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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위치

완벽한 파혼을 위하여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17. 위치

월요일 아침, 지은은 평소보다 십 분 일찍 태경라이프 사무실에 도착했다. 현우의 집에서 출근하는 건 처음이었다. 지하철을 한 번 덜 갈아타는 대신 역에서 회사까지 조금 더 걸어야 했다. 익숙해지려면 며칠은 걸릴 것 같았다.

열 시 회의를 앞두고 메일함부터 열었다. 금요일에 전달받은 신규 고객 안내 페이지의 최종 시안에는 그사이 의견이 몇 개 더 달려 있었다. 그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본부장님 보고 완료. 큰 방향 변경 없이 진행 바랍니다.]

강유나 과장이 남긴 메모였다.

지은은 시안을 다시 열었다. 첫 화면에는 ‘3분이면 가입 준비 끝’이라는 문구가 있었고, 상담 신청 버튼을 누른 뒤에는 ‘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라는 안내가 나타났다. 실제로는 상담 접수가 끝나는 것뿐이었다. 고객의 상황에 따라 추가 확인이 필요했고, 가입 여부는 그다음에 결정됐다.

회의실에 들어갔을 때 유나는 제작사가 보내온 일정표를 팀장 앞에 펼쳐 놓고 있었다. 팀장은 화면을 한 번 훑더니 말했다.

“본부장님도 간결해져서 좋다고 하셨대요. 이 안으로 가고 세부 문구만 정리합시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문제를 꺼내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래도 최종안으로 넘기기 전에 확인해야 했다.

“팀장님, 첫 화면 문구하고 신청 완료 안내를 한 번 더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유나가 고개를 들었다.

“어떤 부분이요?”

“광고에서는 가입 준비가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데, 버튼을 누른 뒤 끝나는 건 상담 접수잖아요. 완료 화면까지 이어서 보면 고객이 가입됐다고 받아들일 여지가 있어요.”

“가입 준비라고 했지 가입 완료라고 하진 않았어요.” 유나가 말했다. “그 정도는 표현의 문제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다만 기존 화면에서도 가입 여부를 묻는 문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팀장이 지은을 봤다.

“있었다고 들었다는 건 누가 확인해 준 겁니까?”

“지난달 고객 문의 집계에 관련 항목이 있었습니다. 정확한 내용은 오늘 고객경험팀에 확인해 보겠습니다.”

“확인도 안 된 상태에서 수정부터 이야기하면 곤란하죠.”

말은 차분했지만 회의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유나는 잠깐 지은을 보더니 일정표를 팀장 쪽으로 밀었다.

“본부장님께 이미 최종 방향 보고드렸습니다. 지금 제작사에 되돌리면 제가 일정 다시 잡아야 해요. 수정 사유도 설명해야 하고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확인하자는 겁니다.”

“그럼 오늘 안으로 근거하고 대안을 같이 가져오세요.” 팀장이 말했다. “문제가 있으면 고쳐야죠. 그렇지만 무엇을 바꾸자는 건지도 정하지 않고 위에 다시 올릴 순 없어요.”

회의가 끝나자 유나가 지은을 불렀다.

“윤 대리. 문제 있다고 생각한 게 언제예요?”

“금요일에 시안 받고 나서요. 주말에 화면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럼 적어도 저한테는 먼저 이야기해 주지. 팀장님 앞에서 처음 들으면 제가 아무것도 확인 안 한 사람이 되잖아요.”

지은도 그 말은 이해했다. 유나가 제작사와 일정을 조정하면서 책임져야 할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난 금요일에는 최종 시안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수정할 부분이 남아 있었다.

“금요일에 받은 안이고, 오늘 회의에서 검토할 줄 알았어요. 이미 보고가 올라간 줄은 몰랐습니다.”

“금요일 오후에 보고됐어요. 나도 그 뒤에 메모 달았고요.”

“그건 오늘 아침에 봤어요.”

유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럼 우리 둘 다 전달이 늦었던 거네요. 어쨌든 목요일 지나면 추가 비용 나가요. 그 안에 끝내야 해요.”

“네. 오늘 확인해서 먼저 공유할게요.”

유나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지은은 회의 자료를 들고 앉았다. 자신이 걱정하는 부분을 이야기한 건 잘못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를 제기하는 시점과 방식도 업무의 일부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점심을 먹고 돌아온 지은은 고객경험팀에 연락했다. 자료를 요청하면서 왜 필요한지 설명하자 담당자는 지난달 익명화된 문의 유형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지은은 현재 서비스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접수가 끝나면 ‘신청 완료’라는 문구가 뜨고, 담당자의 연락을 기다려 달라는 안내는 그 아래 접힌 영역에 들어 있었다.

세 시가 넘어 도착한 자료에는 신청 후 가입 여부를 확인하는 문의가 여러 건 있었다. 그렇다고 새 광고 문구 때문에 발생한 문의는 아니었다. 아직 공개되지도 않은 시안이었다. 지은은 그 점을 분명하게 구분해 기록했다. 기존 화면에서도 혼동이 생기는 상황에서 새로운 문구가 오해를 더 키울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팀장에게 전달하기 전 유나에게 먼저 자료를 보여줬다. 유나는 내용을 읽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건 그냥 지나가기는 어렵겠네요.”

“네. 그렇다고 공통 완료 화면을 이번에 다 고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건 다른 상품에도 걸려 있어요. 운영팀이 쉽게 승인 안 해줄 거예요.”

“그럼 광고 문구에서 ‘가입’을 빼고 ‘상담 신청’이라고 명확하게 쓰는 건 어떨까요? 완료 화면 문제는 따로 남겨두고요.”

“본부장님이 마음에 들어 하신 게 그 문구인데.”

지은은 유나의 말을 이해했다. 수정해야 하는 건 글자 몇 개였지만, 그 글자를 좋아한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수정안의 근거만큼이나 누가 다시 설명할 것인지가 문제가 됐다.

“그럼 제가 근거를 정리할게요. 제작사 변경 범위는 과장님하고 확인하고요.”

“좋아요. 대신 나중에 일정 늦어졌다고 제 쪽으로만 오지 않게 같이 보고해요.”

지은은 동의했다. 업무를 나누어 맡았으니 수정에 따른 부담도 나누는 것이 맞았다.

디지털운영팀에서는 완료 화면이 공통으로 사용되고 있어 즉시 변경은 어렵다는 답이 왔다. 대신 이번 안내 페이지에 상담 접수 단계임을 표시하는 문구를 별도로 넣는 방법은 가능하다고 했다. 지은은 그 답변까지 묶어 팀장에게 전달했다.

팀장은 자료를 읽고 유나를 불렀다.

“이 정도면 전면 수정은 아니네요. 그런데 윗선에는 뭐라고 설명해야 합니까?”

유나가 먼저 말했다.

“고객 문의를 확인해 보니 가입 완료로 오해할 소지가 있어 문구를 구체화한다고 하죠. 일정도 유지할 수 있는 범위로 잡았습니다.”

“그럼 윤 대리가 다음 회의에서 근거를 직접 설명하세요. 과장님은 제작사 일정 책임지고요. 둘 중 하나라도 틀어지면 다시 조정해야 합니다.”

지은은 알겠다고 답했다. 팀장이 곧바로 수정안을 승인한 것은 아니었다. 본부장에게 변경 이유를 전달한 뒤 최종 결정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회의실을 나오자 유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엔 미리 얘기해 줘요. 나도 팀장님한테 깨지는 건 싫거든.”

“네. 대신 다음엔 보고 일정도 알려주세요.”

유나는 지은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건 내가 잘못했네.”

갈등은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수정 요청이 반영돼야 하는 일은 남아 있었다. 그래도 적어도 서로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지는 분명해졌다.

오후 늦게 지은은 인사 담당 부서에도 들렀다. 혼인신고 후 필요한 가족관계 변경 신고와 이해충돌 관련 절차를 문의했던 일의 후속이었다. 담당자는 현재 업무와 결재선을 검토하되, 그동안은 기존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라고 안내했다. 그룹 본사와 직접 이해관계가 생기는 신규 업무가 있으면 미리 확인해 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지은은 안내 내용을 적어 두었다. 결혼 사실을 알렸다는 이유로 당장 달라진 건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업무를 맡을 수 있을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  *  *

퇴근 후 정혜진을 만났을 때 지은은 평소보다 배가 고팠다. 혜진은 주문을 마친 뒤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오늘은 일 얘기 먼저 하면 안 돼. 나 진짜 하루 종일 전화만 받았어.”

“지난번에 말한 고객사요?”

“그러니까 일 얘기 하지 말라니까.”

지은이 웃자 혜진도 따라 웃었다. 둘은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까지 지난 주말 이야기를 했다. 지은은 이사하면서 가져간 짐보다 원룸에 남겨둔 짐이 더 많다고 했고, 혜진은 그 말을 듣더니 이사할 때마다 버릴 물건이 그렇게 많아지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결혼했는데도 원룸을 그대로 두는 거야?”

“계약이 남아 있으니까요. 일단은요.”

“월세 아깝겠다.”

“그렇긴 하죠.”

“그럼 지금 사는 데는 좀 어때? 사람 둘이 사는 집은 또 다르잖아.”

“아직은 제 방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요. 주말에 짐 풀고 나서 바로 출근했으니까요.”

“하긴. 넌 혼자 지낼 때도 바쁘다고 나한테 연락 잘 안 했지.”

“언니도 별로 안 하셨거든요.”

“내가 바쁜 건 네가 이해해야지. 대표님이잖아.”

혜진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지은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혜진은 예전부터 자신이 하는 일을 과장해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정작 일이 잘못됐을 때는 남에게 불평하는 시간보다 수습하는 데 시간을 더 쓰는 사람이기도 했다.

“근데 너 괜찮겠어?” 혜진이 물었다. “너 원래 남한테 생활 맞추는 거 안 좋아했잖아.”

“알아서 지내기로 했어요. 생각보다 부딪힐 일도 없고요.”

“그 말이 지금까지는 제일 신혼 같지 않다.”

“신혼이라고 꼭 붙어 다녀야 해요?”

“아니. 내가 괜한 소리 했다.”

혜진은 더 묻지 않았다. 지은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았다. 서로의 사정을 다 알아야만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식사가 반쯤 끝났을 때 혜진이 결국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나 아까 거래처에서 전화 왔는데, 처음엔 너무 화가 나더라.”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계약 범위 밖이라고 추가 견적 보냈더니 담당자가 그러는 거야. 다른 업체는 이 정도 그냥 해준다고.”

“그래서요?”

“그럼 그 업체랑 하시라고 할 뻔했지. 실제로는 못 했지만.”

혜진은 한숨 대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기존 계약 건은 원래 범위대로 진행하겠다고 했어. 추가 요청은 별도 비용을 받거나 다음 단계로 넘기자고. 담당자가 자기 상사랑 이야기해 본다더라.”

“결론은 아직 안 난 거네요.”

“응. 결국 기다려야지. 근데 그 기다리는 동안 직원 월급 날짜는 안 미뤄지거든.”

처음 사무실을 열었을 때 혜진은 책상 두 개를 놓고 혼자 거의 모든 일을 했다. 이제는 직원들의 일정과 월급, 다음 분기의 수주까지 생각해야 했다. 지은은 혜진이 부럽다고 느낄 때가 있었지만, 그 일을 대신 책임질 자신이 있는지는 별개였다.

“언니는 가끔 후회해요? 회사 나온 거.”

“당연하지. 월말마다.”

“진짜로요?”

“진짜로. 근데 다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또 그건 아니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많아진 만큼 내가 책임져야 할 것도 많아졌으니까.”

혜진은 지은의 접시에 남아 있던 고기를 하나 집어 갔다.

“너는 어때? 아직도 회사 나올 생각 있어?”

“있긴 한데요. 지금 맡은 일도 있고, 당장 나와서 뭘 할 수 있을지도 더 생각해 봐야죠.”

“잘 생각해. 내가 너 오라고 하면 무조건 좋은 조건 내밀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지은은 그 대답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혜진은 함께 일하자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전에 말씀하신 새 프로젝트는요?”

“아직 제안 준비 중. 계약되면 기획 쪽 사람 더 뽑아야 할 것 같아. 그때 네 생각도 물어볼게.”

“네. 구체적으로 정해지면 이야기해요.”

“대신 나도 면접은 볼 거다. 친하다고 봐주는 건 없어.”

“제가 더 까다롭게 굴지도 모르는데요.”

“그러니까 걱정이지.”

두 사람은 음식이 식기 전에 접시를 비웠다. 식당을 나온 뒤 혜진은 사무실에 잠깐 들러야 한다며 택시를 불렀다. 지은은 근처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면서 다음 주 약속을 잡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혜진은 일이 끝나면 연락하겠다고 답했다.

*  *  *

다음 날 오전, 지은의 메일함에 팀장이 보낸 메시지가 들어왔다. 본부장에게 수정 필요성을 보고했고, 고객 안내 문구는 검토한 방향으로 조정하라는 답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대신 다음 회의에서 관련 부서가 모두 참석한 가운데 변경 사유와 일정을 다시 확인하라고 했다.

지은은 메일을 읽고 유나에게 먼저 전달했다. 잠시 후 유나에게서 답장이 왔다.

[제작사 일정은 제가 조정할게요. 대신 변경 사유 설명은 윤 대리가 맡는 걸로요.]

[네. 고객 문의 자료랑 운영팀 회신 정리해서 가져가겠습니다.]

곧 팀장이 두 사람을 불렀다.

“이번에는 큰 문제 없이 넘어갔지만, 앞으로는 최종 보고 올라가기 전에 의견 맞춰서 주세요. 중간에 바뀌면 누가 설명해야 하는지도 복잡해지니까.”

유나가 먼저 알겠다고 답했다. 지은도 동의했다.

팀장은 지은에게 한 가지를 더 확인했다.

“윤 대리, 그럼 이번 수정안은 직접 설명할 수 있겠죠? 그냥 문제가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왜 지금 바꾸는 게 나은지까지요.”

“네. 준비하겠습니다.”

지은은 회의실에서 나와 자리에 앉았다. 화면에는 오후에 검토할 자료와 다음 주 일정이 나란히 떠 있었다. 고객 안내 문구를 바꾸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의 확인을 거쳤다. 누군가 이미 괜찮다고 한 것을 다시 고쳐야 한다는 말은, 글자를 고치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지은은 문의 자료와 수정된 시안을 한 화면에 나란히 띄웠다. 다음 회의에서 자신이 설명할 것은 누가 틀렸느냐가 아니라 왜 이 표현이 더 정확한지였다. 그렇다고 그 과정에서 생긴 부담까지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