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업무 외 질문
30. 업무 외 질문
지은이 아침 식탁에 앉았을 때 현우는 이미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식탁 한쪽에 며칠 전 그녀가 빌려준 소설이 놓여 있었다. 책갈피가 중간쯤 끼워져 있었다.
“벌써 이렇게 읽으셨어요?”
현우가 책을 내려다봤다.
“잠들기 전에 조금씩 읽었어요. 생각보다 빨리 읽히네요.”
“재미있어요?”
“아직은 지은 씨가 왜 좋아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는 정도요.”
지은은 더 묻지 않았다. 다 읽고 나면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으니 그때 들으면 될 일이었다. 현우는 책을 가방에 넣지 않고 식탁 옆으로 밀어 두었다. 오늘도 집에 돌아와 읽을 모양이었다.
바깥에 차가 들어서는 소리가 났다. 현우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정훈이 도착했을 것이다. 지은도 출근하려고 챙겨 둔 가방을 들었다.
“오늘은 먼저 나가야겠네요.”
“저도 곧 나가요.”
“저녁은 늦지 않게 들어올 것 같아요.”
지은은 알겠다고 답했다. 현우가 현관을 나서고 잠시 뒤 자동차가 멀어졌다. 지은은 잠시 식탁에 남은 책을 바라보다 가방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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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경라이프 사무실에는 오전부터 회의 자료가 오갔다. 신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의 시험 운영안이 다시 조정되고 있었다. 신임 프로젝트 책임자가 비용을 줄인 수정안을 가져왔고, 브랜드전략팀은 그에 맞춰 검증 항목을 정리해야 했다.
“운영 매장을 여섯 곳에서 세 곳으로 줄인답니다. 지역도 다시 골라야 하고요.”
팀장이 화면에 지도를 띄웠다. 지은은 세 곳에 표시된 점포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상권 특성이 서로 비슷했다. 원래 계획에서는 주거지역과 업무지역을 나눠 반응을 비교하도록 했는데, 수정안에는 비용이 적게 드는 점포들만 남아 있었다.
“이대로면 같은 유형의 고객만 보게 돼요.”
“전략기획실에서는 숫자를 단순하게 가져가고 싶은 모양이에요. 판매 전환율하고 건당 수익을 중심으로.”
“시험 운영을 하는 이유가 정식 출시를 결정하기 위해서잖아요. 얼마나 팔렸는지만 보면 왜 팔리지 않았는지는 모릅니다.”
지은은 지난번에 작성한 검토안을 펼쳤다. 당시에는 브랜드 인지도와 상품 선택 이유를 함께 확인하도록 간단한 설문을 붙여 놓았다. 별도의 조사 업체를 부르지 않고도 매장 직원과 온라인 응답으로 확보할 수 있는 항목이었다.
“설문을 전부 살릴 필요는 없어요. 대신 구매 여부와 상관없이 상품을 살펴본 사람의 반응 정도는 남겨야 할 것 같습니다.”
팀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지은에게 회의용 비교표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최종안을 결정하는 건 새 프로젝트 책임자의 몫이었고, 지은은 초기 제안서를 작성한 사람으로서 빠진 검증 항목을 확인하는 역할이었다.
지은은 매장별 예상 방문객과 기존 매출을 비교해 표를 만들었다. 평일과 주말의 고객 구성이 다른 점포들이었다. 표 아래에는 판단에 필요한 전제 조건을 짧게 적었다. 비용 때문에 범위를 줄이더라도 무엇을 확인하지 못했는지는 분명해야 했다.
오후 회의는 태경라이프 본사 열두 층에서 열렸다. 긴 테이블 양쪽에 브랜드전략팀과 영업, 재무 담당자들이 앉았다. 민석은 예정된 시각에 들어와 자료를 받아 들었다. 인사를 마친 뒤 곧바로 수정된 예산표부터 살폈다.
“점포 수를 줄이면 비용은 낮아집니다. 대신 두 달 뒤에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프로젝트 책임자가 운영 계획을 설명했다. 세 곳에서 매출과 마진을 확인하고, 결과가 기준을 넘으면 확대 여부를 검토한다는 내용이었다.
민석은 페이지를 넘겼다.
“확대 여부를 결정하려면 최소한 손익 기준은 있어야죠. 지금처럼 지표를 많이 두면 결과가 좋지 않아도 잘된 항목만 골라서 보고할 수 있습니다.”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지은은 보고서 가장자리에 적어 둔 숫자를 한번 확인하고 손을 들었다.
“판매 실적을 기준으로 삼는 데는 동의합니다. 다만 세 매장 모두 상권이 비슷해서 그 결과만으로 고객층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민석이 고개를 들었다.
“어떤 지표가 더 필요합니까?”
“상품을 살펴본 고객 중 실제 구매한 비율과 구매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별도 예산 없이 기존 설문을 축소하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판매 실적이 기대에 못 미쳐도 상품 자체가 문제인지, 매장과 고객층이 맞지 않았는지 구분할 근거가 생깁니다.”
“직원들이 설문까지 받으면 운영이 늘어지지 않을까요?”
“문항을 두세 개로 줄이고 온라인 응답을 병행하면 됩니다. 응답률이 낮을 가능성은 결과에 함께 표기하고요.”
민석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자료를 한 장 더 넘긴 뒤 영업 담당자에게 시범 매장의 인력 운용을 물었다. 질문이 몇 차례 오갔다. 지은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질지 판단할 수 없었다. 다만 숫자를 늘려 보고서를 그럴듯하게 만들려는 게 아니라, 적은 비용으로도 의미 있는 결론을 얻자는 취지만큼은 분명히 전달했다고 생각했다.
재무 담당자가 질문했다.
“그 설문 결과를 수치로 환산해서 통과 여부에 넣을 계획입니까?”
“아닙니다. 판매 기준을 대신하자는 게 아니라 결과의 원인을 설명하는 자료입니다. 기준에 못 미치면 못 미친다고 보고해야죠. 다만 그때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민석은 이번에는 지은의 말을 끊지 않았다. 그가 페이지 끝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동안 회의실의 환기 장치 소리가 또렷해졌다.
“좋습니다. 판매 실적을 일차 기준으로 두고, 고객 반응은 판단 보조 자료로 정리하죠. 단, 반응이 좋다는 이유로 손익 기준을 바꾸지는 않는 겁니다.”
프로젝트 책임자가 정리 내용을 확인했다. 지은은 수정할 표의 위치에 표시를 남겼다. 회의가 끝나자 사람들이 노트북을 닫고 의자를 밀었다. 지은도 팀장과 함께 나가려는데 뒤에서 민석이 불렀다.
“윤 대리. 잠깐만요.”
팀장이 그녀를 돌아봤다. 지은은 먼저 가시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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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에는 정리하지 않은 물컵 몇 개가 남아 있었다. 민석은 서류를 모아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았다. 복도에서는 다른 회의를 준비하는 직원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오늘 의견은 타당했어.”
참석자들이 모두 나간 뒤에야 말투가 바뀌었다. 지은은 노트북을 가슴께에 안았다.
“수정안은 팀장님 통해서 전달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게 하고. 네가 이 프로젝트 총괄을 안 맡겠다고 했다는 얘기 들었어.”
지은은 그를 바라봤다. 이미 다른 사람이 책임자가 되어 일을 진행하고 있는데 왜 이제 와서 그 일을 묻는지 알 수 없었다.
“제가 맡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거절했어요.”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던 일이잖아. 오늘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책임을 맡는 것과 의견을 내는 건 다르니까.”
민석이 펜을 내려놓았다.
“형이랑 결혼한 뒤로 회사에서 네 입장이 달라진 건 사실이야. 그게 이유라면 말해.”
지은은 잠시 그의 얼굴을 살폈다. 자신이 결정을 내린 배경을 정말 궁금해하는 건지, 이미 정해 놓은 답을 확인하려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현우 씨는 제 업무에 관여하지 않아요.”
“형이 관여하지 않는다고 문제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 네가 만든 자료가 지주사 검토를 거칠 수도 있는데, 그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어?”
그 지적에는 생각해 볼 부분이 있었다. 지은도 결혼 이후 자신의 직장생활이 예전과 같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문제를 판단하는 절차가 따로 있는 것과 민석이 지금 여기서 그녀의 선택을 심문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그런 우려가 있으면 공식적으로 검토하면 돼요. 지금 제 직무나 결재 권한이 바뀐 건 없잖아요.”
“너한테 불이익이 생길까 봐 하는 말이야.”
“그런데 왜 내가 총괄을 거절한 이유부터 물었어?”
민석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잠시 대답을 고르는 사이 복도에서 누군가 회의실 문을 열려다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돌아갔다.
“네가 형하고 결혼한 걸 모르는 사람이 없어. 나하고 어떤 사이였는지도 아는 사람은 알고. 그 상황에서 굳이 이 회사에 남아서 일하려면 생각할 게 많지 않겠어?”
“그래서?”
“다른 데로 옮길 생각은 없었냐는 거야.”
지은은 손에 든 노트북 모서리를 고쳐 잡았다. 몇 주 전 실제로 다른 회사의 채용 면접까지 봤다는 사실을 민석은 몰랐다. 그러나 그에게 그 일을 설명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어디에서 일할지는 내가 결정해. 회의에서 검토 의견을 내는 것까지 불편하다면 그건 네가 해결할 문제고.”
“불편하다고 한 적 없어.”
“그럼 왔으면 일 얘기만 해.”
지은은 자료를 챙겨 회의실을 나왔다. 닫히는 문 뒤로 민석이 부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복도의 환한 조명 아래로 나오자 자신이 꽤 오래 숨을 얕게 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수진과 마주쳤다. 수진은 홍보팀 자료가 담긴 파일을 들고 다른 직원과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먼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진은 지은을 보고 잠깐 말을 멈췄을 뿐이었다. 지은도 고개만 숙여 인사하고 지나갔다. 뒤에서 수진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회사 안에서 달라진 것들은 대부분 이렇게 작은 순간에 드러났다.
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먼저 팀장에게 수정 기준을 공유했다. 프로젝트 책임자에게도 검토 의견을 전달했다. 오늘 회의에서 확정된 것은 매장 수와 측정 방식뿐이었다. 다음 검토까지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민석의 사적인 질문 때문에 그 사실까지 흐려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팀장은 검토표를 받아 들고 빠르게 읽었다.
“회의에서 말 잘했어요. 판매 수치만 보고 나중에 문제 삼는 것도 곤란하니까.”
“표본이 적어서 결론을 크게 내리긴 어려울 거예요. 그 부분도 표시해 놨어요.”
“책임자가 최종안 정리하면 같이 확인합시다.”
지은은 노트북을 열었다. 복도에서 있었던 일과는 별개로, 자신이 제시한 의견이 실제 계획에 반영됐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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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집에 돌아왔을 때 현우는 거실에 있었다. 소파 옆에 놓인 책 위에는 지은이 빌려준 소설이 엎어져 있었다. 지은이 가방을 내려놓는 소리에 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좀 늦었네요.”
“회의 끝나고 정리할 게 있어서요.”
“저녁은요?”
“회사에서 먹었어요.”
그녀는 손을 씻고 돌아와 소파 건너편에 앉았다. 현우는 읽던 페이지에 책갈피를 끼워 놓았다. 지은은 그가 바로 다시 읽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게 조금 고마웠다.
“회사에서 의견이 좀 갈렸어요.”
“어떤 일인데요?”
지은은 시험 운영 매장을 줄이는 문제와 검증 기준을 설명했다. 이야기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표의 모양을 그렸다. 현우는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 듣다가 물었다.
“그럼 지은 씨 의견은 반영됐어요?”
“네. 일부는요. 그것 때문에 기분이 나쁜 건 아니고…….”
말끝이 흐려졌다. 민석과 단둘이 남았던 회의실이 떠올랐다.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사적인 일을 다 아는 사람하고 마주칠 때가 있잖아요. 그게 업무 판단에까지 들어오는 게 싫었어요.”
현우는 금방 이유를 짐작한 듯했다. 그렇다고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부터 묻지는 않았다.
“업무상 지적할 부분이 있었다면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렇지 않은 질문에까지 답할 필요는 없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상대가 그걸 구분하지 않으면 피곤해지네요.”
“그런 일이 반복되면 더 그렇죠.”
현우는 그 말 뒤에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지은도 바로 다음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창밖은 어두웠고 유리에는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지은은 억지로 즐거운 척하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았다.
지은은 쿠션을 무릎 위에 올렸다. 현우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재미있어요?”
“네. 오늘도 조금 읽었어요.”
“이제 거의 다 읽으셨네요.”
“끝나면 저녁 먹기로 했잖아요. 약속이 있으니 마저 읽어야죠.”
지은은 그를 보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오늘 하루 동안 자신이 어떤 문제를 겪었는지 다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이곳에서는 더 말해야 할 의무가 없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질문과 먼저 듣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식탁 쪽에서 시계 초침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현우는 다시 책을 펼쳤지만 조금 전처럼 읽는 데만 집중하지는 않았다. 지은이 물을 마시려고 일어나자 고개를 들었고, 그녀가 돌아와 앉자 책장을 넘겼다. 서로의 움직임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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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전, 브랜드전략팀에 수정 검토 일정이 공유됐다. 시험 운영 자료는 프로젝트 책임자 명의로 제출하고, 지은은 고객 반응 지표의 실무 검토를 맡도록 정리돼 있었다. 전날 회의에서 합의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지은은 일정표를 확인하고 별다른 이견 없이 회신했다. 검토표의 작성자와 최종 보고자가 구분된 것을 확인한 뒤 자료 폴더를 열었다.
그때 메신저 알림이 울렸다. 차민석이었다.
‘윤 대리, 어제 말한 검증 기준은 잘 받았습니다. 다음 회의에서 수치 산정 방식도 설명해 주세요.’
업무 메시지였다. 지은은 필요한 자료를 준비하겠다고 답했다. 이어서 다른 알림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회사 계정이 아닌 개인 휴대전화였다.
‘어제 하던 얘기, 아직 안 끝났어.’
‘형이랑 결혼한 이유, 아직도 나한텐 제대로 말 안 했잖아.’
지은은 화면을 잠시 바라봤다. 회의에서는 실장님이라 부르며 대답했고, 복도에서는 더 이상 사적인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런데 민석은 그 둘을 구분하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