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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두 번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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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두 번째 집

“아니요.”

대답은 뜻밖에도 쉽게 나왔다. 결혼을 결정할 때만 해도 조건을 하나하나 따져 봤는데, 후회하느냐는 물음 앞에서는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후회 안 해요.”

현우는 더 묻지 않았다. 다물려 있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지은은 계단을 오르면서도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에 이토록 안도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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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퇴근길, 지은은 원래 살던 원룸으로 향했다.

급히 옷가지와 화장품만 챙겨 나온 탓에 기획안을 보완할 때마다 손때 묻은 자료집이 아쉬웠다. 필요한 책을 가져오는 김에 다른 물건도 조금 챙길 생각이었다.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다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 얼마 전까지 매일 누르던 번호인데도 망설이게 됐다. 계단에는 저녁밥 짓는 냄새가 배어 있었고, 층마다 똑같은 방화문이 늘어서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서늘하고 마른 공기가 밀려 나왔다. 신발장 위의 작은 접시, 벽에 걸린 에코백, 주방 건조대에 엎어 놓은 찻잔까지 그대로였다. 사람이 빠졌을 뿐 달라진 건 없었다. 불을 켜자 식탁과 벽 사이의 좁은 틈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혼자 지낼 때는 크기를 가늠할 필요조차 없던 공간이었다.

창문을 열었다. 맞은편 빌라의 창마다 불이 켜지고 있었다. 살 때는 답답하던 풍경인데, 현우의 집에서 넓은 정원을 바라보다 돌아오니 그 빽빽한 불빛마저 반가웠다.

책상 위 자료철을 옆으로 밀고 표지가 닳은 브랜드 사례집을 꺼냈다. 페이지마다 형광펜 자국과 포스트잇이 남아 있었다. 학생 때는 언젠가 필요 없어질 거라 여겼던 책들을 일을 시작한 뒤로 오히려 더 자주 펼쳤다. 대학 때 적어 둔 메모를 보면 그때는 단순하게 여겼던 일들이 이제는 달리 보였다.

책상 서랍을 정리하자 자잘한 물건들이 쏟아졌다. 다 쓴 볼펜과 오래된 영수증, 끊어진 머리끈. 필요한 물건을 골라내느라 시간이 걸렸다. 문득 여기에서 수없이 맞았던 밤이 떠올랐다. 퇴근하고 씻지도 못한 채 책상에 앉던 날도, 주말 내내 창문을 열어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던 날도 있었다.

서랍 깊숙한 곳에서는 졸업식 사진이 든 액자가 나왔다. 지은의 어깨를 감싸고 환하게 웃는 수진. 그날 학사모를 던지고 무엇을 먹었는지까지 생생했다. 지은은 한동안 사진을 보다가 액자를 엎어 서랍 안으로 밀어 넣었다. 버릴 마음도, 다시 책상 위에 세울 마음도 없었다.

책들을 상자에 나눠 담자 선반 곳곳이 비었다. 계약이 끝나면 돌아올 생각으로 보증금과 월세를 그대로 내고 있었다. 빈집에 돈을 쓰는 건 아까웠지만 아직 이곳을 정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 상자에 테이프를 붙이다가 지은은 책상 위를 둘러봤다. 필요한 것만 가져가려 했는데 손이 가장 자주 닿던 물건들은 대부분 상자 속에 있었다. 돌아올 집은 남겨 두면서 그 집을 채웠던 것들은 하나씩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있었다. 지은은 빈 선반의 먼지 자국을 닦아 내고 창문을 닫았다. 가볍게 가져오려던 짐이 세 상자나 되었다. 다음에 올 때는 겨울옷을 챙겨야 할지도 몰랐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자신이 어디에서 지내게 될지는 분명한데, 그 기간이 끝난 뒤의 모습은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택시가 큰길로 들어섰을 때는 이미 어두웠다.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현우에게서 귀가가 늦어진다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지은은 원룸에서 물건을 챙겨 돌아가는 중이라며 먼저 저녁을 먹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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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한 지은은 상자를 하나씩 이층으로 옮겼다. 마지막 것을 내려놓을 때쯤 손바닥이 조금 얼얼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 이 방은 고급 호텔 객실 같았다. 흠집 없는 가구와 정갈한 침구, 넉넉한 수납공간까지. 제 옷을 걸어 놓고도 남의 공간을 빌려 쓰는 기분이었는데, 낡은 책들이 선반을 채우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은은 책상에 오래된 스탠드를 올리고 불을 켰다. 노트 위에 둥근 빛이 내려앉았다. 원룸에서 밤늦도록 기획서를 쓰던 풍경과 닮아 있었다. 방은 훨씬 넓어졌지만 손이 닿는 자리에는 익숙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상자 안쪽에 남은 메모지를 꺼내 책갈피 사이에 넣고, 구겨진 포장지를 펴서 버릴 것과 남길 것을 나눴다. 책상 앞에 앉아 보면 모든 것이 너무 새것 같아 조심스러웠는데, 이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위치에 놓인 책을 아무렇지 않게 옮길 수 있었다.

창밖 정원 가장자리에는 낮은 조명이 켜져 있었다. 지은은 빈 상자를 접다가 잠시 그 풍경을 보았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아래층에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던 지은은 현우의 목소리 외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섞인 걸 알아차렸다.

현관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현우가 외투를 벗고 있었고, 마흔 중반쯤 되어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자가 검은 서류 가방을 건네는 중이었다. 그가 지은을 발견하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지은 씨. 제 비서 이정훈 씨예요. 오래 같이 일한 분이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정훈입니다.”

“안녕하세요. 윤지은이에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사모님.”

사모님이라는 호칭에 지은은 현우를 흘끗 봤다. 그는 별다른 설명 없이 가방을 받아 들었다. 정훈은 이튿날 오전 일정과 준비한 서류를 확인한 뒤 물러났다. 문이 닫히기 전 정훈이 다시 현우에게 인사했고, 현우도 그에게 내일 보자며 간결하게 대답했다.

“오래 함께 일하신 분인가 봐요.”

“저와 십 년쯤 같이 일했어요. 그룹에는 거의 이십 년 계셨고요.”

현우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내렸다.

“그럼 현우 씨에 대해 모르는 게 별로 없으시겠네요.”

“제가 자각 못 한 습관도 알고 계실걸요.”

“그런데 오늘 많이 늦으셨어요.”

“마지막 미팅이 길어졌어요. 저녁은 먹었어요?”

“네. 간단히요.”

현우는 주방에서 물을 마시다가 그녀를 돌아봤다.

“짐 정리한다고 했죠?”

“네. 책이 좀 필요해서 다녀왔어요. 원룸은 당분간 그대로 두려고요.”

“그렇게 해요. 익숙한 곳이니까.”

현우는 빈집에 월세를 내는 걸 두고 뭐라 하지 않았다. 지은은 그가 적어도 왜 원룸을 남겨 두려는지는 묻지 않는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처음 계약을 맺을 때 서로 합의한 조건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런데 요즘은 함께 있는 동안만큼은 그 조건을 잊을 때가 많았다.

“가져온 책은 다 정리했어요?”

“거의요. 선반이 커서 다 들어가더라고요.”

“구경해도 돼요? 지은 씨가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해서요.”

지은은 이층을 올려다봤다. 현우는 그동안 필요한 일이 있어도 방문 앞에서 먼저 말을 걸었지 방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네. 아직 좀 어수선하지만요.”

그는 서류 가방을 서재에 놓고 오겠다며 복도 안으로 향했다. 지은은 먼저 올라가 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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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뒤 현우가 올라왔다. 넥타이를 풀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차림이었다. 스탠드 불빛이 복도 바닥까지 번져 있었다.

“분위기가 달라졌네요.”

“전에는 너무 깔끔해서 제 방 같지 않았거든요.”

지은은 스탠드의 갓을 조금 기울였다. 대학 때부터 쓴 물건이라 조임쇠가 느슨했지만 빛이 마음에 들어 버리지 못했다. 현우는 스탠드에서 책장으로 눈길을 옮겼다. 업무 서적 사이에 소설 몇 권이 끼어 있었다.

“이 책, 읽어 볼 만해요?”

“제가 좋아하는 책이에요. 빌려 가셔도 돼요.”

현우는 소설을 꺼내 표지를 살폈다.

“다 읽으면 지은 씨랑 이야기해 보고 싶은데요. 저녁 먹으면서요.”

“책 얘기요?”

“그것도 좋고, 다른 이야기도 하고요.”

지은은 그를 봤다. 책 한 권을 빌려주는 일이 자연스럽게 다음 약속으로 이어졌다.

“좋아요. 다 읽으시면 말씀하세요.”

맨 위 선반에 꽂을 책이 한 권 남았다. 지은이 팔을 뻗자 현우가 책을 받아 들어 대신 꽂았다.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손목이 드러났다. 지은의 눈길이 잠깐 거기에 머물렀다. 현우가 돌아서며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책상 위 노트를 정돈했다.

“여기 맞아요?”

“……네.”

현우는 바로 물러서지 않았다. 지은이 고개를 든 뒤에야 한 발 물러났다. 가까이 선 사람의 셔츠에서 옅은 향이 났다. 지난번 식탁에서 그가 잔을 들어 올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술을 마시던 밤에도 느꼈던 거리였지만, 오늘은 밝은 방 안이었다.

“괜히 정리를 방해하는 건 아니죠?”

“아니요. 거의 끝났어요.”

“그럼 잠깐 앉아도 돼요?”

그가 책상 옆 의자에 앉자 지은도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방 안에는 스탠드만 켜져 있었다. 책을 무릎 위에 놓은 현우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이제 정말 지은 씨 방 같네요. 처음에는 뭘 써도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았는데.”

“티가 났어요?”

“조금요.”

지은은 침대 끝 이불을 손끝으로 폈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땐 서랍 하나 여는 것도 망설였는데, 이제는 낡은 물건을 들여놓고 그 앞에서 현우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금은 많이 편해졌어요.”

“그럼 다행이고요.”

지은은 그렇게 말하는 현우의 눈가에 남은 피로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내일도 아침 회의 있으시다면서요. 안 피곤하세요?”

“조금요.”

“그럼 쉬러 가셔야죠.”

“지은 씨랑 이야기하는 게 좋아서요.”

지은은 준비하던 말을 잊었다. 현우는 피곤하다는 말을 번복하지 않았고, 함께 있고 싶다는 말도 돌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바라보자 조용히 눈을 맞췄다.

“저랑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다고요.”

“아직 다 못 했잖아요. 앞으로 더 해 보면 되겠네요.”

지은은 무릎에 놓인 손을 맞잡았다. 대화는 오래된 물건과 대학 시절 이야기로 이어졌다. 현우는 초년생 때 쓰던 업무 수첩을 아직 가지고 있다고 했다. 잘못 판단했던 일들이 적혀 있어서 가끔 펼쳐 본다고. 지은이 옛 과제는 차마 다시 못 보겠다고 하자 그는 그때의 자신에게 너무 엄격한 것 아니냐고 했다.

별다른 결론이 필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지은은 책상 위 스탠드를 오래 쓰게 된 이유를 말했고 현우는 자신이 처음 맡았던 사무실의 창문이 겨울마다 잘 닫히지 않았다고 했다. 지은은 그가 그런 곳에서 일한 적도 있다는 사실이 의외였다.

“처음부터 좋은 사무실에 계셨을 줄 알았어요.”

“저도 처음부터 대표였던 건 아니니까요.”

“그렇긴 하죠.”

지은이 웃자 그도 입가를 느슨하게 풀었다. 현우는 책을 내려놓고 한동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지은은 특별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가 차분하게 귀 기울이고 있다는 게 좋았다. 밖에서는 하루 종일 누군가의 보고를 듣는 사람일 텐데, 여기서는 낡은 스탠드 이야기조차 끝까지 듣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시계를 보기 전까지 알지 못했다.

현우가 시계를 확인하고 일어섰다.

“이제 가 봐야겠네요.”

책상 아래 모아 둔 상자를 집어 들자 지은이 손을 뻗었다.

“제가 내일 버리면 돼요.”

“내려가는 길에 가져갈게요.”

그는 팔에 빌린 책을 끼고 납작한 종이 상자를 들었다. 지은은 그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말리지는 않았다.

“책장이 모자라면 말해요. 자리 같이 봐요.”

“몇 권 더 가져오려고요. 그때 말씀드릴게요.”

현우가 복도로 나가려 하자 지은은 그를 부르고 싶어졌다. 더 앉았다 가라고 하기에는 그가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신 그의 팔에 끼인 책을 가리켰다.

“그거 재미없으면 억지로 끝까지 안 읽으셔도 돼요.”

현우가 문가에서 돌아봤다.

“그럼 저녁 약속도 취소되나요?”

“아니요. 그런 뜻은 아닌데…….”

“다행이네요. 책이 재미없어도 저녁은 같이 먹어요.”

“네. 좋아요.”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지은은 문가에 서 있었다. 발소리가 끊기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왔다. 책상 옆 의자는 현우가 앉았던 방향으로 조금 비껴 있었다. 지은은 등받이에 손을 얹고 의자를 원래대로 밀었다.

스탠드 불빛이 빈 의자 위로 내려앉았다. 지은은 스위치에 손을 가져갔다가 멈췄다. 방금 전 문가에서 돌아보던 현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마디쯤 더 해도 됐을 텐데.

오늘 가져온 물건들은 모두 제자리를 찾았다. 지은은 다시 의자를 빼고 앉았다. 책상 위에서 스탠드가 여전히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