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자격
26. 자격
잠시 통화가 끊긴 줄 알았던 지은은 스피커 너머에서 혜진이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럼 저는요? 그 일을 못 맡으면 뽑을 이유가 없는 거네요.”
“아직 못 맡는다고 정해진 건 아니야. 우리 쪽에서 우려가 나왔다는 거지. 고객사에는 네 이름도 안 들어갔어.”
“그런데 언니도 걱정하고 있잖아요.”
“그렇지. 내가 제안할 때는 다른 프로젝트부터 맡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쪽 일정이 당겨졌어. 미리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해.”
혜진은 변명하지 않았다. 채용 목적이 정해진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은은 팀장에게 새 프로젝트를 고사한 일을 떠올렸다. 면접도 보기 전에 자기 자리를 내놓았다. 스스로 한 결정이었다.
“면접은 볼 수 있는 거죠?”
“물론이지. 서류는 좋았어. 월요일 오전 어때?”
“반차 내볼게요.”
통화를 마치고 휴대전화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며칠 사이 선택지가 하나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조금씩 밀려드는 불안감에 지은은 무의식적으로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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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층에서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식탁에 앉은 현우는 신문을 펼쳐 놓고 있었다. 짙은 남색 니트 아래로 셔츠 깃이 조금 보였고, 덜 마른 머리카락은 평소와 달리 자연스럽게 이마를 덮고 있었다.
“잘 잤어요?”
“별로요. 면접 보러 오래요.”
현우는 신문을 접었다.
“좋은 소식 아닌가요?”
지은은 들릴 듯 말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원래는요. 원래는 그랬죠.”
그녀는 의자에 앉아 혜진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현우는 들으면서 커피를 따라 주었다.
“아직 고객사가 반대했다는 건 아니네요.”
“네. 그런데 뽑는 목적이 그 프로젝트 때문이래요. 제가 그걸 못 맡으면 다른 사람을 뽑는 게 맞죠.”
“면접에서 판단할 문제겠죠.”
“대표님은 간단하게 말씀하시네요.”
“간단하진 않죠.”
현우가 컵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지은 씨가 직접 할 수 있는 일과 회사가 판단해야 하는 일을 구분하자는 겁니다. 그 회사 사정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벌써 떨어졌다고 생각하지는 말고요.”
“그런데 회사는 제가 맡을 수 있는 일보다 누구 아내인지부터 보잖아요.”
“그건 좀, 기분 나쁠 만하네요.”
현우는 잠시 그녀를 봤다.
“다만 그 회사가 확인하려는 것도 이해는 됩니다. 경쟁사의 미공개 사업 정보를 다룰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해관계부터 따질 테니까.”
“대표님도 제가 거기 들어가면 불편하겠죠?”
“업무가 겹치면 조심해야 할 일은 생기겠죠. 집에서는 회사 비밀을 서로 묻지 않는 걸로 하고요.”
“원래도 대표님은 회사 일 잘 안 알려주시잖아요.”
“그러니까 지은 씨만 조심하면 되겠네요.”
뜻밖의 대꾸에 지은이 웃었다. 현우도 웃으며 그녀의 빈 접시를 가리켰다.
“말만 하지 말고 먹어요. 다 식겠어요.”
지은은 포크를 들었다. 토스트를 먹으며 지은은 맞은편의 남자를 흘끔 봤다. 집에서는 의외로 농담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면접은 보고 올게요.”
“그래요.”
“혹시 떨어져도 제가 너무 충동적으로 회사 그만둘 생각한 거라고 하지는 마세요.”
“아직 그만둔 건 아니잖아요.”
“그러네요.”
지은은 또 웃었다. 적어도 오늘 아침에는 자신의 선택을 변명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약간 안도감이 느껴졌다. 물론 그 이유는 정확히 말로 설명 할 수는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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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전, 지은은 반차를 내고 혜진의 사무실로 향했다. 면접실에는 혜진 외에 실무를 총괄하는 이사가 있었다. 그는 경력부터 묻고 실제로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했다.
“윤 대리님이 회사에서 제안한 새 프로젝트 책임자를 고사했다고 들었습니다.”
“네. 이직을 검토하는 중이라 몇 달간 맡아야 할 자리를 확답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합격하기도 전에요?”
지은은 조금 웃었다.
“저도 지금은 성급했나 생각하고 있어요.”
이사는 처음으로 펜을 멈췄다.
“그런 대답을 하실 줄은 몰랐네요.”
“그렇다고 당시 판단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으니까요. 결정한 건 제가 맞고요.”
이어진 질문은 지은이 제출한 포트폴리오에 관한 것이었다. 지은은 실제로 맡았던 업무만 설명했다. 성과가 좋았던 일도, 승인되지 못한 제안도 있었다.
이사는 지은이 고객 자료를 읽는 방식을 흥미롭게 들었다. 그러다 마지막 서류를 펼쳤다.
“문제는 지금 저희가 꼭 필요한 자리가 하나라는 겁니다.”
“그 프로젝트가 태경과 경쟁하는 회사 일이라는 거죠.”
“네. 미공개 제품 정보와 가격 전략을 다루게 돼요. 저희는 윤 대리님이 그런 정보를 유출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객사가 담당자 변경을 요구하면 다른 사람을 새로 구해야 할 수도 있죠.”
“제가 태경홀딩스 대표와 결혼했다는 사실만으로요?”
“그 사실이 검토 사유가 될 수는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어떻게 판단할지는 고객사하고 확인해야 하고요.”
지은은 면접실 창문 너머로 일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지난번 이곳에서 자료를 읽으며 상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채용돼도 그 일을 맡을 수 있을지 불확실했다.
“제가 다른 프로젝트를 맡을 가능성은요?”
혜진이 대답했다.
“있어. 하지만 지금은 그걸 전제로 채용할 여유가 없어.”
면접을 마친 뒤 혜진이 복도까지 따라 나왔다. 둘은 잠시 자판기 앞에 서 있었다.
“오늘 어땠어?”
“어렵네요. 언니 회사에 오면 하고 싶은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럴 수도 있어. 아직 결정 난 건 아니야.”
“그런데 언니가 사람 뽑는 이유는 이미 정해져 있잖아요.”
혜진은 부인하지 않았다. 지은도 더 설득하지 않았다.
“이번 지원은 여기까지 할게요.”
“지은아. 결과도 안 나왔는데?”
“나 때문에 회사가 다른 사람 뽑을 기회를 놓치면 안 되잖아요. 저도 무슨 일을 맡게 될지 모르는 상태로 지금 회사를 나올 수는 없고요.”
“내가 처음부터 더 설명했어야 했어.”
“다음에 정말 맞는 자리가 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요.”
혜진은 끝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친구라서 거짓말해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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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로 돌아오니 새 브랜드 프로젝트 담당자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팀장은 새 담당자에게 고객 조사 자료를 넘겨 달라고 했다. 지은은 자료의 미확정 항목에 표시했다. 옆에 있던 유나가 자료를 훑었다.
“정말 안 맡으려고요? 아직 아쉽긴 하죠?”
“네. 생각보다요.”
“그럼 왜 그렇게 빨리 말했어요?”
“할 수 있다고 말해 놓고 중간에 못 하겠다고 할까 봐요.”
유나는 잠깐 지은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사람은 빨리 정했어요. 근데 다음에는 본인 손해도 좀 생각해요.”
지은이 웃자 유나는 파일을 밀어 줬다.
“그렇다고 지금 마음 바뀌었다고 하면 곤란해요. 새 담당자 벌써 일정 받았거든요.”
“알아요. 인수인계 제대로 할게요.”
지은은 메일에 첨부할 자료를 정리했다. 자신이 시작한 기획이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씁쓸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왔을 때 현우는 거실에 있었다. 지은은 그에게 면접에서 있었던 일을 짧게 설명하다가, 결국 지원을 철회했다고 털어놓았다.
“아쉽겠네요.”
“네. 태경라이프에서 새 프로젝트도 포기했는데요. 양쪽 다 놓친 것 같아요.”
“새 프로젝트는 왜 포기했어요?”
“중간에 그만둘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그때는 충분히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었겠죠.”
“대표님은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하세요?”
“결과를 알고 나면 다른 선택이 나아 보이는 법이니까요. 제가 그때 같은 입장이었으면 어떻게 했을지는 모르죠.”
지은은 소파에 기대앉았다. 잘했다고 말해 주길 바랐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현우는 억지로 위로하지 않았다.
“오늘 면접에서 제가 어떤 일을 했는지 설명하는 게 제일 재미있었어요. 그게 좀 이상하죠. 떨어질까 봐 긴장했는데 막상 일 얘기하니까 좋더라고요.”
“어떤 일을 설명했는데요?”
지은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공개 자료가 휴대전화에 있었다. 제품 구매 과정에서 고객이 가장 많이 이탈했던 단계와, 자신이 문구를 바꿔 제안했던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현우는 자료를 받아 들고 실제로 질문했다. 지은은 막혔던 부분을 다시 설명하다가 둘 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대표님, 지금 저 면접 보시는 거예요?”
“모르는 게 있어서요. 지은 씨는 당연히 아는 것처럼 말하니까.”
지은은 그의 옆자리로 옮겨 앉아 화면을 함께 봤다. 손끝이 닿을 만큼 가까워지고 나서야 거리를 의식했다. 현우는 모니터를 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여기 숫자가 바뀐 건 그럼 문구 때문만은 아니겠네요.”
“맞아요. 구매 단계도 같이 줄였거든요.”
“그 얘기는 아까 안 했잖아요.”
“그건 제가 설명을 못 했네요.”
지은이 웃자 현우가 그녀를 돌아봤다.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친 눈매가 생각보다 선명했다. 지은은 서둘러 휴대전화를 가져오려 했고, 현우는 자연스럽게 화면을 돌려 주었다.
“오늘 면접에선 이 부분까지 이야기했어요?”
“네. 그때는 좀 더 잘했어요.”
“그럼 아쉬워할 만하네요.”
지은은 그를 바라봤다.
“뭐가요?”
“지은 씨는 그 일을 정말 좋아하나 봐요.”
지은은 처음으로 그날 일을 떠올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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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오전, 현우는 투자심의 회의실에서 민석이 발표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동생은 기존 투자안이 낙관적이었다는 사실부터 인정했다. 그리고 최소 수익 보장을 요구하던 협력사를 설득해 투자금을 단계별로 집행하는 새 구조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처음에는 반응이 좋았다. 그러나 재무 담당 임원이 중도 철수 비용을 묻자 분위기가 바뀌는 듯했다.
“임차 계약이 목표에 못 미치면 다음 투자를 중단한다고 했죠. 그런데 이미 들어간 돈은 누가 책임집니까?”
“양측이 비용을 분담하는 원칙으로 협의했습니다.”
“원칙이요? 계약서에 확정된 조항이 아니라는 뜻입니까?”
“문안은 아직 협의 중입니다.”
재무 임원이 서류를 덮었다.
“그렇다면 오늘 승인하기 어렵습니다.”
민석의 얼굴이 굳었다. 차정식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현우는 동생의 자료에서 표시해 둔 부분을 다시 펼쳤다.
“협력사가 끝까지 분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럴 가능성은 낮아.”
“가능성을 묻는 게 아니야.”
민석은 형을 바라봤다. 현우는 이전 회의에서의 다툼을 떠올렸다.
“그 조건이면 사업 접겠어.”
“지금까지 네가 들인 시간이 아까워도?”
“형, 내가 이 사업을 무조건 성사시키려고 한다고 생각해?”
“그렇게 보일 때가 있었지.”
민석은 숨을 고르고 다음 자료를 띄웠다. 협력사가 비용 분담 원칙에 동의한다는 취지로 보낸 회신이었다.
“보전 요구를 거절한 것도, 집행 규모를 줄인 것도 손실을 제한하려는 거였어. 마지막에 우리가 전부 책임지라고 하면 진행하지 않을 거야. 이건 아버지 앞이라고 다르게 말할 생각 없어.”
차정식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결정할 수 있다는 거냐?”
현우가 답했다.
“오늘은 승인 가능한 범위만 정할 수 있습니다. 비용 분담 한도와 최종 계약 문안이 확인될 때까지 실제 투자금은 집행하지 않는 조건으로요. 그 범위를 벗어나면 다시 심의해야 합니다.”
재무·법무 담당자들이 조건을 확인했다. 협상을 계속할 수 있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마침내 차정식이 결론을 내렸다.
“조건부 승인으로 합시다.”
민석이 들고 있던 펜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차 상무. 조건을 마무리하는 일까지 네 책임이야. 오늘 통과됐다고 다 끝난 거 아니다.”
“알겠습니다.”
차정식은 다른 임원들 앞에서 덧붙였다.
“처음부터 완벽한 안을 가져오는 것보다 문제가 생겼을 때 고쳐 낼 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이번엔 차 상무가 그 일을 잘했어요.”
동생이 협력사를 움직였고 사업안은 나아졌다. 현우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회의가 끝나자 민석이 다가왔다.
“이제는 내가 해낸 걸 인정하겠지?”
“오늘 회의에서 인정받았잖아.”
“형한테 묻는 거야.”
현우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민석을 바라봤다.
“잘했어. 근데 최종 계약까지 마무리해야 네 성과가 되는 거야.”
민석이 짧게 웃었다.
“역시 형은 마지막까지 한마디를 더 하네.”
“너도 마지막까지 물어보잖아.”
민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더 이야기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날 오후, 차정식은 현우를 집무실로 불렀다. 아버지는 투자심의 자료를 덮으며 말했다.
“민석이를 계속 계열사에만 둘 수는 없겠어.”
현우는 그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한 건 성사시켰다고 지주사로 옮기시겠다는 겁니까?”
“그러니까 더 해 보게 하자는 거지.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 앞으로도 보면 될 일이고.”
“지주사 자리는 실험 삼아 내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너도 대표가 되기 전에는 처음 해 보는 일이 있었어.”
현우는 입을 다물었다. 차정식은 투자심의 자료를 현우 쪽으로 밀었다.
“오늘 회의에서 민석이가 부족한 건 네가 지적했고, 민석이는 그걸 받아서 답을 냈어. 잘 굴러가더구나.”
“항상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차정식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다음 인사 때 민석이를 지주사로 데려올 생각이다. 전략투자 쪽으로.”
현우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단순히 동생에게 일을 더 맡겨 보자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계열사에서 성과를 낸 뒤 지주사의 승인을 받던 민석이, 앞으로는 같은 조직에서 자신과 부딪히게 된다는 뜻이었다.
“민석이도 알고 있습니까?”
“아직. 네 의견부터 듣는 거야.”
“제 의견을 물으시는 거라면 반대입니다. 적어도 역할과 책임을 먼저 정해야 합니다.”
차정식이 현우를 한동안 바라봤다.
“그러면 그건 네가 정해.”
“아버지.”
“네가 대표잖아.”
차정식은 현우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덧붙였다.
“이번에는 네가 그 애를 직접 데리고 일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