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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약속하지 않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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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약속하지 않은 미래

“현재로서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현우의 대답에 수화기 너머가 잠잠해졌다. 창가에 놓인 서류가 바람에 한 장 넘어갔다. 현우는 종이를 눌러 놓고 아버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민석이가 자격이 없다는 거냐?”

“투자 사업에서 성과를 낸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사업 하나를 추진하는 능력과 계열사 전체를 경영하는 능력은 별개입니다.”

“경험이 부족하다고 기회조차 안 주면 언제 증명하겠어?”

“기회는 줄 수 있습니다. 대표이사 자리를 약속하는 일은 다르지만요. 현재 대표도 있고, 이사회에서 판단할 사안입니다.”

“네 동생이 그 자리를 원한다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구나.”

현우는 잠깐 숨을 골랐다. 아버지가 원하는 건 단순한 인사 검토가 아니었다. 형제의 경쟁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그 경쟁을 다시 경영의 문제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사적인 감정으로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지켜봐. 나도 당장 앉힐 생각은 없어. 대신 민석이가 실력을 보여 줄 기회까지 막지는 마라.”

“그럴 생각 없습니다.”

통화가 끝나자 집무실에는 종이 스치는 소리만 남았다. 현우는 화면에 띄운 인사안을 닫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민석을 지주사 어디에 배치할지 고민했다. 이제 동생은 형의 조직보다 자기 이름으로 운영할 회사를 원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직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굳이 그 요구를 자신에게 전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퇴근해 돌아온 지은은 거실에 앉은 현우를 보고 걸음을 조금 늦췄다. 전날 밤, 식탁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그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느슨한 옷깃 아래 드러난 목덜미와 잔을 쥔 손. 잘생긴 사람이랑 술을 마셔 보고 싶었다던 자신의 농담도 선명했다. 취했다고 둘러대기에는 머리가 지나치게 맑았다.

“오늘은 일찍 왔네요.”

현우는 읽던 책을 덮으며 평소처럼 인사했다.

“네. 일이 빨리 끝났어요.”

어제와 달리 단추를 단정히 채운 셔츠, 이마 위로 정리된 머리카락. 지은은 그런 사소한 차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민망했다.

“뭐 묻고 싶은 거 있어요?”

“아뇨. 그냥…….”

마침 가방 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어머니였다. 인주는 주말에 밥을 먹으러 오라며 지혜도 올 거라고 했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현우도 시간이 되면 함께 오겠느냐고 덧붙였다.

지은이 통화구를 가리고 물었다.

“이번 주말에 시간 있으세요? 엄마가 같이 식사하자시는데.”

“괜찮아요. 몇 시쯤 가면 될까요?”

지은은 어머니와 약속을 정했다. 전화를 끊고 보니 결혼 후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편하게 식사하는 건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갑작스럽게 바뀐 사위의 얼굴을 아직도 어렵게 받아들이고 있을 터였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게 있을까요?”

“선물하시게요? 그냥 오셔도 되는데…… 과일 좋아하세요. 비싼 건 말고요.”

현우가 알겠다며 웃었다. 서재 문이 닫히고 나서도 지은은 잠시 거실에 서 있었다. 그는 가족을 만나는 일을 특별한 부탁처럼 여기지 않았다. 그런 자연스러움이 고마우면서도, 열 달 뒤에는 끝날 관계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복잡해졌다.

―

어머니 집 앞에 도착하자 볶은 참기름과 생선 굽는 냄새가 복도까지 흘러나왔다. 벨을 누르자마자 문이 열렸다.

“왔니? 현우 씨도 얼른 들어와요.”

인주는 젖은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며 두 사람을 맞았다. 지은에게는 신발을 가지런히 놓으라면서 사위에게는 어디 앉을지, 뭘 마실지 연신 물었다.

“엄마, 그렇게 긴장하지 마. 편하게 계셔.”

“너나 편하게 있어. 손님 오셨는데.”

“손님은 아니잖아.”

무심코 나온 말에 인주가 잠깐 딸을 봤다. 현우는 모르는 척 과일 상자를 내려놓았다.

“어머니, 이건 어디에 놓을까요?”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부엌에서 지혜가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 아까부터 나한테도 존댓말할 기세야. 그냥 외식하자니까.”

“넌 반찬이나 꺼내.”

“보셨죠, 제부? 평소엔 저렇게 말해요.”

지혜가 웃자 현우도 따라 웃었다. 인주는 딸 둘을 한 번씩 흘겨보고는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낯설던 현관의 공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식탁에는 생선구이와 잡채, 나물이며 된장찌개까지 빈틈없이 놓여 있었다. 네 명이 먹을 양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쳤다. 지은은 아침부터 부엌을 오갔을 어머니를 떠올렸다.

민석과 결혼을 준비하던 때에도 어머니는 사위가 좋아할 만한 반찬을 묻곤 했다. 지금은 그 이름을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일부러 그러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음식으로 빼곡한 식탁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지은은 어머니의 빈 밥그릇에 밥부터 덜어 드렸다.

“엄마, 누가 보면 열 명 오는 줄 알겠어.”

“남으면 싸 가면 되지. 너는 요즘 밥 잘 챙겨 먹니?”

“잘 먹어.”

인주가 믿기 어렵다는 얼굴을 하더니 현우를 돌아봤다.

“지은이는 일만 시작하면 밥 먹는 것도 잊어요. 어릴 때부터 그랬다니까요.”

“엄마, 옛날 얘기잖아.”

“집에서도 가끔 그럽니다.” 현우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하던 일을 끝내야 마음이 편한 모양이에요.”

“거봐. 내가 괜히 하는 말이 아니지.”

순식간에 두 사람이 같은 편이 되자 지은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두 분이 언제 그렇게 저를 잘 아시게 됐어요?”

“같이 사니까 알게 됐겠지.” 지혜가 끼어들었다. “제부, 지은이 은근히 고집 센데 안 불편해요?”

“언니.”

“불편한 건 없습니다. 생활하는 시간이 다르긴 한데, 그것도 익숙해지고 있고요.”

“의견 안 맞을 때는요?”

“이야기해 봐야죠. 저도 고집이 없는 편은 아니라서요.”

그 대답에 지혜가 웃음을 터뜨렸다. 지은도 어쩔 수 없이 웃었다. 현우는 자신을 좋게 보이려 애쓰는 듯하지 않았다. 묻는 말에 답하고, 때로는 농담을 받아 주며 자연스럽게 자리에 섞였다.

지은은 어느새 어머니가 사위에게 반찬을 더 권하면서도 처음처럼 말을 고르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지혜 역시 그를 어렵게 대하지 않았다. 현우는 회사에서의 직함을 꺼낼 필요 없이 이 사람들과 식탁을 나누고 있었다.

그가 지은에 대해 말하는 내용도 마음에 남았다. 최근 이직 문제를 함께 고민할 때, 그는 늘 지은이 결정하도록 기다렸다. 그런데 가족들 앞에서는 그녀가 얼마나 일을 좋아하고 자신의 선택을 중시하는지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있었다. 사소한 대화들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지은이 알고 있던 현우는 민석의 형이자 태경홀딩스 대표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어머니가 끓인 찌개를 맛있게 먹고, 언니의 농담에 웃으며, 자신이 식사를 거르는 버릇까지 아는 남편이었다.

지은은 그를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현우가 눈을 들자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무슨 일인지 묻지 않고 지은 쪽으로 물병을 밀어 주었다. 물잔이 비어 있었다. 지은이 작은 소리로 고맙다고 하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짧은 사이에도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 같아 지은은 조금 늦게 잔을 들었다.

식사가 끝난 부엌에는 그릇이 한가득 쌓였다. 지은이 남은 반찬을 담는 동안 인주는 물을 틀어 놓고 접시를 헹궜다. 거실에서는 지혜의 활기찬 목소리 사이로 현우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잘 지내는 것 같네.”

어머니가 물소리 사이로 말했다.

“응.”

“그 사람도 너한테 잘하고?”

“잘해. 걱정 안 해도 돼.”

인주는 잠깐 딸을 살폈다. 몇 년을 교제한 남자와의 결혼이 무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형과 혼인신고를 했으니, 못다 한 질문이 얼마나 많을까. 그러나 어머니는 접시를 다시 헹굴 뿐이었다.

“현우 씨가 네 회사 일에도 관여하니?”

“아니. 그런 일은 없어.”

“그래. 서로 일하는 데까지 얽히면 힘들지.”

인주는 마른 행주를 건네주었다. 지은은 그걸 받아 그릇을 닦았다. 어머니는 결혼의 속사정을 모르면서도 딸이 자기 일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네가 잘 지내면 됐지.”

차를 마시려고 모두 식탁에 돌아왔을 때, 인주는 끝내 한 가지를 물었다.

“현우 씨, 두 사람 결혼식은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지은이 찻잔을 잡으려던 손을 멈췄다.

“혼인신고부터 하니까 친척들이 자꾸 물어보더라고요. 식은 나중에 하느냐고. 나는 정해진 게 없다고만 했는데…….”

“엄마, 그건 나랑 얘기하면 되잖아.”

“둘이 같이 있는데 물어볼 수도 있지.”

현우는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아직 구체적으로 정한 건 없습니다. 지은 씨와 조금 더 상의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당분간 서두를 생각은 없고요.”

“그렇겠죠. 두 사람이 알아서 잘 결정하겠죠.”

인주는 미소를 지었지만 여전히 아쉬운 눈치였다. 그래도 더 캐묻지 않고 과일을 권했다.

지은은 입안에 남은 차의 떫은맛을 느끼며 현우의 대답을 되짚었다. 결혼식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열 달 뒤 헤어지기로 했으니 계획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지은 씨와 상의하겠다'는 말에 잠깐 안심했던 건 어째서일까. 두 사람이 앞으로도 함께 결정할 일이 많은 부부처럼 들렸기 때문인지 몰랐다.

돌아갈 준비를 하던 지은을 지혜가 현관 옆으로 불러 세웠다. 거실에서는 현우가 인주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너 진짜 잘 지내는구나.”

“왜 자꾸 물어봐?”

“갑자기 결혼한다고 했을 때는 걱정됐지. 근데 오늘 보니까 괜찮아 보여서. 제부도 생각보다 편한 사람이고.”

“원래 사람들하고 잘 지내는 편이야.”

지혜는 동생을 한참 바라보다 목소리를 낮췄다.

“너, 그 사람 좋아하니?”

지은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어젯밤 잔을 들고 자신을 바라보던 현우가 떠올랐다. 조금 전에는 어머니의 식탁에 앉아 가족들과 웃고 있었다. 전혀 다른 모습인데도 둘 다 자꾸 생각났다.

함께 있으면 편했다. 그가 웃으면 자신도 웃었고, 헤어지는 순간이 아쉬울 때도 있었다. 그런 마음을 좋아한다고 불러도 될까. 지은은 아직 자신이 없었다.

“……잘 모르겠어.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사람인 건 맞아.”

“그럼 됐지. 꼭 지금 대답할 필요는 없고.”

언니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지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 쪽으로 가자 현우가 겉옷을 건넸다. 가까이 스치며 익숙한 향이 났다. 지은은 옷을 받아 들면서도 조금 전 질문을 잊지 못했다.

―

돌아오는 차 안에는 어머니가 싸 준 반찬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뒷좌석의 봉지가 차가 방향을 틀 때마다 바스락거렸다. 지은은 창밖으로 번지는 가로등 불빛을 한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오늘 좀 불편하셨죠? 엄마가 이것저것 물어보셔서요.”

“그 정도는 물어보실 수 있죠. 오히려 궁금한 걸 많이 참으시는 것 같던데요.”

“맞아요. 원래 그러실 분이 아닌데.”

“딸 걱정되시니까 그러시겠죠.”

지은은 안전벨트 위에 얹은 손을 내려다봤다.

“결혼식 얘기는 제가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앞으로도 물어보실 것 같아요.”

“그럼 지은 씨가 원하는 대로 말씀드리면 돼요. 저희가 결정할 문제잖아요.”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혼인신고는 했지만 결혼식을 올릴 계획은 없었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합의 이혼한다는 조건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대답을 듣자 잠깐 서운했다. 자신도 같은 생각을 하면서 무슨 대답을 기대했던 걸까.

지은은 창에 비친 얼굴을 봤다. 어머니 집에서는 현우가 남편이라는 사실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함께 밥을 먹고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는 열 달 뒤의 일을 잊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열 달이 지나면 원래 생활로 돌아가면 된다고 믿었다. 돌아갈 집도, 계속 다닐 직장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현우가 없는 저녁 식탁을 떠올리는 일은 어쩐지 쉽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 현우가 반찬 봉지를 챙겼다. 현관문이 닫히며 서늘한 바깥 공기가 끊겼다. 몇 주 전에는 어디에 물건을 두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집이 이제는 익숙했다. 현우는 부엌에 반찬을 넣어 두고 돌아왔다.

“피곤하죠? 오늘 일찍 쉬어요.”

그가 서재로 향하려 하자 지은이 불렀다.

“현우 씨.”

“네.”

“오늘 고마웠어요. 엄마랑 언니한테 잘해 주셔서요. 저도 사실 좀 걱정했거든요.”

“저도 즐거웠어요.”

그의 대답에 지은은 웃었다.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해 준 일들이 있었다. 자신이 곤란해지는 걸 알아채고 자연스럽게 넘어가 주던 순간들. 그에게는 계약에 포함된 책임일 수도 있겠지만 지은에게는 그렇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한 가지가 궁금해졌다. 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답을 듣는다고 계약서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냥 올라가면 오늘 밤 내내 생각날 것 같았다.

“저,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물어봐요.”

“현우 씨는…… 저랑 결혼한 거 후회 안 하세요?”

현우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녀를 봤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가족들까지 만나고, 앞으로도 이렇게 신경 쓸 일이 생길 수 있잖아요. 처음 계약할 때보다 번거로운 일이 많아진 것 같아서요.”

현우는 잠깐 생각하더니 옅게 웃었다.

“후회했으면 오늘 같이 가지도 않았겠죠.”

“……그런가요?”

“네. 적어도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목소리는 담담했다. 듣기 좋은 약속을 덧붙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은은 그 말만으로 마음이 놓였다. 오늘 내내 조금씩 쌓였던 불안이 가라앉는 듯했다.

그런 대답을 듣고 싶어서 질문한 것이 맞았다. 그런데 이유를 따져 보니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자신이 이 집에 머물러도 괜찮은 사람인지 확인받고 싶었던 건지. 지은은 어느 쪽도 쉽게 고를 수 없었다.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현우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되물었다.

“지은 씨는요?”

“네?”

“저와 결혼한 거, 후회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