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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같은 식탁

완벽한 파혼을 위하여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16. 같은 식탁

일요일 오후, 민석은 금요일에 전달받은 공동 투자안의 수정본을 다시 열었다. 상대 회사가 제시한 가동률을 그대로 적용하면 손익분기 시점이 앞당겨졌지만, 아직 입주가 확정되지 않은 시설까지 첫해부터 가득 찬 것으로 계산한 수치였다.

민석은 담당 팀장에게 계약이 확정된 물량과 협의 중인 물량을 구분해 달라고 메일을 보냈다. 투자에는 긍정적이었지만, 그대로 자금을 집행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에게 전화가 온 것은 그때였다.

—저녁 약속 잊은 건 아니지?

“알아요. 일곱 시잖아요.”

—적어도 여섯 시 반까지 와. 아버지께서 사업 얘기도 하실 것 같으니까.

“아직 수정 중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그 말부터 꺼내지 말고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설명해. 네 아버지는 결과를 먼저 보시는 분이야.

민석은 통화를 끝내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나이를 서른셋이나 먹었는데, 아버지 앞에서 어떤 말을 어느 순서로 꺼내야 하는지도 일일이 알려주고 있는 어머니라니. 웃어야 하는 상황인 건가.

휴대전화 화면에는 지은과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형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지은은 혼인신고까지 했다고 답했다. 언제부터 만났느냐는 질문에는 파혼한 뒤라는 말만 돌아왔다.

더 보낼 말은 찾지 못했다. 이미 결혼한 두 사람에게 무엇을 따질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새에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도.

*  *  *

본가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서재에 있었다. 차현우도 아직 오지 않았다. 오미경은 거실에서 민석이 가져온 서류 봉투를 보더니 일이 많으냐고 물었다.

“내일 보고할 거예요. 수치 좀 다시 확인하고요.”

“아버지는 기다리는 걸 싫어하시잖니. 너무 늦어지지 않게 해.”

“일정은 안 밀려요.”

“그럼 됐네.”

어머니는 찻잔을 내밀었다가, 민석이 받기도 전에 말을 바꿨다.

“지은이한테 연락했다며.”

“네.”

“뭐라고 하던?”

“형하고 결혼한 게 맞대요.”

“그것만 물었어?”

“언제부터 만났느냐고도요. 파혼한 뒤라고 하더라고요.”

오미경은 짧게 혀를 찼다.

“그렇게 말하겠지. 이제 와서 다른 말을 할 리가 없잖아.”

민석은 찻잔을 내려다봤다. 자신도 처음에는 같은 생각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입에서 들으니 조금 다르게 들렸다.

“그전에 만났다는 증거라도 있어요?”

“그런 뜻이 아니야. 사람들 입에 어떻게 오르내리겠냐는 거지.”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네가 알아서 하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잖니.”

오미경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민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이 맞아도 어머니가 지은과의 관계를 계속 따질 일은 아니었다.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오미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우가 들어왔고, 민석도 형에게 인사했다. 형은 평소처럼 안부를 묻고 외투를 벗었다. 형을 마주하자 민석은 준비한 질문을 꺼내지 못했다.

식사 시간이 되어 네 사람은 식탁에 앉았다.

“공동 투자안은 언제 올라오나?”

차정식의 첫 질문은 예상대로 업무에 관한 것이었다.

“내일 수정본을 보고드리겠습니다. 상대 회사에서 제시한 수익 전망을 일부 조정하고 있어요.”

“지난번엔 일정대로 진행된다며?”

“일정은 그대로입니다. 다만 아직 계약되지 않은 수요까지 확정 물량으로 잡혀 있어서요.”

“상대가 그 정도는 확보할 수 있다고 했잖아.”

“할 수 있다는 것과 계약했다는 건 다르니까요. 두 번째 자금 집행 조건을 나눠서 검토하려고 합니다.”

현우가 물었다.

“첫 집행은 계획대로 가고, 추가 집행 때 실제 계약 물량을 확인하겠다는 건가요?”

“네. 그렇게 하면 일정도 크게 늦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럼 검토할 만하겠네요.”

차정식은 두 아들을 번갈아 봤다.

“그쪽하고 쌓아온 관계도 생각해야 해. 너무 깐깐하게 굴다가 다른 데서 자금 끌어오면 우리만 손해야.”

“그런 부분까지 고려해서 정리하겠습니다.”

민석이 대답했지만 오미경이 덧붙였다.

“민석이가 주말에도 이 자료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내일까지는 다 끝낼 거예요.”

“그건 민석이한테 듣고 있잖아.”

차정식의 말에 오미경이 입을 다물었다. 민석은 식사할 때마다 이런 순간이 불편했다. 어머니가 대신 나서면 아버지는 자신을 어린애처럼 대했다. 말리면 어머니가 서운해했다.

사업 이야기와 다음 주 일정이 오가는 동안 지은의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민석은 형과 지은이 결혼한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맞은편에 앉은 현우를 볼 때마다 마지막 메시지가 떠올랐다.

*  *  *

“혼인신고는 했다고 들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차정식이 현우에게 말했다.

“네. 마쳤습니다.”

“그쪽 집안에는?”

“직접 연락드렸습니다. 결혼 사실을 말씀드렸고, 기존 사업 관계는 별개라고 설명했습니다.”

“상대도 그렇게 생각하면 좋겠지. 하지만 말 한마디로 정리될 문제는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차정식은 물잔을 들었다.

“이제 되돌릴 일도 아니겠지. 그렇다고 네가 선택했다고 해서 뒤처리까지 저절로 되는 건 아니야.”

현우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민석은 어쩐지 그 태도가 더 거슬렸다. 형의 혼담이 무산된 일과 집안의 사업 관계는 길게 논의하면서, 그 상대가 자신의 전 약혼녀라는 사실은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때 차정식이 오미경에게 물었다.

“윤 대리하고 작성하려던 합의서, 확인해 봤어. 그 조항은 왜 넣었어?”

오미경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지나간 일이에요. 서명도 안 했잖아요.”

“서명을 안 했다고 해서 문서가 없던 일이 되나?”

민석은 어머니를 봤다.

“무슨 합의서요?”

“네 파혼 문제를 정리하려고 준비했던 거야. 양쪽이 더는 문제 삼지 말자는 취지였어.”

“지은이한테요?”

“그래. 그때는 결혼 준비도 다 돼 있었잖니.”

“왜 저한테는 말 안 했어요?”

“네가 알면 뭐가 달라졌겠니. 당장 네 앞가림도 못하던 때였는데.”

평소라면 민석은 그런 말에 대꾸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는 차정식이 먼저 입을 열었다.

“파혼이 윤 대리 책임이라는 조항까지 들어 있더군. 그건 사실과 다르지 않아?”

민석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라고요?”

“그쪽이 파혼에 책임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문구가 있었어. 그걸 조건으로 돈도 제안했고.”

“돈이요?”

“보상은 해야 하니까.” 오미경이 말했다. “그쪽도 결혼 준비에 쓴 시간과 비용이 있었을 거 아니니.”

“얼마요?”

“금액까지 네가 알아서 뭐 하려고?”

“얼마를 줬냐고요.”

“안 받았어. 처음엔 3억, 나중에는 5억까지 제안했는데 지은이가 거절했어.”

민석은 잠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혼식장을 예약하고 양가에 인사를 드리던 때, 지은이 얼마나 많은 일을 직접 챙겼는지 기억났다. 파혼하던 날에도 자신을 붙잡기보다 준비해 둔 물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부터 물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지은에게 어머니가 돈을 내밀고, 파혼이 지은의 책임이라고 쓰인 문서에 서명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엄마, 정말 그렇게 써 있었어요?”

“표현 하나만 떼어놓고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밖에 나가서 서로 다른 이야기 하지 말자는 뜻이었어.”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제가 바람피워서 헤어진 건데.”

오미경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걸 누가 모르니?”

“아는데 왜 지은이 잘못이라고 써요?”

“민석아.” 차정식이 불렀다. “목소리 낮춰.”

민석은 아버지를 돌아봤다. 차정식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엄마가 잘못한 걸 말하고 있는데 왜 저만 조용히 하라는 거예요?”

“지금 큰소리 낸 사람이 너니까. 그 문서가 잘못됐다는 얘기는 나도 하고 있잖아.”

오미경이 민석을 향했다.

“네가 그때 일을 제대로 정리했으면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어. 너는 지은이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 그 애가 마음먹고 밖에 이야기하면 우리 집안에 무슨 소문이 돌겠니?”

“지은이가 그런다고 했어요?”

“꼭 그러겠다고 해야 대비하니?”

“그럼 안 한 일까지 지은이가 인정하게 만들면 되는 거예요?”

민석은 식탁에 손을 짚었다. 의자가 뒤로 밀렸다.

“제가 바람피웠어요. 제가 결혼 깨지게 한 거고요. 그런데 왜 지은이가 돈 받고 자기 잘못이라고 해야 하냐고요.”

마지막 말은 예상보다 크게 나왔다. 식탁 끝에서 물잔이 작게 흔들렸다.

오미경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이제 와서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소리를 해? 그때는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수습할 생각도 없었으면서.”

그 말이 더 아팠다. 민석도 일이 적당히 정리되기를 바랐다. 어머니가 나서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세히 묻지 않았고, 지은에게 직접 확인하는 일도 피했다.

“그래서 엄마가 대신 거짓말해도 되는 거예요?”

“네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줄은 아는 모양이네. 그럼 이제 와서 지은이한테 미안하다고 하면 끝나니?”

“끝난다고 한 적 없어요!”

민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앉아서 같은 말을 반복할 수 없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내가 욕을 먹어야죠. 지은이가 왜 그런 서류에 서명해야 하는데요? 엄마가 그걸 대신 처리했다고 생각하는 게 더 싫다고요.”

차정식이 낮게 말했다.

“앉아. 네가 화낼 일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일이야.”

민석은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이 얘기를 듣고도 그것부터 생각하세요?”

“그럼 뭘 어떻게 하라는 거냐. 이미 혼인신고까지 끝났고, 합의서는 서명도 안 됐어. 문제가 될 만한 문서는 앞으로 쓰지 못하게 하면 되는 거지.”

“저한테는 끝난 일이 아니에요.”

민석은 자신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지은과의 관계는 이미 끝났다. 형과의 결혼도 이미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은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아니, 물어봤더라도 무슨 대답을 했을지 자신이 없었다.

차정식은 민석을 잠시 바라봤다.

“그럼 네가 처음부터 제대로 했어야지. 오늘 와서 목소리 높인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민석은 더 말하지 못했다.

현우는 그동안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민석은 형이 지은에게 이미 합의서 이야기를 들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지은과 오래 사귄 사람은 자신인데, 이제는 형이 더 많은 일을 알고 있었다.

현우가 차정식에게 말했다.

“지은 씨한테 이 일로 다시 연락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서명하지 않았고 돈도 받지 않았으니까요.”

“나도 알아. 문서가 어떻게 작성됐는지 확인한 것뿐이야.”

차정식은 오미경에게 서류 사본을 보관하겠다고 말하며 식사를 끝냈다. 오미경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민석도 식탁에서 물러났다.

*  *  *

현우가 돌아갈 준비를 할 때 민석은 현관으로 따라 나갔다.

“형, 잠깐만.”

현우는 신발을 신다가 돌아봤다.

“아까 일 때문이야?”

“그것도 그렇고.”

민석은 잠시 말을 골랐다.

“형은 지은이랑 결혼하면서 나한테 먼저 말할 생각은 안 했어?”

“네가 불편해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

“불편한 정도가 아니잖아. 내가 무슨 얘길 들었는지 형도 알면서.”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아무 말도 안 하고 혼인신고까지 해? 나만 나중에 알면 되는 일이었어?”

현우는 민석의 말을 끝까지 듣고 대답했다.

“너한테 허락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어.”

“허락받으라는 말 아니잖아!”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민석은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오늘 저녁 내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은 항상 그런 식이야. 내가 말하는 게 뭔지 알면서도 딱 잘라서 아니라고 하잖아.”

“네가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내가 맞힐 수는 없지.”

“적어도 나한테 직접 말해줄 수는 있었잖아. 지은이랑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잖아.”

“알아. 그런데 그 일이 지은 씨가 앞으로 누구와 결혼할지 결정할 이유는 아니야.”

민석은 대꾸하지 못했다. 형이 자신을 일부러 몰아세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게 더 화가 났다. 형은 이미 결혼을 마친 사람처럼 말했고, 자신만 아직 끝난 일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형은 지은이한테 어떤 말을 했길래 결혼까지 하게 된 거야?”

“그건 지은 씨하고 내가 이야기한 일이야.”

“내가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야?”

“왜 그걸 네가 알아야 하는데?”

민석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지은에게 문자를 보낸 이유도 같았다. 형이 왜 하필 지은을 선택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답을 들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까 그 합의서, 나는 몰랐어.”

“응.”

“지은이한테 그렇게 말해줘.”

현우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 민석을 봤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이면 직접 해야지.”

“그걸 내가 어떻게 해.”

“그건 네가 판단해.”

현우는 먼저 가보겠다며 문을 열었다. 민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실로 돌아오자 오미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우하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했니?”

“별거 아니에요.”

“지은이 때문에 또 감정 상할 일 만들지 마. 너만 힘들어져.”

민석은 외투를 집었다.

“엄마도 그 합의서 얘기는 더 하지 마세요.”

“그만하라니까 자꾸 네가 꺼내잖니.”

“애초에 그런 걸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누구 때문에 그랬는데?”

민석은 돌아봤다. 어머니는 여전히 자신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얼굴이었다.

“저 때문이라는 말, 저도 알아요. 그런데 엄마가 그렇게까지 해 달라고 한 적 없어요.”

“그럼 그때 네가 직접 해결했어야지.”

“맞아요. 그랬어야 했어요.”

민석은 더 대답하지 않고 집을 나왔다.

차에 올라 한참 뒤에야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담당 팀장이 수정된 투자안을 보내왔다. 예상 수요 가운데 계약되지 않은 부분은 별도로 표시돼 있었다. 민석은 내일 아침 그 자료로 다시 이야기하자고 답장을 보냈다.

지은의 대화창도 알림 없이 그대로였다. 민석은 화면을 열었다가 닫았다. 합의서를 몰랐다고 말한들 지은이 무슨 대답을 할까. 그 질문에는 답할 말이 없었다.

민석은 휴대전화를 옆자리에 내려놓고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곧 알 수 없는 초조함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