.
“책상을 놓을 수 있을까요?”
“어디에요?”
“창가 쪽이요. 퇴근하고 자료 보거나 책 읽을 때 쓰려고요.”
“가능하죠. 새로 하나 들일까요?”
“제가 쓰던 게 있어요. 크기만 맞으면 가져오려고요.”
현우가 창가 쪽을 살펴보았다.
“책상이 얼마나 큰데요?”
지은이 대략적인 크기를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히 들어가겠네요. 필요하면 가구는 옮겨도 돼요.”
“기존 물건은 어디 두면 되나요?”
“창고가 있어요. 그건 제가 정리할게요.”
지은은 자신이 쓸 방의 문이 복도에서 바로 보이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다른 사람이 드나들더라도 침실 앞을 지나지 않아도 되는 구조였다. 물론 실제로 함께 살아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계약서에 적힌 공간 분리는 가능한 집이었다.
“방에 잠금장치가 있으면 좋겠어요.”
“안쪽에서 잠그는 건 있는데, 따로 열쇠를 쓰는 방식은 아니에요. 원하면 바꿀 수 있어요.”
“그럼 들어오기 전에 바꿔도 될까요?”
“그러세요. 방을 쓰는 사람이 편해야죠.”
현우는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지은 역시 그게 자신을 의심해서 하는 요구가 아니라, 누구와 살든 필요한 사생활의 경계라고 생각했다.
방을 나온 뒤에는 복도 끝에 있는 세탁실과 수납공간을 확인했다. 현우는 평소 청소를 맡는 사람이 주중에 한 번 방문한다고 설명했고, 지은은 자신이 집에 있을 때는 일정이 겹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방문 날짜를 사전에 공유하고, 지은의 방은 청소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확인할 게 많네요.”
“제가요?”
“아뇨, 같이 사는 일이요. 혼자 살 땐 이런 얘기를 할 일이 없었잖아요.”
현우의 말에 지은도 동의했다. 누군가와 한집에 산다는 건 서로의 생활을 일일이 간섭하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규칙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 * *
주방으로 돌아왔을 때 현우가 마실 것을 물었다. 지은은 물이면 된다고 했고, 현우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냈다. 냉장고 안에는 음료와 과일, 몇 가지 간편식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집에서는 식사 잘 안 하세요?”
“아침 정도요. 저녁은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아서요.”
“그럼 요리는요?”
“잘 못해요. 계란이나 굽고, 가끔 국수 삶는 정도죠.”
“저도 특별히 잘하는 편은 아니에요.”
“잘됐네요. 그럼 서로 밥해 달라는 이야기는 안 하겠어요.”
“제가 부탁할 것처럼 보이세요?”
“그냥 미리 확인하는 거죠.”
“안심하세요. 제 밥은 알아서 먹을 수 있어요.”
현우가 웃었다. 회사에서는 좀처럼 나눌 일이 없는 대화였다. 지은도 자신이 처음으로 그에게 식사 습관 같은 것을 묻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다만 냉장고는 같이 써야 하잖아요.”
“그건 그래요. 칸을 나눌까요?”
“굳이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서로 먹을 걸 구분할 필요가 생기면 그때 정해요.”
“좋아요. 대신 제가 사 둔 거 먹어도 괜찮아요. 유통기한 지난 것만 아니면.”
“그건 확인해서 먹을게요.”
“저를 못 믿으시는군요.”
“방금 요리는 잘 못하신다고 하셨잖아요.”
현우는 반박하지 않았다. 지은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거실을 둘러봤다. 방마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적었지만, 곳곳에 현우의 취향이 남아 있었다. 계약을 위한 임시 숙소가 아니라 그가 원래 살아오던 집이었다.
“대표님은 집에 계실 때 주로 뭐 하세요?”
“책도 읽고, 밀린 일도 좀 하고요. 별로 특별한 건 없어요. 윤 대리는요?”
“저도 비슷해요. 집에 오면 조용히 있고 싶은 편이라서요.”
“그건 잘 맞겠네요. 저도 집에서까지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진 않거든요.”
지은은 그 말에 자신이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느낀 조용함을 떠올렸다. 큰 집이지만 누군가의 인기척이 끊이지 않는 공간은 아니었다. 그 점은 마음에 들었다.
현우는 현관 출입 권한도 지은 명의로 등록할 수 있다고 했다. 방문객으로 매번 연락할 필요가 없도록 하고, 출입 기록이나 관리 앱도 각자 확인할 수 있게 하겠다는 설명이었다.
“혼인신고하고 들어오면 윤 대리도 이 집에 사는 사람이잖아요. 들어올 때마다 저한테 허락받을 필요는 없죠.”
“그렇네요.”
말로 들으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지은은 그제야 자신이 현우의 집에 잠시 머무는 손님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렇다고 계약 기간 이후에도 이곳에 남을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이 쓰던 책상을 가져오겠다고 한 이유도 어쩌면 거기에 있었다.
“집은 괜찮아요?”
“네. 생활하는 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잠금장치랑 청소 일정만 조정해 주시면 돼요.”
“그럼 날짜를 잡아도 되겠네요.”
두 사람은 일정을 확인했다. 지은의 원룸은 임대차 계약이 아직 남아 있었고, 이사할 짐도 정리해야 했다. 현우는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지은은 혼인신고를 마치고 오래 따로 지내는 것도 계약 취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결국 신고 후 다음 주말을 이사 날짜로 정했다. 필요한 가구만 가져오고 나머지 물건은 원룸 계약을 정리하면서 처분하거나 보관하기로 했다.
혼인신고는 그보다 먼저 진행할 수 있었다. 지은은 회사에서 반차를 낼 수 있는 날짜를 확인했고, 현우도 그날 시간을 비워두겠다고 했다.
“증인 서명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언니한테 부탁해 보려고요.”
“좋아요. 저는 재훈이한테 부탁하죠. 서류는 미리 준비해 둘게요.”
지은은 두 사람이 일정표를 맞추는 모습을 보며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결혼식을 준비하던 때에는 예식장과 신혼여행, 양가 식사 일정까지 따졌었다. 이번에는 혼인신고 날짜와 이사 날짜만 정하면 됐다.
그 차이가 편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자신이 앞으로 열 달 동안 현우와 같은 집에 살게 된다는 사실만큼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 * *
“혼인신고 증인?”
지혜는 지은이 내민 서류를 보더니 다시 얼굴을 봤다. 두 사람은 퇴근 후 지은의 원룸 근처에서 만났다.
“응. 두 명이 필요하대. 한 명은 대표님 쪽에서 부탁하기로 했고.”
“그렇게 서두르지 말라고 했더니 결국 날짜까지 잡았네.”
“집도 보고 왔어. 계약한 대로 살 수 있는지 확인했고.”
“집이 괜찮으면 다야?”
“그런 뜻 아니잖아.”
지혜는 서류를 잠깐 들여다봤다. 며칠 전 부모님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이야기도 했다. 어머니는 아직 지은의 결혼이 걱정돼서 언니에게까지 같은 질문을 반복한 모양이었다.
“엄마한테는 내가 다시 이야기할게. 언니한테 설명하라고 하지 않을 거야.”
“내가 엄마 상대하는 게 힘들어서 이러는 줄 알아? 네가 걱정돼서 그러지.”
“알아.”
“정말 열 달 뒤에 끝낼 수는 있는 거야?”
지은은 잠깐 말을 멈췄다. 변호사에게 들었던 설명이 떠올랐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보장할 수는 없어. 그런 부분까지 확인하고 결정한 거야.”
지혜는 더 묻지 않았다. 결국 펜을 받아 신고서의 증인란을 채웠다.
“내가 서명한다고 찬성하는 건 아니야.”
“알아. 고마워.”
“나중에 후회할 일 생기면 그때도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지은은 대답 대신 서류를 조심해서 봉투에 넣었다. 언니의 걱정을 단번에 없앨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필요한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낼 사람이 있다는 건 다행이었다.
* * *
혼인신고를 하기로 한 날, 지은은 오전 근무를 마치고 구청으로 향했다. 평일 오후의 민원실에는 번호표를 뽑아 기다리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현우는 먼저 와 있었다. 별다른 약속이 있는 날처럼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오늘이 특별한 기념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서류는 챙겨 오셨죠?”
“네.”
지은은 가방에서 신분증과 준비한 혼인신고서를 꺼냈다. 신고서에는 두 사람의 인적 사항과 증인 두 명의 서명이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지혜가 서명한 칸 옆에는 김재훈의 이름이 있었다.
번호가 불리자 함께 창구로 갔다. 담당 직원은 신고서와 신분증을 확인하고 몇 군데 기재 사항을 다시 물었다. 지은은 안내받은 항목을 확인한 뒤 서류를 제출했다.
접수 절차는 어렵지 않았다. 담당자는 서류를 확인한 뒤 신고가 접수됐으며, 최종 처리 여부는 확인이 필요하다고 안내했다.
민원실을 나서자 현우가 물었다.
“생각보다 금방 끝났죠?”
“그러네요. 서류 준비할 때가 더 복잡했던 것 같아요.”
“다른 일정 없으면 식사라도 하고 갈까요?”
지은은 시계를 확인했다. 늦은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괜찮습니다. 다만 너무 오래는 못 있어요. 오늘 처리할 일이 좀 남아서요.”
“그럼 가까운 데로 가죠.”
두 사람은 구청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했다. 현우는 다음 주 이사 일정을 다시 확인했고, 지은은 책상과 옷장에 넣을 짐만 먼저 옮기겠다고 했다. 특별한 날이니 좋은 곳에 가자는 말도 없었고, 지은에게는 오히려 그 편이 편했다.
식당을 나설 때 현우가 말했다.
“신고가 수리되면 알려드릴게요. 저도 확인할 테니까요.”
“네. 저도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들은 각자 돌아갔다. 지은은 지하철에 앉아 가방 안의 서류 봉투를 확인했다. 지금까지 여러 번 계약서를 읽고 양가 부모님까지 만났는데, 정작 혼인신고를 접수하는 데 걸린 시간은 십여 분 남짓이었다.
다음 날 오전, 지은은 신고가 정상적으로 수리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제 차현우는 서류상으로도 자신의 배우자였다. 계약서에서 정한 열 달의 기간도 이제 시작된 셈이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현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신고 처리 확인했어요. 이사할 때 필요한 건 미리 이야기해 주세요.]
지은은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처음 계약을 제안받았던 날에는 이런 메시지를 주고받게 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그때 휴대전화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형이랑 결혼한다는 얘기 들었어.]
발신자는 차민석이었다.
[그거 진짜야?]
지은은 두 줄의 메시지를 읽고 잠시 화면을 바라봤다. 민석에게는 이미 결혼을 취소하겠다는 뜻을 전했고, 둘 사이에 남은 문제도 정리됐다. 이번 일을 따로 설명할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사실을 감출 이유도 없었다.
지은은 답장을 입력했다.
[어. 이미 혼인신고도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