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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사진 한 장

완벽한 파혼을 위하여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22. 사진 한 장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지은은 책상 위에 펼쳐 둔 회의 자료를 한쪽으로 밀었다. 민석이 전화를 걸어 와 처음 물은 것은 그녀가 기자에게 파혼 이야기를 어디까지 할 생각이냐는 것이었다.

“나한테도 물어봤으니까 그렇지. 기사에 내 이름까지 나오잖아.”

“내 이름도 나와.”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그때 있었던 일까지 전부 얘기할 필요는 없잖아.”

“그럴 필요가 있는지는 내가 정할 일이야.”

민석은 선뜻 반박하지 못했다. 지은은 통화가 길어지면 그가 결국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수진의 이름이 나오거나, 형과 결혼한 이유를 묻거나. 어쩌면 둘 다일 것이다.

“수진이도 아직 회사 다니고 있어. 네가 말하면 걔도 곤란해질 텐데.”

“지금 수진이 걱정하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니라, 쓸데없이 일이 커지면 너한테도 좋을 게 없다고.”

“난 아직 기자한테 연락받은 적도 없어. 먼저 전화해서 말할 생각도 없고.”

“그럼 가만히 있겠다는 거야?”

“민석 씨.”

지은은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내가 아무 말 안 한다고 네가 안심할 일은 아니야. 그리고 나중에 무슨 말을 하든 너한테 허락받지는 않을 거고.”

그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너도 형하고 결혼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 생각했을 거 아냐.”

“생각했어. 그래서?”

“왜 하필 형이냐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은은 대답 대신 모니터 오른쪽 아래의 시간을 확인했다. 십 분 뒤면 유나와 본사 협의 자료를 최종 점검해야 했다.

“그걸 지금 네가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해?”

민석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은은 더 기다리지 않았다.

“회사에서 전화받고 있어. 할 말 끝났으면 끊을게.”

통화를 끊고 지은은 고객 문의 표를 다시 열었다. 몇 주 전까지 결혼을 준비했던 사람이 여전히 자신에게 해명을 요구한다는 사실이 피곤했다.

*

오후 본사 협의에서 유나는 개편안의 전체 일정과 협력업체의 작업 범위를 설명했고, 지은은 고객 문의를 분류한 기준에 관한 질문에 답했다. 일부 문구를 조정하기로 했을 뿐 회의는 무리 없이 끝났다. 발표 자료에는 지은의 이름도 정상적으로 남아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자 현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토요일 재단 행사 참석 건, 저녁에 다시 이야기해도 될까요?]

재단 후원 행사는 이전부터 예정돼 있었다. 결혼 기사가 난 지금, 참석을 피한다고 해서 지은의 존재가 감춰지는 것도 아니었다.

[네. 퇴근하고 이야기해요.]

유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지은에게 물었다.

“이번 주는 좀 괜찮아요? 계속 연락 오죠?”

“업무보다 다른 연락이 많긴 하네요.”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이 아는 척할 때가 있잖아요. 그런 건 그냥 넘겨요.”

지은은 뜻밖이라 생각하면서도 고맙다고 답했다.

*

저녁 식사를 마친 뒤 현우가 태경재단 행사 안내문을 식탁에 놓았다. 정기 후원 행사로, 재단과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온 후원 기업 대표 및 그룹 관계자들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현우는 원래 혼자 참석하려 했지만 혼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서실에 배우자 동반 여부를 확인하는 연락이 왔다고 설명했다.

“꼭 같이 가야 하는 자리는 아닙니다.”

“계약서에 공식 행사 참석도 있잖아요.”

“합의한 범위에서요. 이렇게 외부 관심이 몰린 직후의 행사는 처음 예상했던 것과 다르니까, 의사를 먼저 물어보는 게 맞죠.”

지은은 안내문 뒤쪽의 촬영 일정을 살폈다. 후원사 기념사진, 재단 임원 사진, 행사 현장 기록. 기자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행사는 아니지만 공식 사진은 외부에 배포될 수 있었다.

“사진에 제 얼굴이 나올 수도 있겠네요.”

“네. 원하면 촬영 범위를 미리 조정할 수 있어요. 참석 자체를 취소해도 되고요.”

“차라리 지금 한 번 참석하는 게 낫겠어요. 계속 안 나간다고 해서 사람들이 저를 모르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현우는 재촉하지 않고 지은이 읽던 안내문을 그대로 뒀다.

“그럼 사진이 어디에 쓰이는지는 제가 알고 싶어요. 회사 행사 홍보나 다른 목적으로 나가는 것까지 전부 괜찮다고 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건 확인해 두죠.”

지은은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전에 혼담 이야기 나왔던 집안 사람들도 와요?”

“그쪽과 관계된 기업이 오래된 후원사예요. 대표가 참석할 예정입니다.”

“좀 불편하겠네요.”

“그럴 수 있죠.”

현우가 지나치게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서 지은은 그를 올려다봤다.

“대표님은 안 불편하세요?”

“불편하다고 피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니까요. 다만 당신한테 그런 의무까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지은은 안내문을 접었다. 현우는 자신이 어디까지 함께할지 매번 확인했다. 계약을 지키는 태도일 수도 있었지만, 민석과 비교하게 되는 건 꺼림칙했다.

“가겠어요. 대신 사람들한테 제가 뭘 아는 척해야 하는지는 미리 알려 주세요.”

“아는 척할 필요 없어요. 제가 소개하면 인사만 하면 됩니다.”

“그런 자리에 처음 가는 사람한테는 그게 더 어려울 수도 있는데요.”

현우가 웃었다.

“그럼 불편하면 저한테 얘기해요. 중간에 먼저 나와도 되고.”

*

금요일 밤 지은은 옷장에서 어두운 색 원피스를 꺼내 침대 위에 펼쳐 놓았다. 특별히 새 옷을 준비할 생각은 없었다. 행사 안내문에 적힌 복장 기준에도 맞았다.

현우는 방문을 열어 둔 채 행사 참석자 명단을 확인하고 있던 지은에게 몇 사람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재단 실무를 오래 맡은 이사, 부친과 가까운 후원사 대표, 오미경이 주로 인사하는 재단 관계자들. 지은은 이름을 외우려다 포기하고 상대를 마주할 때 다시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하죠. 식사는 행사 전에 조금 하고 가는 게 좋아요.”

“연회장에서 밥도 주잖아요.”

“주기는 하는데 제대로 먹기 어려울 수 있어서요.”

지은은 결국 현우가 추천한 대로 간단히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집에서 출발 시간을 정하는 대화만큼은 편했다.

*

토요일 저녁, 호텔 연회장 앞에는 재단이 지원해 온 사업을 소개하는 사진과 자료가 전시돼 있었다. 안내 직원이 초청장을 확인했고, 재단 관계자가 현우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안쪽에서 회장님 기다리고 계십니다.”

“먼저 인사드리고 들어가죠. 제 아내 윤지은 씨입니다.”

지은은 준비해 둔 인사말 대신 평범하게 고개를 숙였다. 상대가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후에도 비슷한 소개가 이어졌다. 누군가는 지은의 직장을 알고 있었고, 누군가는 기사를 봤다며 결혼을 축하했다. 현우는 상대의 이름과 관계를 짧게 알려 주었다. 지은이 대화에 끼어들어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해 주는 태도였다.

오미경은 연회장 안쪽에서 지은을 발견하고 먼저 다가왔다.

“지은 씨, 왔네. 이런 자리는 처음이지?”

“네. 안녕하세요.”

“앞으로는 종종 볼 사람들인데 오늘 얼굴 익혀 두면 좋겠어. 현우가 일만 하느라 사람 소개하는 데는 좀 무심하거든.”

그녀는 주변 재단 관계자들이 보는 앞에서 지은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대표님이 오기 전에 명단을 알려 주셨어요. 그래도 직접 뵈니까 또 다르네요.”

“그랬어? 다행이네.”

오미경은 현우를 바라봤다. 현우는 반가운 기색도 불쾌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 사이의 짧은 침묵을 먼저 끝낸 건 후원사 관계자의 인사였다.

민석은 차정식 옆에 서 있었다. 지은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틀 전 전화에서 형과 결혼한 이유를 따지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표정이 정돈돼 있었다. 지은도 인사만 하고 지나갔다.

*

행사 중반, 차정식은 오래된 후원사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현우와 민석도 그쪽으로 불려 왔다. 지은은 현우에게 소개받아 간단히 인사했다. 상대는 과거 혼담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지은에게도 축하한다는 말 외에는 묻지 않았다.

“금요일 수정안 잘 받아봤습니다.” 대표가 민석에게 말했다. “처음 이야기했던 것보다 서로 부담을 줄일 여지는 있겠더군요.”

“금요일에 일부 조건을 조정했습니다. 남은 건 투자금 집행 기준입니다.”

차정식이 거들었다.

“민석이가 그 일은 처음부터 공을 많이 들였어요. 서로 오래 봐 온 사이인데 좋은 방향으로 가야지.”

“저희도 같은 생각입니다. 다만 투자 집행 조건은 지주사 확인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현우가 답했다.

“네. 아직 확정된 계약 조건은 없습니다. 검토가 끝나야 말씀드릴 수 있어요.”

“차 상무와는 상당 부분 의견을 맞췄는데요.”

“실무 협의는 계속 진행하시면 됩니다. 최종 결정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할 거고요.”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고 화제를 재단 사업으로 돌렸다. 지은은 옆에서 대화를 들으며 같은 사업을 설명하는 두 형제의 태도가 확연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민석은 협의를 진전시키려 했고, 현우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부분을 확인했다. 둘 다 필요한 말이었지만, 민석이 현우의 답을 들을 때마다 표정이 굳어지는 것은 감추지 못했다.

얼마 뒤 재단 직원이 기념 촬영을 안내했다. 차정식과 두 아들, 주요 후원사 대표들이 함께 서는 공식 사진이었다. 지은에게도 가족과 함께 서 달라는 요청이 왔다.

“저도요?”

“네. 가능하시다면 회장님 가족분들 함께 부탁드립니다.”

지은이 현우를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행사 기록 사진이면 괜찮아요. 부담되면 빠져도 되고요.”

지은은 촬영 위치로 이동했다. 사람들을 배치하던 중 협력사 측 홍보 직원이 사진의 사용 용도를 물었다.

“저희 회사 후원 소식에도 쓰고요. 이번에 진행하는 협력사업 소개 자료에도 같이 사용할 수 있을까요? 회장님하고 대표님들 다 계셔서 좋은 그림이 나올 것 같습니다.”

현우가 그 말을 듣고 물었다.

“협력사업 소개 자료라는 건 어떤 자료입니까?”

“향후 투자 협력 관련한 대외 자료를 준비할 때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아직 확정된 건 아닙니다.”

“후원 행사 사진으로 사용하는 건 괜찮습니다. 다만 투자 협력 홍보에 쓰는 건 계약이 정리된 뒤 별도로 협의하시죠.”

홍보 직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담당자에게 다시 확인하겠다고 했다. 촬영 자체가 중단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기 중인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현우에게 모였다.

오미경이 가볍게 웃었다.

“오늘은 다 좋은 일로 모였는데 사진 한 장 때문에 그렇게 까다롭게 굴 필요가 있니?”

“촬영은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사용 목적만 구분하자는 거예요.”

민석도 현우를 향해 짧게 말했다.

“형, 그쪽에서 홍보에 쓰겠다는 정도잖아.”

“투자 관련해서는 아직 확정된 게 없잖아.”

“알아. 그렇다고 관계가 끊어진 것처럼 보이게 할 필요도 없지.”

지은은 사진 담당자가 자신을 향해 위치를 다시 안내하는 동안 대화의 흐름을 살폈다. 재단 행사 사진이 협력사업 자료로 쓰이면 자신의 얼굴도 함께 실릴 수 있었다. 애초에 그런 용도까지 허락한 적은 없었다.

“저는 재단 행사 사진으로 안내받고 참석했어요.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면 미리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직원이 얼른 알겠다고 대답했다. 현우 역시 지은의 의견에 동의했다. 참석자들은 원래 예정된 후원 행사 기념사진을 촬영했고, 다른 사업 홍보에 활용하는 문제는 별도로 확인하기로 했다.

촬영이 끝나자 사람들은 다시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민석은 현우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차정식도 한동안 표정이 좋지 않았다.

*

행사가 끝나갈 무렵 지은은 현우와 연회장 밖으로 나왔다. 현우는 비서실 직원에게 사진 사용 범위를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지은은 그가 통화를 마칠 때까지 근처에 서 있었다.

민석이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형, 아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었어?”

현우는 직원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돌아섰다.

“무슨 얘기야.”

“사진. 사람들 다 있는 데서 꼭 선을 그어야 했냐고. 금요일까지 조건 맞춰 놓은 거 형도 알잖아.”

“재단 사진으로 찍지 말라는 얘기 안 했어. 미확정 사업에 갖다 쓰지 말라는 거지.”

“상대도 아직 확정 안 됐다는 거 알아. 형이 계속 그렇게 나오면 저쪽은 우리가 협력할 생각이 없는 줄 알 거 아냐.”

“그 사진이 투자 홍보 자료에 쓰일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

민석이 대답하지 않자 현우가 말을 이었다.

“알고도 그냥 두려고 했던 거면 문제고, 몰랐다면 지금 확인한 게 다행이지.”

“형은 꼭 그런 식으로 얘기해야 해?”

“회사 일이니까.”

민석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지은은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두 사람을 지켜봤다. 이번에는 누구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지만, 조금 전 후원사 대표 앞에서보다 훨씬 노골적인 감정이 드러났다.

그때 차정식이 복도 안쪽에서 걸어왔다.

“무슨 일인데 둘이 여기서 이러고 있어?”

민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지, 형이 아까 사진을 협력사업 관련 자료로 쓰지 못하게 했어요.”

현우는 곧바로 정정했다.

“재단 행사 사진으로 사용하는 건 동의했습니다. 투자 건은 아직 계약 조건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용도를 따로 확인하자고 했고요.”

차정식은 두 아들을 번갈아 봤다. 그러고는 지은을 바라봤다가 다시 현우에게 물었다.

“오늘 그쪽 대표하고 사진 찍는 자리가 왜 마련됐다고 생각하니?”

현우가 입을 열기 전, 차정식이 덧붙였다.

“그 사진은 내가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