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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생활 공간

완벽한 파혼을 위하여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15. 생활 공간

메시지를 보낸 뒤 지은은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기까지 십 분쯤 남아 있었다. 오전에 검토하던 기획안을 다시 열어 수정할 부분을 표시하는데 화면 위쪽에 알림이 떴다.

[형이랑 언제부터 만난 거야?]

지은은 잠시 손을 멈췄다. 민석이 궁금해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현우와 결혼한 이유까지 그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당신이랑 파혼한 뒤야. 그전에는 그런 사이 아니었어.]

답장은 곧바로 오지 않았다. 지은도 대화창을 닫고 업무로 돌아갔다. 두 사람 사이에 끝내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면 파혼한 이유에 관한 것이겠지만, 그마저도 이미 충분히 이야기했다. 이제 민석에게 자신의 선택을 이해시키는 일까지 맡고 싶지는 않았다.

*  *  *

혼인신고가 수리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지은의 계좌에 2억 원이 입금됐다. 현우와 약정했던 첫 지급금이었다.

지은은 은행 앱에 표시된 금액을 확인한 뒤 계약서에 기재된 지급 조건과 날짜를 대조했다. 입금 내역을 내려받아 별도로 보관하고, 미리 상담을 받았던 세무 전문가에게도 필요한 자료를 전달했다. 거기까지 마치고 나니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돌아온 때보다 시간이 더 지나 있었다.

처음 현우에게 10억 원을 요구할 때도 막연한 숫자를 부른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는 계약이 성사될지조차 알 수 없었고, 지금은 정확히 그 조건대로 돈이 들어와 있었다. 지은은 휴대전화 화면을 몇 번 더 확인하다가 앱을 닫았다.

저축만 해서는 쉽게 모으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앞으로의 선택지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당장 태경라이프를 그만두거나, 정혜진에게 함께 일하자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혜진의 에이전시에서 일한다면 어떤 일을 맡을 수 있는지, 자신이 그곳에서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는 돈이 생겼다는 사실과 별개였다.

그날 저녁에는 정혜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혜진은 맡고 있는 브랜드 리뉴얼 제안서 때문에 아직 사무실이라고 했다. 처음 의뢰받은 방향과 며칠 전 고객사가 요구한 방향이 달라져, 어느 쪽을 기준으로 견적을 내야 할지 애매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냥 다 맞춰준다고 하면 일이 두 배가 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처음부터 못 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수정 범위부터 구분해서 보내세요. 처음 합의한 내용이랑 새로 요청한 내용을 따로 적어야 나중에 추가 비용 얘기도 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보내면 계약이 날아갈 수도 있지.”

“그건 그쪽이 결정할 일이죠. 언니가 얼마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는 먼저 정해야 하고요.”

혜진은 웃으며 그럴듯한 말은 누구나 한다고 투덜거렸다. 지은도 웃었다. 회사에 소속돼 일하는 것과 자신의 이름으로 계약을 따내는 일이 얼마나 다른지는 혜진과 이야기할 때마다 실감했다. 당장 그 길을 선택할 자신이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통화를 마친 지은은 평소처럼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자료를 정리했다. 계약에 따라 보수를 받기 시작했어도 월요일 오전 회의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금요일에는 지혜가 원룸으로 찾아왔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벽 옆에 쌓아둔 상자들을 보고 한마디 했다.

“이사 간다는 사람 짐이 왜 이렇게 없어?”

“큰 가구는 여기 둘 거야. 필요한 것만 먼저 가져가려고.”

“냉장고도?”

“응. 거기에도 있으니까.”

지혜는 겉옷을 벗고 소매를 걷었다. 지은이 옷장 앞에서 가져갈 옷을 골라 내는 동안 지혜는 책장에 꽂힌 책을 하나씩 꺼냈다. 오래전에 두 자매가 함께 사서 읽었던 책 한 권을 발견하고는 자기 것 아니냐며 가져가겠다고 했다.

“언니가 사놓고 나한테 읽으라고 했던 거잖아. 결국 안 가져갔으면서.”

“그럼 내 거 맞네.”

“아직 안 읽었으면 이번에도 안 읽을 것 같은데.”

“그건 내가 결정할게.”

지혜는 책을 가방 옆에 놓았다. 지은은 웃으며 테이프를 끊었다. 부모님과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언니 역시 결혼을 달가워하지 않을 텐데, 짐을 싸는 동안만큼은 평소처럼 굴고 있었다.

옷을 정리하던 지혜가 물었다.

“그런데 이 집은 어떻게 할 거야? 계약 아직 남았지?”

“응. 일단 유지하려고. 나중에 만료될 때 다시 결정할 거야.”

“월세 아깝지 않아?”

“아깝긴 하지. 그래도 당장 다 정리하고 싶진 않아.”

지혜는 비어 있는 상자를 접어 옆으로 밀었다.

“나중에 또 이사할 수도 있다는 거네.”

“그럴 수도 있지.”

“이사 두 번 하는 게 쉬운 줄 알아?”

“쉬운 줄 모르니까 짐을 덜 가져가는 거야.”

지혜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상자에 적힌 '서류'라는 글씨를 보고 중요한 문서는 직접 들고 가라고 했다. 어머니가 이삿날 아침부터 전화할 수도 있으니 미리 연락해 두라는 말도 덧붙였다.

“언니는 내일 안 와도 돼. 일정 있다며.”

“응. 오후에 약속 있어. 아침에 잠깐 들를까 했는데 사람 불렀으면 됐지 뭐.”

“오늘 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지혜는 마지막 상자에 테이프를 붙이고 가방을 챙겼다. 신발을 신다가 지은을 돌아봤다.

“거기서 불편한 일 생기면 참지 말고 얘기해. 엄마한테 말하기 어려우면 나한테 하고.”

“알았어.”

지은은 언니가 가져가기로 한 책을 건네줬다. 지혜는 제목을 한번 보고는 이번엔 꼭 읽겠다고 했다.

*  *  *

토요일 오전, 작은 화물차 한 대가 현우의 집 앞에 도착했다. 지은이 가져온 짐은 책상과 의자를 제외하면 상자 몇 개와 여행용 가방 두 개가 전부였다. 운송 업체 직원이 수량을 확인하는 동안 현우가 내려와 엘리베이터와 출입 절차를 안내했다.

책상을 들이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방에 원래 놓여 있던 협탁은 미리 치워져 있었고, 지은이 부탁했던 잠금장치도 교체돼 있었다. 현우는 작업이 끝난 뒤 작은 열쇠 두 개를 건네줬다.

“전에 말씀하신 거요. 하나는 여분으로 가지고 계시면 돼요.”

“네. 고맙습니다.”

지은은 열쇠를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책상을 창가에 놓은 뒤에는 의자가 걸리지 않는지 확인했다. 익숙한 가구가 들어오니 방의 모습이 전과 달라 보였다. 침대 옆에 책상 하나가 놓였을 뿐인데도 누군가 실제로 사용할 공간이 됐다.

운송이 끝나고 직원들이 돌아가자 현우는 오후에 잠깐 나갈 일이 있다고 했다.

“혼자 정리하셔도 괜찮겠어요? 무거운 건 지금 옮겨드릴 수 있는데.”

“괜찮아요. 큰 건 다 자리를 잡았어요.”

“저녁 전에 들어올 것 같아요.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 주세요.”

“네. 다녀오세요.”

현우가 나간 뒤 지은은 상자를 하나씩 열었다. 계절에 맞는 옷부터 옷장에 넣고 세면도구를 욕실로 옮겼다. 책상 서랍에는 개인 문서와 필기구를 정리했다. 가장 마지막에 연 상자에는 오래 쓰던 머그잔과 작은 탁상시계,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원룸에서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눈을 감고도 찾을 수 있었다. 이 집에서는 물건 하나를 놓으려 해도 먼저 자리를 생각해야 했다. 지은은 책상 위에 시계를 올렸다가 창가로 옮겼다. 머그잔은 주방에 가져갈까 하다가 당장은 방에 두기로 했다.

상자를 다 비운 뒤에도 옷장 한쪽과 책장 대부분은 비어 있었다. 아직 원룸에 남아 있는 물건이 더 많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은은 빈 공간을 억지로 채우지 않고 접은 상자를 한쪽에 모아뒀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잠깐 쉬는 동안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이사는 잘했는지, 현우는 집에 있는지, 식사는 챙겨 먹었는지 물었다. 지은은 운송도 끝났고 별문제 없이 정리하고 있다고 답했다. 어머니는 다음에 집에 한번 들르라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지은은 거실로 나왔다. 낮에 혼자 있는 이 집은 방문했을 때와는 달랐다. 손님처럼 어느 소파에 앉아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물을 마시기 위해 현우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고 찬장을 열어 컵을 찾는 동작에는 약간의 망설임이 따라왔다. 몇 번 더 쓰다 보면 익숙해질 일이었다.

오후에는 노트북을 켰다. 월요일 회의 전에 검토할 자료가 남아 있었다. 최근 브랜드전략팀에서 진행하는 작업은 광고 문구만 수정해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실제 서비스를 이용한 고객들이 어디에서 불편함을 느끼는지 살펴봐야 했고, 그 결과를 고객에게 어떤 말로 전달할지도 함께 정리해야 했다.

지은은 회의 자료의 일부 표현을 수정하고, 근거를 더 확인해야 할 항목에는 표시를 남겼다. 한 시간쯤 지나 노트북을 덮었을 때는 창밖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  *  *

현우는 일곱 시가 조금 넘어 돌아왔다. 지은은 방에서 세탁한 옷을 정리하다가 현관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왔다.

“오셨어요?”

“네. 짐은 다 풀었어요?”

“대충요. 나머지는 천천히 해도 될 것 같아요.”

현우는 거실에 놓인 접은 상자들을 보고 잠깐 멈췄다가 어디 두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지은이 재활용품 배출 장소를 확인하려 했다고 하자, 관리실에서 안내받은 시간을 알려줬다.

“저녁은 드셨어요?”

“아직요. 조금 있다가 먹으려고요.”

“저는 밖에서 먹고 왔어요. 주방은 편하게 쓰세요.”

지은은 자신이 챙겨 온 간단한 식재료로 저녁을 준비했다. 현우는 서재로 들어갔다가 물을 마시러 나왔고, 식탁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는 지은을 발견했다.

“식사하면서 일하세요?”

“아뇨. 자료만 잠깐 확인하려고요.”

지은은 노트북 화면을 닫아 한쪽으로 밀었다. 현우는 물을 따른 뒤 주방 맞은편에 서서 말했다.

“이사한 날까지 일하시네요.”

“월요일에 회의가 있어서요. 오늘 조금 봐두는 편이 나아요.”

“급한 건가요?”

“급하다기보다는, 다른 팀하고 의견을 맞춰야 할 부분이 있어서요. 제가 확인을 안 하고 넘기면 회의에서 같은 얘기를 다시 하게 되거든요.”

현우는 식탁에 놓인 닫힌 노트북을 봤다.

“자료를 미리 돌리면 되는 일은 아니에요?”

“돌렸어요. 다들 읽고 오면 좋겠는데, 막상 회의하면 처음 보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잖아요.”

현우가 웃었다.

“그건 어느 회사나 비슷하군요.”

“대표님은 회의에 들어오는 분들이 자료를 안 읽으셨으면 바로 아실 수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요.”

“저도 모르는 척할 때가 있어요.”

“왜요?”

“읽었는지 확인하는 데 시간을 쓰는 것보다 회의를 끝내는 게 나을 때도 있거든요.”

지은은 그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자신이 준비한 자료가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채 결정만 내려지는 상황은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실무자가 확인할 걸 남겨두면 결국 다음 회의에 또 올라옵니다.”

“맞아요. 그건 잘못 정리한 회의죠.”

현우는 더 묻지 않았다. 자신이 맡은 일을 대신 판단하려 들지 않는 점은 다행이었다. 지은 역시 그룹 대표이사에게 회사 내부의 구체적인 업무 상황까지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다 드시고 접시는 식기세척기에 넣으시면 돼요. 쓰기 불편하면 그냥 싱크대에 둬도 되고요.”

“알겠습니다.”

현우는 물잔을 들고 서재로 돌아갔다. 지은은 식사를 마친 뒤 노트북을 자신의 방으로 옮겼다. 주방에 남아 있던 자신의 머그잔도 가져왔다. 같은 집에서 각자 저녁을 보내는 일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  *  *

밤 열한 시가 가까워졌을 때 지은은 남은 상자를 정리하다가 잠깐 물을 마시러 나왔다. 복도 끝 서재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거실 쪽에선 현우가 휴대전화로 일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이제 들어가려고요. 지은 씨는 정리 끝났어요?”

낯선 호칭에 지은은 잠깐 멈췄다가 대답했다.

“네. 오늘은 이 정도면 될 것 같아요.”

현우는 평소 회사에서처럼 직급을 붙이지 않았다. 특별히 호칭을 바꾸자는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집에서까지 윤 대리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다고 지은은 생각했다.

“내일 저녁에는 본가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가족 모임이 있으세요?”

“네. 아버지가 식사하자고 하셔서요.”

지은은 자신도 참석해야 할 자리인지 생각했다. 현우가 그보다 먼저 말했다.

“이번에는 저만 오라고 하셨어요. 민석이도 온다고 하고요.”

민석의 이름을 듣자 지은은 며칠 전 받은 메시지를 떠올렸다.

“민석 씨한테 연락이 왔었습니다. 결혼한 게 사실이냐고 물어서 혼인신고까지 했다고 답했어요.”

“그랬군요.”

“형이랑 언제부터 만났느냐고도 물었고요. 파혼한 뒤라고만 했습니다.”

현우는 잠시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말씀하신 게 맞죠.”

“혹시 내일 그 이야기가 나오면 미리 알고 계시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저한테 할 말이 있으면 직접 하겠죠.”

지은은 더 보탤 말이 없었다. 민석과 자신의 관계는 이미 끝났지만, 현우와 민석은 앞으로도 같은 집안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것까지 지은이 대신 정리할 수는 없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

“네. 푹 쉬세요.”

지은은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갔다. 옷장 안에는 오늘 옮겨 온 옷들이 걸려 있었고, 책상 위에는 월요일 회의 자료가 펼쳐져 있었다. 침구는 낯설었지만 시계와 책, 노트북은 원래 쓰던 물건들이었다.

불을 끄자 복도 너머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도 자기 방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지은은 알람을 맞추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내일 현우가 가족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든, 자신에게는 월요일 아침까지 마무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