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결정권자
25. 결정권자
“윤 대리는 이번 프로젝트를 끝까지 맡을 수 있습니까?”
지은은 민석을 바라봤다. 예산이나 고객 조사에 관한 질문은 예상했지만, 몇 달 뒤에도 회사에 있을지를 물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현재로서는 맡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현재로서는요?”
민석이 그녀의 답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지은이 팀장을 보자 팀장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민석을 바라봤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지은은 오늘 회의가 단순한 예산 검토라고 생각했으니까.
―
출근하자마자 팀장을 찾아간 지은은 전날 메신저로 받은 면담 요청부터 확인했다.
“차 상무님이 저를 따로 찾으신 이유가 있을까요?”
“이번 신규 브랜드 예산 때문이에요. 원래는 사업계획 검토로 넘어가야 하는데, 전략기획실에서 초기 집행 규모를 다시 보겠답니다.”
“그런데 왜 저를 지목하셨대요?”
“고객 조사 쪽 숫자를 직접 확인하고 싶으신가 보죠. 윤 대리가 처음부터 자료 만들었잖아요.”
팀장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지은에게는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수요일 민석은 기자에게 파혼 이유를 어디까지 말할 거냐며 전화를 걸어 왔다. 지은이 통화를 끊은 뒤 처음으로 그를 마주하는 자리가 공식 회의라니.
하지만 여기서 자신이 참석을 거절하면 개인적인 이유를 업무에 끌어들이는 사람은 오히려 지은이 된다.
팀장이 건넨 수정 검토표에는 출시 초기 홍보비와 시스템 구축비에 빨간 표시가 돼 있었다. 기존 계획은 시장 진입 초기에 상당한 비용을 투입하는 구조였다. 당초 기대했던 판매 전환율을 보수적으로 바꾸면 투자 대비 성과가 불분명해지는 구간이 있었다.
지은은 조사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 고객의 관심과 실제 구매는 다르다. 사업을 계속하려면 낮아진 예상치를 설명할 대안이 필요했다.
회의실에는 민석과 전략기획실 직원 둘, 지은의 팀장과 강유나가 먼저 와 있었다. 지은은 평소처럼 인사하고 빈자리에 앉았다. 민석도 그녀를 오래 보지 않았다.
“초기 마케팅 비용이 계획 대비 너무 큽니다.”
민석이 화면에 띄운 건 지은이 익숙하게 보아 온 예산표였다.
“브랜드 인지도가 낮다는 이유로 홍보비를 먼저 쓰자는 건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 비용을 회수할 수 있다는 근거가 부족해요. 초기 판매량 전망은 어떻게 계산했습니까?”
팀장이 조사 방식과 과거 유사 사업의 성과를 설명했다. 유나는 이미 협력업체들과 제작 일정을 조정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민석은 둘의 설명을 듣다가 지은에게 질문을 넘겼다.
“윤 대리가 고객 조사 담당했죠?”
“네.”
“관심 있다고 답한 사람 중에 실제 구매 의사를 확인할 수 있는 표본은 얼마나 됩니까?”
“구매 의향을 묻긴 했지만, 조사 단계에서 실제 결제 행동까지 검증한 건 아닙니다. 그 수치는 별도로 봐야 합니다.”
“그럼 이 전망치를 그대로 실적 목표로 잡을 수는 없겠네요.”
“네. 다만 조사 결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 어떤 고객층이 제품을 필요로 하는지, 구매 과정에서 어떤 이유로 이탈할 가능성이 큰지예요.”
“필요하다는 응답과 돈을 쓴다는 건 다르잖습니까.”
그 말은 옳았다. 지은은 무리하게 반박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계획대로 전국 채널에 동시에 출시하는 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화면을 넘기던 민석의 손이 멈췄다. 유나도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요?”
“초기부터 홍보비를 전액 집행하지 않고 한정된 채널에서 먼저 구매 전환을 확인하는 겁니다. 고객군을 나눠 반응을 비교하면 지금 조사에 없는 숫자를 얻을 수 있어요. 그 결과에 따라 후속 집행을 결정하고요.”
전략기획실 직원이 곧바로 물었다.
“그렇게 하면 제작비나 시스템 구축비는 못 줄일 텐데요. 출시 규모만 줄여도 고정비가 남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시험 운영으로 미룰 수 있는 비용과 어차피 들어가는 비용부터 분리해야 합니다. 지금 자료는 둘이 섞여 있어요. 콘텐츠 제작도 채널마다 같은 비용이 필요한 건 아니고요.”
“일정은요?” 유나가 물었다. “시험 운영 끝나고 전체 출시 결정하면 촬영부터 다시 잡아야 할 수도 있어요.”
“일부 제작 일정은 유지하되 확장 집행만 보류하는 식으로 검토해 볼 수 있어요. 다만 그게 가능한지는 업체 계약부터 확인해야 하고요.”
시험 운영 비용을 지나치게 낮게 잡으면 오늘의 문제가 다음 주에 반복될 뿐이었다. 민석은 몇 가지 가정을 확인한 뒤 자료를 덮었다.
“좋습니다. 기존 안을 그대로 밀기보다는 검토할 가치가 있겠네요. 다음 주 초까지 단계별 비용과 중단 기준을 넣어서 다시 제출하세요. 기대 매출이 아니라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지표로요.”
회의실에 있던 직원들이 메모를 시작했다. 민석이 덧붙였다.
“그리고 담당자는 오늘 중으로 확정해 주세요. 시험 운영으로 바꾸면 준비 과정부터 책임지고 이어 갈 사람이 필요합니다.”
팀장이 지은을 돌아봤다. 아직 새 프로젝트를 맡겠다는 답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윤 대리가 검토 중입니다.”
그때 민석이 지은에게 물었다.
“윤 대리는 이번 프로젝트를 끝까지 맡을 수 있습니까?”
지은은 잠깐 숨을 골랐다. 이직 제안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른 회사에 지원하겠다고 결정한 것과 실제로 떠나는 건 전혀 달랐다. 그렇다고 몇 달 뒤에도 자신이 이 자리에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었다.
“현재로서는 맡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담당 확정 후에 수정안 주세요. 맡을 사람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사업 구조부터 바꾸면 다음 단계에서 다시 처음부터 설명해야 합니다.”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지은이 자료를 정리하자 민석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윤 대리. 고객 조사 원본 분류표도 받을 수 있을까요? 구매 의향 응답에서 제외한 항목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팀장님 결재받아서 공식 경로로 전달드리겠습니다.”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 쪽으로 나가던 직원들이 모두 사라지자 그가 덧붙였다.
“오늘 설명은 괜찮았어. 준비 많이 했나 봐?”
민석은 누가 봐도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지은은 표정 없이 그를 봤다.
“업무에 관한 의견이면 회의록에 남겨 주세요.”
그 말에 민석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칭찬도 못 하냐?”
“따로 들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야.”
“이야, 너 진짜 많이 달라졌다.”
지은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가방을 챙겼다. 한 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프로젝트 맡을 거면 확실히 정해. 시작해 놓고 중간에 손 떼면 다른 사람들이 곤란해져.”
“그건 팀장님하고 결정할 일이야.”
“그래. 네가 알아서 해.”
민석은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지은은 그가 자신을 위해 조언하는 척할 때 특유의 말투를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 사실이 더 불편했다.
―
사무실로 돌아오자 유나가 수정 일정표를 들고 왔다.
“윤 대리, 그 파일 오늘부터 정리할 수 있어요? 월요일까지라고 하면 실제로는 오늘 업체 계약 확인해 놔야 돼요.”
“할게요. 고정비하고 변동비부터 다시 나누면 될 것 같아요.”
“근데 프로젝트는 맡기로 한 거예요?”
지은은 대답을 망설였다. 유나는 그 눈치를 보고 먼저 말을 이었다.
“맡을 거면 제대로 맡아요. 아니면 지금 다른 사람 붙이는 게 나아요. 담당자 바뀌면 내가 업체들한테 또 같은 설명해야 해서 그래요.”
“알아요.”
“이번 기획, 윤 대리가 제일 잘 아는 것도 맞고요.”
유나는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누가 이름을 올리느냐보다 실제로 일을 굴릴 수 있느냐였다.
지은은 퇴근 전에 결정하겠다고 답했다. 아직 지원서도 내지 않았는데 벌써 떠날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그렇다고 프로젝트 책임을 받아 놓고 다음 달에 그만두게 되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겐 어떤 설명을 해야 할까.
점심도 거른 채 수정안의 뼈대를 만들던 지은은 오후 늦게 팀장실에 들어갔다.
“팀장님, 이번 프로젝트 전체 담당자는 다른 분으로 정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팀장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왜요? 아침 회의에서 제안한 방향 괜찮았는데.”
“제가 당분간 계속 이 업무를 맡을 수 있을지 아직 확답하기 어려워서요. 지금 책임자로 확정되는 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고객 조사와 시험 운영안 정리는 제가 끝까지 지원할게요.”
“회사 옮길 생각 있어요?”
“검토 중입니다. 정해진 건 없습니다.”
팀장은 지은을 한동안 바라봤다. 그러고는 일정표를 다시 펼쳤다.
“그럼 내가 다른 사람 배정하겠습니다. 대신 월요일 초안은 윤 대리가 책임지고 제출해요. 뒤에 올 사람이 바로 이어받을 수 있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은은 문을 닫고 나왔다.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쓰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름을 지키려고 애쓴 프로젝트였다. 이제는 스스로 그 이름을 책임자란에서 빼 달라고 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쪽 일도 아직 끝난 건 아니었다. 지은은 자리로 돌아와 수정안에 첫 줄을 적었다.
**
그날 밤, 현우는 서재에서 돌아와 거실에 앉아 있었다.
“오늘 많이 늦었네요.”
“수정안 때문에요. 예상보다 일이 커졌어요.”
……이걸 말을 해야 해, 말아?
고민하는 시간을 길지 않았다. 결국 지은이 천천히 입을 뗐다.
“……오늘 민석 씨하고 회의했어요.”
현우는 컵을 내려놓으며 지은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
“무슨 회의였어요?”
“새 브랜드 사업 예산이요. 민석 씨가 출시 규모를 다시 보자고 해서요.”
“그건 전략기획실에서 볼 만한 사안이네요.”
“네. 일은 제대로 봤어요. 좀 뜻밖이긴 했지만요.”
“뭐가요?”
“예전엔 개인적인 얘기만 했으니까요. 회사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사실 잘 몰랐거든요.”
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은은 자신이 괜히 동생을 폄하하는 말처럼 들렸을까 봐 싶어 덧붙였다.
“회의 끝나고 자료 요청도 받았는데, 공식 경로로 보내겠다고 했어요. 그것 말고는 별일 없었어요.”
“불편한 일 있었습니까?”
“그렇진 않았어요. 다만 프로젝트 맡을 수 있겠냐고 묻는데 선뜻 대답이 안 나오더라고요.”
지은은 팀장에게 맡지 않겠다고 말한 일까지 설명했다. 아직 다른 회사에 합격한 것도 아닌데 중요한 기회를 포기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까워요?”
“네. 생각보다요. 그 회사에 남아야 하는 이유가 생긴 날이었으니까.”
“그럼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죠.”
현우는 쉽게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지은은 그런 태도가 오히려 편했다.
“대표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어요?”
“전 이직할 회사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기존 사업을 놓지 않았을 겁니다. 다만 맡겠다고 약속한 일을 중간에 내려놓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요.”
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다른 판단이었다.
“그럼 제가 너무 성급했나 봐요.”
“꼭 그렇다는 뜻은 아니에요. 지은 씨는 남에게 넘기기 어려운 일을 책임지고 싶지 않았던 거잖아요. 그걸 미리 이야기한 거고.”
“어쨌든 기회 하나는 없어졌네요.”
“다음 기회를 만들 수는 있겠죠. 지금은 지원해 보려는 회사가 어떤 곳인지도 아직 다 모르고요.”
지은은 그제야 현우의 앞에 놓인 서류를 봤다. 어느새 먼저 그를 찾아와 오래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 때문에 업무 못 보신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오늘 할 건 끝났어요.”
“그럼 한 가지 더 물어봐도 돼요?”
“물어봐요.”
“태경에서 그만두면, 사람들이 대표님이 저 내보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현우는 잠깐 웃었다.
“그럴 사람도 있겠죠. 그렇다고 그 사람들한테 확인받고 퇴사할 수는 없잖아요.”
―
밤늦게 지은은 개인 노트북으로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정리했다. 공개된 작업만 남기고 회사 내부 자료와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제외했다.
지원 메일을 쓰기 시작하자 생각보다 손이 빨리 움직였다. 무언가를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해 보고 싶은 일을 선택하려고 쓰는 문장이었다.
제출 버튼을 누른 뒤에는 혜진에게 짧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답장은 금방 왔다.
[확인했어. 주말에 보고 연락할게. 수고했다.]
지은은 노트북을 덮었다. 그날 처음으로 다른 회사에 지원했다는 실감이 났다.
토요일 오전, 혜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류 잘 받았어. 면접은 다음 주에 보면 될 것 같아. 그런데 면접 전에 얘기할 게 하나 있어.”
“무슨 일이에요?”
“지금 우리가 제안서 내고 있는 회사가 있거든. 아직 수주한 건 아니고, 후보 업체로 들어가 있어.”
“네.”
“태경이랑 사업 분야가 겹치는 대기업이야. 우리 직원들 중에도 네가 그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는지 걱정하는 사람이 있어.”
지은은 며칠 전 현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태경라이프를 떠난다고 해서 배우자의 직책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제가 태경홀딩스 대표 배우자라서요?”
“응. 꼭 안 된다는 건 아닌데, 클라이언트가 경쟁사 정보를 다루는 과정에 민감하거든. 네가 아예 담당에서 빠져야 할 수도 있어.”
“그렇다면 다른 프로젝트를 맡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혜진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그 프로젝트가 이번 채용에서 제일 큰 일이거든.”
지은은 휴대전화를 고쳐 쥐었다. 혜진은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일 맡길 사람 구하려고 채용 시작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