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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아버지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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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아버지의 방식

차정식의 말에 민석이 먼저 입이 다물렸다. 현우는 아버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혼담이 무산된 뒤에도 협력 관계가 유지된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후원사 기념 촬영이라고 전달받았습니다.”

“그게 맞아. 내가 그쪽 대표하고 같이 찍자고 한 건 그것 때문이고.”

“그런데 협력사업 홍보에도 쓰겠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아직 계약도 안 된 투자안을 두고 대외적으로 신호를 줄 수는 없어서요.”

“네가 틀렸다는 얘기는 아니다.”

“…….”

“그런데 그 자리에서 꼭 선을 그어야 했니? 나한테 먼저 물을 수도 있었잖아.”

“촬영 자체는 진행했습니다. 사용 목적만 확인한 겁니다.”

“상대는 우리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고 있어. 계약서에 적히지 않는 부분도 사업에 영향을 준다는 걸 모르지 않잖아.”

잠자코 그들의 말을 듣고만 있던 민석이 끼어들었다.

“금요일에 수정안 보냈을 때만 해도 반응이 좋았어요. 제가 설명해 둔 내용을 형이 행사장에서 다시 문제 삼으니까 저쪽에서 당황하잖아요.”

“네가 설명해 둔 건 투자 구조지, 사진을 사업 홍보에 써도 된다는 허락은 아니잖아.”

“그런 허락을 받았다는 말은 안 했어…!”

“그럼 별개의 일로 봐야지.”

차정식이 손을 들었다. 두 아들이 입을 다물자 그는 민석에게도 고개를 돌렸다.

“너도 성사시키는 데만 마음이 급하면 안 돼. 조건이 정리되기 전에 확정된 것처럼 보이는 건 곤란하지.”

민석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적어도 아버지는 어느 한쪽의 편을 들 생각이 없어보였다.

“오늘은 재단 행사다. 여기서 더 이야기할 일 아니야.”

차정식이 자리를 뜨자 민석도 따로 인사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나가버렸다. 현우는 조금 떨어져 있던 지은에게 다가갔다.

“행사는 거의 끝났어요. 먼저 차에서 쉬고 있을래요?”

“네. 대표님은요?”

“전 아버지하고 잠깐 더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은은 알겠다고 답하고 안내 직원을 따라 로비 쪽으로 향했다. 현우는 그녀가 걸어가는 모습을 본 뒤 아버지가 들어간 별실로 발길을 돌렸다.

―

차정식은 자리에 앉자마자 재킷 단추를 풀며 현우를 올려다 보았다. 얼굴엔 주름이 적지 않게 잡혀 있었지만 아직도 그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민석이가 보낸 안, 제대로 봤어?”

“재무 쪽에서 검토하고 있습니다. 처음 제출한 것보다 나아졌어요.”

“그렇게 평가하면서 왜 계속 결정을 미뤄?”

“결정을 미루는 게 아닙니다. 수익을 보전해 달라는 조항이 빠지는 건 긍정적이지만, 후속 투자금을 집행할 기준은 확정해야 합니다.”

“그 기준을 정하는 데 네가 얼마나 걸린다고?”

“사흘 안에 정리할 수 있습니다. 다만 협력사에서 동의한 내용과 실무진이 검토하는 내용이 같아야 합니다.”

차정식이 물잔을 들었다.

“내가 그 집안을 얼마나 오래 봤는지 알지?”

“압니다.”

“사업이란 게 결국 사람 사이에서 되는 거야. 우리 쪽이 불확실하다고 물러설 때마다 상대도 양보할 이유가 없어지는 법이지.”

오랜 거래 관계가 없었다면 협상도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투자 손실의 책임은 현재 경영진의 몫이었다.

“관계를 유지하려는 뜻은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투자 조건을 확인하기도 전에 대외적으로 협력이 순조롭다고 말할 순 없어요.”

“말을 하자는 게 아니라, 적어도 관계가 틀어지지 않았다는 모습은 보여줄 수 있지 않느냐는 거다.”

“그건 재단 사진으로 충분했습니다. 협력사 홍보 직원이 별도 용도를 꺼내지 않았다면 저도 문제 삼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민석이한테는 왜 그렇게 박하게 굴어?”

현우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 동생이라서 기준을 달리 적용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말이 아니야. 네가 저 아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건 안다. 저 아이도 널 싫어하고. 그런데 그게 사업 판단에 영향을 주면 곤란하다는 거지.”

“이번 투자안에 필요한 검토를 요구한 겁니다.”

“그건 네 설명이고.”

차정식은 현우를 바라봤다.

“네가 대표이사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민석이한테 맡긴 사업이면 해 볼 만한 권한도 줘야 해. 결과를 요구하면서 손발을 다 묶을 수는 없잖아.”

현우도 재량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이미 사전 승인 범위 안에서는 민석이 결정하도록 검토 중이었다. 다만 민석의 자료부터 의심하고 보는 자신의 습관도 부정하기 어려웠다.

“월요일에 수정 조건이 정리되면 투자심의에 올릴지 결정하겠습니다.”

“좋아. 그 대신 네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다고 하염없이 붙들진 마라.”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정식은 덧붙였다.

“민석이가 성과를 내면 그건 인정해 줘. 네 동생이기 전에 우리 회사 임원이니까.”

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옳은 말이었지만 그 말을 자신에게만 하는 아버지가 달갑지는 않았다.

―

차에 올라타자 지은이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오래 걸리실 줄 알았어요.”

“생각보다 빨리 끝났어요. 기다리게 했네요.”

“괜찮아요. 행사 끝나고 사진도 몇 장 받아 봤어요.”

지은은 몇 시간씩 낯선 사람들에게 인사하느라 피곤해 보였다.

“아까는 제가 미리 확인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사진이요?”

“네. 아버지가 촬영을 부탁한 건 알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래도 사진 찍는 건 괜찮았어요. 문제가 된 건 나중에 어디에 쓰려고 했느냐잖아요.”

“맞아요.”

지은은 한참 창밖을 보다 물었다.

“아버님은 왜 그렇게까지 하셨어요? 사진으로 사업이 잘된다고 믿으시는 건 아닐 텐데.”

“상대와 오랫동안 쌓아 온 관계를 유지하고 싶으신 거죠. 실제로 그런 신뢰가 협상에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대표님도 좀 봐드릴 수 있지 않았어요?”

뜻밖의 질문에 현우가 그녀를 봤다.

“후원 행사 사진은 찍었잖아요.”

“그건 그렇죠. 그런데 아버님한테 미리 말씀드렸다면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불편해질 일도 없지 않았을까 싶어서요.”

“그건 저도 아쉬웠어요.”

사용 목적을 미리 알았다면 실무 단계에서 정리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업 일로 아버님하고 자주 의견이 다르세요?”

“종종요. 아버지는 관계가 먼저인 때가 있고, 저는 조건이 먼저인 때가 있어서.”

“그렇다고 아버님이 조건을 안 보시는 건 아니겠죠.”

현우는 입가에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죠. 저보다 훨씬 오래 회사를 운영하셨으니까.”

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아까 두 분이 싸우실 줄 알았어요.”

“저와 아버지요?”

“아니요. 대표님하고 민석 씨요.”

“그럴 만한 일은 아니었어요.”

“두 분이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지는 않던데요.”

현우는 더 이상 부인하지 못했다. 지은은 두 형제가 아까 어떤 표정으로 서로를 봤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좋은 사이는 아니에요.”

“알고 있어요.”

지은은 더 캐묻지 않았다. 이후에는 행사 음식과 다음 날 일정에 관해 이야기했다. 현우는 그 태도가 편했다.

―

집에 들어오자 비서실에서 행사 사진 파일을 보내왔다. 현우는 지은에게 사용할 수 있는 사진을 함께 확인하자고 했었기 때문이다.폴더에는 차정식과 두 아들, 후원사 관계자들이 찍은 사진이 나란히 정리돼 있었다.

“와…… 생각보다 많이 찍었네요.”

“괜찮지 않은 사진이 있으면 말씀해요. 배포 전에 제외할 수 있습니다.”

지은은 한 장을 고르더니 화면을 확대했다. 현우와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사진이었다. 현우가 다른 사람을 소개해 주는 동안 지은이 자연스럽게 옆에 서 있었던 순간이었다.

“이건 괜찮네요. 대신 사진 설명에 협력사업 얘기는 넣지 않았으면 해요.”

“재단 행사 사진으로만 배포할 겁니다.”

“그럼 됐어요.”

현우는 해당 사진을 표시해 비서실에 전달했다. 맞은편에서 지은은 행사장에서 받은 명함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재단 이사라고 하셨죠?”

현우가 명함을 확인해 주자 지은은 휴대전화 메모에 짧게 이름을 남겼다. 다음에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만 따로 정리하는 모습이었다.

“지은씨, 오늘 고생많았어요. 불편한 자리였을 텐데.”

지은은 작게 고게를 저었다.

“대표님 만큼 힘들진 않아요. 근데 내일은 쉬세요?”

“오전에는 별다른 일정은 없어요.”

“그럼 아침은 늦게 먹어도 되겠네요.”

"그럼, 그럴까요."

지은은 가볍게 웃으며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넨 뒤 방으로 올라갔다. 현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평소대로 알람을 맞추려던 그는 잠깐 생각한 끝에 시간을 한 시간 늦췄다.

―

월요일 오전, 현우의 집무실에 올라온 첫 자료는 민석의 공동 투자 조정안이었다. 금요일까지 협력사와 의견을 맞춘 내용에 실무 검토 의견이 덧붙어 있었다.

협력사는 최소 수익 보전 요구를 철회하는 대신 초기 투자금을 줄이는 방안에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임차 계약이 확보될 때마다 양측이 후속 자금을 집행하는 구조였다. 상대가 실제로 양보한 부분이 있었다. 민석이 만들어 낸 성과였다.

“협력사 측에서 조건을 다시 바꿀 가능성은요?”

재무 담당 임원은 아직 확정 계약 전이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수익 보장 대신 자금 부담을 줄이는 방향에는 서로 이해가 맞았다고 설명했다.

“임차 계약은 어떤 단계부터 인정하기로 했습니까?”

“그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의향서인지 실제 계약인지, 보증금 납부까지 확인할지 실무 의견이 갈립니다.”

“후속 집행이 걸린 기준이면 의향서만으로는 어렵겠죠. 계약 해지 조건도 같이 확인하세요.”

법무팀 의견에도 계약 해지 시 후속 투자 의무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명시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현우는 해당 항목에 표시했다.

“이 정도면 심의에 올릴 수 있겠습니까?” 임원이 물었다.

“남은 조건을 정리하면 가능합니다. 다른 이유로 미룰 필요는 없어요.”

현우는 좋은 사업이 될 가능성과 그 성과를 민석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별개로 볼 수 없었다.

―

오후에 민석이 직접 찾아왔다. 현우가 자리를 권하자 동생은 책상 앞에 자료를 놓았다.

“재무 쪽에서 검토 의견 들었어?”

“들었어. 협력사에서 보전 요구를 철회한 건 잘했더라.”

민석은 뜻밖이라는 듯 현우를 봤다가 서류를 펼쳤다.

“그럼 투자심의 일정 잡아 줘. 더 미루면 저쪽도 조건 다시 볼 거야.”

“후속 집행 기준은 아직 남아 있어.”

“확정 임차 계약에 보증금 납부까지 들어간 경우만 인정하기로 했어. 해당 계약이 취소되면 다음 집행 단계로 넘어가지 않는 조건도 넣었고.”

“해지되는 시점이 집행 뒤일 수도 있잖아.”

“그 경우 추가 집행을 멈추고 이미 들어간 돈은 별도 정산 절차로 처리해. 법무 검토 의견까지 붙여 왔어.”

민석이 내민 자료에는 법무 의견까지 반영돼 있었다. 현우가 지적할 때마다 준비된 답변이 돌아왔다.

“협력사가 이 조건에 동의했어?”

“구두로 방향은 확인했어. 문안은 최종 검토 중이고. 승인 전에 계약했다고 발표할 생각은 없어.”

마지막 말에는 토요일 행사에서의 불만이 섞여 있었다.

“그럴 생각 없으면 됐어.”

“형은 내가 뭘 가져와도 일단 기다리라고 하잖아.”

현우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번엔 검토할 가치가 있으니까 심의에 올리자는 거야. 아니었으면 반려했겠지.”

“그러면 날짜부터 잡아.”

“법무 의견 반영해서 문안 확정하면 일정 잡을 거야. 그 전에 내가 승인했다고 협력사에 말하지는 마.”

민석이 짧게 웃었다.

“그 정도는 알아. 그리고 심의에서 사업 설명은 내가 할 거야.”

“네가 맡아 온 사업이니까 네가 설명하는 게 맞지.”

현우의 대답에 민석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언가 더 반박할 말을 준비한 듯했지만, 서류를 챙겨 일어섰다.

“그럼 일정 나오면 알려줘.”

민석이 나간 뒤에도 현우는 자료를 검토했다. 이번 성과를 인정하는 것과 동생을 신뢰하는 건 다른 일이었다. 그렇다고 사적인 감정으로 실적을 깎아내릴 수도 없었다.

차정식에게서 전화가 온 건 민석이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민석이 안 봤어?”

“다녀갔습니다. 수정안도 받았고요.”

“조건은 어때?”

“최소 수익 보전 문제는 정리됐습니다. 후속 집행 기준을 계약 문안에 반영하는 작업이 남았지만, 심의에 올릴 만한 안입니다.”

“그럼 준비해. 법무 검토 끝나는 대로 투자심의 일정 잡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발표는 민석이가 직접 하도록 해.”

“본인도 그렇게 요청했습니다.”

차정식은 낮게 웃었다.

“둘 다 같은 생각일 때도 있구나.”

현우는 웃지 않았다. 아버지의 다음 말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번 건은 그 애한테 중요한 기회야. 네가 대표라고 해서 그 애가 성과 낼 자리를 뺏을 이유는 없지.”

“그럴 생각 없습니다.”

“좋아. 대신 너도 네 판단을 끝까지 책임져. 네가 그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서 언제나 민석이보다 나은 판단을 한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현우는 대답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집무실이 조용해졌다. 아버지는 대표이사 자리가 곧 후계 확정을 뜻한다고 말한 적 없었다. 민석에게도 사업을 맡기고 결과를 지켜봤다.

현우는 민석의 수정안을 다시 열었다. 반려할 이유보다 심의에 올려야 할 이유가 많은 자료였다. 그는 비서실에 법무 검토 완료 시점을 확인하도록 지시하고, 투자심의 안건 준비 요청을 보냈다.

발표 담당란에는 차민석의 이름을 적었다.

전송을 누른 현우는 다음 일정표를 열었다. 이번 심의가 통과되면 아버지가 누구의 성과로 평가할지는 뻔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