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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파혼통보

완벽한 파혼을 위하여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2. 파혼통보

“네 달 전부터야.”

지은은 수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수진은 아직도 민석의 슈트 소매를 붙잡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제야 손가락이 천천히 풀렸다.

“수진아.”

지은은 수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내 드레스 골라주던 날…… 그날도 둘이 만났니?”

“지은아, 제발…… 내가 진짜 죽을죄를 짓긴 했는데, 처음에는 정말 아니었어. 그냥…… 업무 때문에 술자리가 길어졌고, 실장님이 너무 힘들어하셔서……”

수진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쥐어짜 냈다. 그러나 변명은 이어질수록 비참함만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지은은 수진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친구의 두 눈에는 배신에 대한 진심 어린 참회보다, 현장을 직접 들켰다는 충격과 두려움이 더 짙게 깔려 있었다.

민석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며 둘 사이에 개입했다.

“박 대리, 그만해.”

민석이 수진을 지은의 시선 너머로 살짝 밀쳐내듯 뒤로 보냈다. 그리고 지은에게 다가서며 차분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지은아. 수진이한테 뭐라 할 거 없어. 내가 먼저 선 넘은 거 맞아. 인정할게. 내가 미안하다.”

‘미안하다.’ 네 글자가 너무나 쉽게 그의 입에서 떨어졌다.

민석의 얼굴에는 분명 당황한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동시에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묘한 오만함이 깔려 있었다. 마치 회사에서 발생한 작은 업무 실수를 인정하고 수습하려는 상사의 태도와 다를 바 없었다.

“내가 요즘 신규 사업 문제로 홀딩스 쪽 눈치 보느라 정신적으로 몰려 있었어. 알잖아, 아버지께서 현우 형한테만 힘 실어주시고 나한테는 계속 실적 압박 주는 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었는데…… 마침 옆에 있던 수진이랑 술 한잔하다가 미쳤었나 봐. 딱 한 번 실수한 게 이렇게 길어졌어.”

“실수?”

지은은 헛웃음을 삼켰다.

“네 달이 실수야, 민석 씨? 결혼식 3주 남겨두고 호텔 지하 주차장에서 키스하는 게 단순한 스트레스 해소였어?”

“말을 꼭 그렇게 공격적으로 해야겠어?”

민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과하던 어조에 서서히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도 잘했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너도 돌아봐. 요즘 너 온통 결혼 준비에만 정신 팔려서 나한테 신경이나 썼어? 우리가 마지막으로 제대로 대화한 게 언제인지나 기억나? 내가 힘들다고 할 때 너는 하객 리스트 타령만 했어. 내가 너한테 외로움을 안 느꼈겠냐고.”

지은은 순간 자신이 들은 말을 의심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그가 바쁘다며 약속을 취소할 때마다 군소리 없이 혼자 예식장을 돌아다닌 것이 지은이었다. 그의 가문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조건들을 맞추느라 퇴근 후 밤마다 엑셀 파일을 정리했던 것도 지은이었다. 이 남자는 자신의 외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지은의 헌신을 ‘무관심’으로 왜곡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은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민석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너를 외롭게 만들어서, 내 제일 친한 친구랑 네 달 동안 바람을 피웠다?”

“그렇게 정리하자는 게 아니잖아!”

민석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내가 잘했다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어쨌든 내가 정리할게. 박 대리하고는 오늘부로 깔끔하게 끝낼 테니까, 너도 감정적으로 굴지 마.”

“뭐?”

“결혼식 3주 남았어, 지은아. 청첩장 이미 그룹 이사진이랑 외부 거래처에 다 돌렸고, 아버지도 그날 일정 비워두셨어.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난리를 치면 내 입지는 어떻게 되고 우리 집안 체면은 뭐가 되겠어? 내가 사과했잖아. 수진이 홍보팀에서 다른 부서로 발령 내든가 할 테니까, 너도 선 넘어가지 말고 당장 집에 가서 머리 좀 식혀.”

민석에게 외도는 사과하고 관계를 끊으면 무마될 수 있는 개인적인 치부였다. 그러나 ‘결혼’은 태경그룹 회장의 아들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가문의 체면이 걸린 중대한 비즈니스였다. 그에게 있어서 지은이 느낀 배신감이나 상처는 예정된 행사 절차를 뒤엎을 만큼 우선순위가 높지 않았다.

민석의 시선이 지은을 지나쳐 그 뒤에 서 있던 수진에게 닿았다.

“수진아, 먼저 가 있어. 여기 더 있어 봤자 상황만 복잡해지니까.”

“아…… 네, 실장님.”

수진은 지은의 눈치를 살금살금 살피며 기둥 뒤편에 주차된 자신의 차를 향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지은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민석은 지은의 마음을 달래거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수진이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어색해할까 봐 먼저 자리를 피해주고 있었다. 지은이 어떤 상처를 받든 상관없이,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사건을 봉합하는 것에만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민석 씨.”

“그래, 말해. 어차피 다 너한테 미안해서 그래. 나중에 내가 다 보상할 테니까……”

“파혼해요, 우리.”

지은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조용했지만 완벽하게 명확했다.

주차장의 공기가 찰나의 정적으로 굳어버렸다. 수진의 발걸음 소리마저 뚝 끊겼다. 민석은 자신이 들은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하니 지은을 바라보았다.

“……뭐?”

“결혼 취소하겠다고요. 아니, 안 해요. 당신 같은 사람이랑.”

민석의 얼굴에 황당함과 불쾌함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그는 허탈한 듯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지은아. 너 지금 너무 화가 나서 제정신이 아니야. 무슨 파혼 같은 소리를 그렇게 쉽게 해? 우리가 만난 세월이 5년이고, 당장 다음 달이 예식이야.”

“쉽게 말하는 거 아니에요.”

지은은 오른손을 올려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던 약혼반지를 잡았다. 심플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민석이 1년 전 프러포즈를 하며 끼워주었던 반지였다. 손가락 마디에 걸려 잘 빠지지 않았다. 1년 동안 손가락에 익숙하게 자리 잡고 있던 금속이었다.

지은은 잇새로 입술을 깨물며 반지를 비틀어 강제로 빼냈다. 약간의 통증과 함께 손가락에 벌겋게 자국이 남았다.

그녀는 빼낸 반지를 민석의 차 보닛 위에 탁, 소리가 나게 올려두었다.

“반지 가져가요. 그리고 양가 부모님께는 내가 직접 파혼하겠다고 연락드릴 테니까.”

“윤지은!”

민석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지은의 팔뚝을 강하게 낚아채 잡았다. 억센 악력에 지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너 미쳤어?! 부모님한테 말을 왜 해! 이거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나 정말 끝장나! 회장님이 날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서 그래?”

“그건 당신 문제죠.”

지은은 민석의 손을 향해 서늘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당신이 외도를 저지를 때, 내 기분 생각 안 했던 것처럼. 나도 당신 위치나 체면 따위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놓으세요.”

“지은아, 제발 감정적으로 굴지 마! 며칠만 머리 식히고 다시 얘기해. 내가 사과한다잖아!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데? 바닥에 엎드려서 빌기라도 할까? 응?”

“빌 필요 없어요.”

지은은 민석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자국이 남을 정도로 강하게 내쳐진 민석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당신이 빌어도, 내가 당신을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까.”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지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구역을 향해 걸어갔다.

“윤지은! 야, 윤지은!”

뒤에서 민석이 소리치는 음성이 들렸지만, 지은은 단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구두 소리만이 정적 속에서 당당하고 절제된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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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으로 들어와 운전석 문을 닫는 순간, 외부의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지은은 운전대에 두 손을 올렸다. 시동을 걸기 위해 버튼에 손가락을 대는 순간,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아.”

짧은 한숨과 함께 참아왔던 숨이 터져 나왔다. 아까까지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더니, 혼자만의 공간에 남겨지자 비로소 배신감과 비참함이 밀려왔다. 지은은 운전대에 이마를 묻었다.

5년이었다.

20대 초반에 만나 서로의 가장 빛나던 시절을 함께 보냈고, 그 남자의 가족과 미래를 자신의 것처럼 고민했던 시간이었다. 그 모든 날들이 고작 한밤중 지하 주차장의 더러운 밀회 현장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지은은 눈을 감고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울음을 터뜨리면 정말로 자신이 그들의 더러운 연극에 완벽한 피해자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지은은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을 억지로 눌러내리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에 찍힌 이름은 [언니]. 네 살 터울의 친언니, 윤지혜였다.

— 어, 지은아. 이 시간에 웬일이야? 미팅 끝났어?

밝은 언니의 목소리가 수신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지은은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침을 꼴깍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언니…….”

— 응, 왜 그래? 목소리가 왜 이래? 무슨 일 있어?

“나…… 결혼 못 할 것 같아.”

— ……뭐?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민석 씨랑 싸웠어?

“아니, 싸운 거 아니야.”

지은은 말을 이으려 했지만 목구멍이 막힌 듯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숨을 깊게 내쉬고 나서야 가까스로 다음 문장을 뱉어낼 수 있었다.

“나…… 나 지금 차 운전해서 집에 못 갈 것 같아. 언니, 나 좀 데리러 와주면 안 돼?”

전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동생이 어떤 성격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지혜였다. 남에게 손 벌리기 싫어하고,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혼자 삼키던 지은이 이런 소리를 할 정도라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을 터였다.

— 너 지금 어디야. 위치 찍어. 당장 갈 테니까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차 안에 가만히 있어. 알았지?

“응…… 태경호텔 지하 주차장 C구역이야.”

통화가 끊겼다. 지은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시트를 뒤로 젖혔다. 어두운 차 안, 주차장의 붉은 비상등 불빛만이 지은의 위로 차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

다음 날 오전 9시.

지은은 언니 지혜의 아파트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밤새 단 한 시간도 잠을 이루지 못해 눈 밑이 거무스름하게 꺼져 있었다.

지혜는 어젯밤 지은을 데리러 온 뒤 사정을 듣고는 당장 차민석을 찾아가겠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지은이 몇 번이나 말린 끝에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이튿날 아침까지도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회사에는 반차 냈어?”

지혜가 따뜻한 유자차 잔을 지은의 앞 탁자에 놓으며 물었다.

“응. 오전에 정리에 필요한 전화 몇 군데 돌리고 오후에 들어가려고.”

“그 쓰레기 같은 놈들 때문에 네가 왜 반차까지 써가면서 고생을 해야 해? 내가 차민석 그 인간 회사로 찾아가서 아주 매장시켜 버릴 테니까 너는 가만히 있어.”

“언니, 됐어.”

지은이 찻잔을 손으로 감싸 쥐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시작한 일이고, 내가 정리해. 감정적으로 굴어봤자 나만 손해야.”

지은은 테이블 위에 펼쳐놓은 노트를 바라보았다. 차민석 명의로 된 예식장 계약서, 청첩장 주문 내역, 신혼여행 비행기 표 및 호텔 예약서, 스드메 패키지 계약서.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설렘으로 얼룩져 있던 문서들이 이제는 전부 폐기해야 할 쓰레기로 변해 있었다.

지은은 휴대폰을 들어 태경호텔 웨딩홀 담당자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고 익숙한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태경호텔 웨딩팀입니다. 윤지은 신부님? 어머, 어제 미팅 잘 마치고 가셨는데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아침 일찍 죄송합니다.”

지은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3주 뒤 예정되어 있던 예식 취소 절차를 밟으려고 연락드렸습니다.”

— 네……? 취소요?

매니저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높아졌다.

“네. 파혼하게 되어서요. 위약금 규정이나 계약금 환불 관련해서 어떤 서류가 필요한지 이메일로 보내주시면 정리해서 내겠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객 좌석 배치와 꽃장식 콘셉트를 논의하던 상대에게 ‘파혼’이라는 단어를 뱉는 기분은 기묘할 정도로 서늘했다.

전화기 너머로 잠시 서류 넘기는 소리와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어수선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매니저가 난처함이 가득 섞인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 저…… 신부님. 지극히 죄송합니다만, 혹시 차민석 실장님하고 이야기가 완료되신 건가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 실은…… 방금 전 8시 반경에 차민석 실장님 비서실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었습니다.

지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차민석이 먼저 예식장에 취소 요청을 넣었다는 뜻인가? 어젯밤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결국 현실을 깨닫고 제 손으로 정리한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어진 매니저의 말은 지은의 예상을 완벽하게 비껴갔다.

— 실장님 측에서 ‘신부와 사소한 말다툼이 있어 오해가 생긴 것뿐이니, 혹시 신부님이 취소 요청을 하더라도 예정대로 진행하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게다가 예식 계약이 차민석 실장님 명의여서, 계약자 본인의 취소 의사가 확인되지 않으면 저희가 임의로 취소 처리해 드리기 어렵습니다.

지은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어젯밤 약혼반지까지 빼서 그의 차 위에 얹어두고 나왔다. 양가 부모님께 통보하고 파혼하겠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민석은 지은의 말을 그저 ‘사소한 말다툼으로 인한 앙탈’ 정도로 치부해 버린 것이었다. 지은의 결정을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예식을 강행하려 들고 있었다.

“기다려 보세요, 매니저님.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지은이 통화를 끊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휴대전화가 진동하며 익숙한 번호가 떠올랐다.

[차민석]

지은은 멍하니 반짝이는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화면 너머에서 지은의 인생을 제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한 남자의 얼굴이 비쳐 보이는 듯했다.

지은은 천천히 숨을 깊게 들이쉬며, 화면 위의 초록색 통화 버튼을 옆으로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