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NCrawler

27.술 한 잔의 거리

완벽한 파혼을 위하여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27.술 한 잔의 거리

“……민석이를 제가 직접 데리고 일하라는 말씀이십니까?”

현우가 되묻자 차정식은 태연하게 보고서를 덮으며 말했다.

“네가 대표인데 그 정도도 못 해?”

“못 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지주사에 필요한 인력인지부터 검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번 사업에서 성과 냈잖아. 할 만하다고 판단했으니까 맡겨 보라는 건데.”

“그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전략투자 조직에 자리를 마련할 수는 없습니다.”

차정식은 대꾸 없이 아들을 바라봤다. 현우는 말을 이었다.

“민석이가 협상을 잘한 건 사실입니다. 다만 지주사로 이동하면 담당할 사업도, 보고 체계도 달라집니다. 기존 임원들의 업무와 겹치지 않도록 역할부터 정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정하라고. 나한테 불가능한 이유부터 나열하지 말고.”

두 사람의 사이가 얼마나 나쁜지 알면서도 민석을 자신의 조직으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이 달갑지 않았다. 현우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고 물었다.

“민석이에게도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네 의견을 먼저 듣는다고 했잖아.”

“제 생각은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쪽입니다. 이동이 필요하다면 그에 맞는 직무부터 설계하겠습니다. 다만 그전까지 인사 확정은 보류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도 아직 확정한 건 없어.”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가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을 정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

지은은 현관에서 구두를 벗다가 거실을 돌아봤다. 현우가 출근할 때 입은 재킷도 벗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평소와 달리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일찍 오셨네요.”

“네. 지은 씨도 이제 왔어요?”

“인수인계할 게 남아서요.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이요.”

현우의 표정이 평소보다 지쳐 보였다. 지은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려다 그만뒀다.

“그럼 저랑 나가서 드실래요?”

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요?”

“집 앞에 괜찮은 식당이 있어요. 지나가다 봤는데 한번 가 보고 싶었거든요. 멀지도 않고요. 피곤하시면 안 나가셔도 되고요.”

현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소파에서 일어났다.

“……가요. 저도 저녁 먹어야 하니까.”

지은은 겉옷을 챙겼다. 현우는 재킷과 넥타이를 벗고 셔츠 소매를 걷었다.

“이대로 가세요?”

“동네 식당인데요. 옷이 좀 이상해요?”

“아니요. 너무 멀끔해서요.”

“갈아입고 올까요?”

“그냥 가요. 제가 가려던 집이랑 안 어울리면 그건 식당 사장님이 판단하시겠죠.”

현우가 웃었다.

식당은 골목 안쪽에 있었다. 두 사람은 창가에 앉았다.

“여기 파스타가 맛있대요. 제가 먹어 본 건 아니고 회사 사람들이 추천했어요. 그러니까 맛없으면 저 원망하지 마세요.”

“그런 책임까지 묻진 않을게요.”

현우의 농담 섞인 대꾸에 지은도 웃었다. 직원이 돌아간 뒤 혜진에게 메시지가 왔다. 다음 주에 밥이나 먹자는 내용이었다.

“아, 혜진 언니가 연락했네요.”

“이직 제안했던 분이요?”

“네. 이번 일은 잘 안됐지만 그래도 밥은 같이 먹자고요.”

지은은 답장을 보내고 휴대전화를 엎어 놓았다.

“사실 좀 걱정했거든요. 괜히 회사에 지원했다가 친구 사이까지 어색해지는 거 아닐까 하고요.”

“오래 알고 지내신 분인가 봐요.”

“네. 저한테는 꽤 소중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번 일 때문에 불편해질까 봐 걱정했는데…… 언니가 먼저 연락해 주니까 마음이 놓이네요.”

“친한 사이일수록 그런 문제는 더 조심스럽죠.”

“대표님은 어떠세요? 사람들 많이 만나시잖아요.”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은 많죠.”

“그거 말고요. 개인적으로요.”

현우는 잠깐 생각했다.

“자주 만나는 친구는 많지 않아요. 서로 바쁘다 보니 약속 잡기도 쉽지 않고요.”

“그래도 연락하는 사람은 많겠죠?”

“많죠. 막상 만나면 일 이야기로 끝날 때가 많지만요. 제가 먼저 꺼낼 때도 있고요.”

“그럼 대표님이랑 친구 하면 피곤하겠네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현우는 억울하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지은이 다시 물었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도 있으시겠죠?”

“몇 달씩 못 만나다가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친구들이 있죠.”

“부럽네요.”

말하고 나서 조금 후회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장 친한 친구를 묻는 말에는 망설임 없이 수진의 이름을 댔을 것이다.

“지은 씨는요?”

“저는…… 요즘은 좀 달라졌어요. 오래 알고 지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잘 아는 건 아니더라고요.”

현우는 그녀가 누구를 떠올리는지 아는 듯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그래도 혜진 씨하고는 잘 지내시잖아요.”

“네. 그러니까 다 그런 건 아니겠죠.”

지은은 웃었다. 현우가 억지로 위로하지 않는 점이 좋았다.

음식이 나오자 지은은 리소토를 한 숟갈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도 파스타를 맛봤다.

“어때요? 괜찮죠?”

“네. 맛있네요.”

“다행이다. 사실 저도 처음 와 봤거든요.”

“그럼 저를 데리고 시험해 보신 거네요.”

“뭐, 그런 셈이죠.”

“다음엔 제가 골라 볼게요.”

지은은 포크를 들다 그를 봤다. 다음에도 함께 식사하자는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였다.

“좋아요. 대신 너무 비싼 데는 안 돼요.”

“왜요?”

“부담스럽잖아요. 오늘처럼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데가 좋아요.”

“그렇게 하죠.”

지은은 그를 보다가 자신이 여전히 대표님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회사에서 줄곧 그렇게 불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제가 계속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좀 그렇죠?”

“불편하지 않으면 상관없어요.”

“그래도 집 밖에서까지 그러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 같아서요.”

“그럼 편한 호칭으로 불러요.”

여보라고 부르기에는 어색했고, 이름을 부르자니 조금 쑥스러웠다. 지은은 물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현우 씨?”

그가 고개를 들었다.

“네.”

“아니, 그냥 한번 불러 봤어요.”

현우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괜찮은데요.”

“좀 어색하긴 하네요.”

“자주 부르면 익숙해지겠죠.”

지은은 대답 대신 물을 마셨다. 그가 다시 식사를 시작한 뒤에도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두 사람은 평소보다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은은 잘 먹었다고 인사하고 먼저 이층으로 올라갔다.

샤워를 마친 지은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목이 말라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식당 쪽에 불이 켜져 있었다.

현우가 식탁에 혼자 앉아 있었다. 재킷과 넥타이는 보이지 않았고, 셔츠의 윗단추도 두어 개 풀려 있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팔을 테이블에 얹은 채 작은 잔을 들고 있었다. 투명한 잔 바닥에 호박색 술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는 잔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장 서재로 들어갈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

지은은 멈춰 서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피곤한 얼굴과 풀린 옷깃, 잔을 쥔 긴 손가락. 조금 전 식당에서 마주 앉았던 사람인데도 전혀 다르게 보였다.

현우가 고개를 돌렸다.

“안 잤어요?”

“물 마시러 내려왔어요.”

지은은 대답하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잔 가장자리로 시선이 갔다가 그의 얼굴로 돌아왔다.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다.

그녀는 싱크대 쪽으로 가서 물을 마셨다. 그런 다음 찬장을 열어 낮은 잔 하나를 꺼냈다.

현우의 시선이 잔으로 향했다.

“지은 씨도 드시게요?”

지은은 빈 잔을 손에 든 채 잠깐 망설였다. 곧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네. 저도 잘생긴 사람이랑 술 마셔보고 싶었거든요.”

현우는 뜻밖이라는 듯 그녀를 보더니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말씀도 하시네요.”

“왜요? 하면 안 돼요?”

“아니요.”

그는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지은은 현우의 맞은편이 아니라 한 자리 옆에 앉았다. 현우는 그녀의 잔에 술을 조금만 따랐다.

“독해요. 천천히 드세요.”

“알아요. 저도 술 마셔 봤어요.”

“그건 저도 알죠.”

지은은 잔을 기울여 술을 한 모금 넘겼다. 하지만 생각보다 강한 맛에 잠시 말을 잃었다. 한껏 미간을 찡그린 그녀를 보고 현우가 물잔을 가까이 밀어 주었다.

“괜찮아요?”

“네. 처음 맛이 좀 세서요.”

현우는 더 권하지 않았다. 지은도 서둘러 잔을 비울 생각은 없었다.

대화가 끊겼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좋았다. 지은은 잔을 쥔 현우의 손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소매 아래 드러난 팔과 반듯한 손목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그가 잔을 입술에 댔다. 고개가 살짝 젖혀지며 목울대가 움직였다. 지은은 눈을 떼지 못하다가 뒤늦게 자기 잔을 들었다.

저 손이 닿으면 어떨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지은은 잔을 내려놓았다. 이런 종류의 끌림이 낯설 나이는 아니었다. 다만 하필 현우에게 느낄 줄은 몰랐다.

“지은 씨.”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졸리면 올라가도 돼요.”

“안 졸려요.”

“아까부터 말이 없길래요.”

지은은 괜히 웃었다.

“말없이 마시는 것도 좋잖아요.”

“그렇죠.”

현우는 더 묻지 않았다. 그녀가 잔을 내려놓자 자신도 잔을 놓았다. 눈이 마주쳤다. 현우는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지은은 문득 가까워진 거리만큼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 어깨에 걸친 셔츠의 주름, 조금 느슨해진 표정이 전부 신경 쓰였다. 현우가 자꾸 자기를 돌아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들킨 기분이었다.

“제가 좀 이상해요?”

“아니요. 왜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은이 남은 술을 마시자 현우가 물을 따라 줬다.

“오늘은 여기까지 마시는 게 좋겠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도 지은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우가 식탁 위의 술병을 치우려고 손을 뻗었다가 그녀를 바라봤다.

“더 앉아 있을래요?”

“……조금만요.”

현우는 병을 다시 내려놓고 의자에 기댔다. 지은은 그의 옆얼굴을 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말없이 함께 있는 게 좋았다.

어느새 시간이 꽤 흘렀다. 지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현우도 따라 일어났다.

“술 잘 마셨어요.”

“별로 드시지도 않았잖아요.”

“그래도 좋았어요.”

말을 마친 뒤 지은은 자신의 목소리가 조금 달랐다는 걸 깨달았다. 현우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가 웃었다.

“저도요.”

지은은 계단을 올라가다가 중간쯤에서 뒤돌아봤다. 현우는 아직 식탁 곁에 서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역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먼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잘 자요, 현우 씨.”

“잘 자요.”

방문을 닫고 나서야 지은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술은 반 잔도 마시지 않았다. 그 정도로 취할 리 없었다.

그런데 아까 현우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가 눈치챘을까. 지은은 괜히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침대에 앉았다. 처음에는 술 한 잔만 마시려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았다.

―

민석은 아버지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투자심의가 끝난 뒤 차정식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꺼낸 이야기는 예상과 달랐다.

“지주사 전략투자 쪽으로 옮겨 보는 게 어떻겠냐.”

“……형 밑으로 들어가라고요?”

“회사는 위아래로 일하는 곳이야. 네 형이 대표라고 해서 일을 못 할 이유는 없잖아.”

“지금도 형한테 승인받습니다. 그걸 아예 같은 조직 안에서 하라는 거군요.”

“일만 잘하면 네가 맡을 수 있는 일도 더 커지겠지.”

승인을 받아 냈어도 최종 판단은 형의 손을 거쳤다. 같은 조직에서는 그 관계가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저는 지금 하는 사업부터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리고 태경라이프에서 더 큰 책임을 맡고 싶습니다.”

“무슨 책임?”

“사업 하나 승인받는 사람이 아니라, 회사 실적 전체를 책임지는 자리요.”

“대표이사 자리를 말하는 거냐?”

“네.”

“이번 투자 한 건으로?”

“한 건으로 달라는 게 아닙니다. 제가 그 자리에 필요한 사람인지 평가해 달라는 거예요. 형하고 같은 조직에 들어가 서로 잘하는 척하는 것보다 낫잖아요.”

“그 말은 네 형한테도 할 수 있겠어?”

“당연하죠. 지금이라도 할 수 있어요.”

태경라이프에는 현직 대표이사가 있었고 이사회 절차도 남아 있었다. 민석도 그 정도는 알았다.

“기회를 달라는 거지, 당장 앉혀 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럼 기회가 오기 전까지 지금 일부터 끝내. 말만 앞서는 놈이 대표를 할 수는 없으니까.”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거절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허락한 것도 아니었다. 민석은 그 차이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

현우는 며칠뒤에 잡힌 인사 검토 자료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요청한 대로 전략투자 조직의 업무 범위를 살폈지만, 민석을 어떤 자리에 배치해야 할지는 여전히 결정하기 어려웠다. 기존 임원이 맡은 사업을 빼앗거나 동생이라는 이유로 새 자리를 만들 수는 없었다.

전화가 울렸다. 차정식이었다.

—민석이하고 얘기했다.

현우는 서류를 덮었다.

“지주사 이동에는 동의했습니까?”

—아니. 다른 생각을 하더구나.

“……민석이는 뭐라고 하던가요?”

—태경라이프 대표 자리를 달라고 하더라.

현우는 손에 쥔 펜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네 밑에서 일하기보다 자기 이름으로 경영을 해 보고 싶다는군. 나는 우선 실력부터 증명하라고 했지.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 말을 전하려고 직접 전화했다. 현우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네 의견도 듣고 싶다.”

“……무엇에 대한 의견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민석이한테 태경라이프를 맡길 자격이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