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남은 문제
31. 남은 문제
그렇게 민석이 보낸 문자를 확인하고 휴대폰만 쥐고 있기를 몇 분.
어제 회의실에서도, 복도에서도 같은 질문을 받았다. 답하지 않겠다고 밝혔는데도 민석은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했었다. 정말이지 진절머리가 난다. 그동안 만났던 시간을 후회를 넘어 환멸을 느끼게 만들 만큼.
지은은 답장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말꼬리를 붙잡힐 여지만 늘었다.
‘사적인 질문에는 더 답하지 않을게. 업무와 관련된 내용은 회사 메신저로 연락해 줘.’
전송 버튼을 누르고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이 다시 켜졌지만 확인하지 않았다. 오전에 마쳐야 할 검토표가 있었다.
모니터에는 전날 회의에서 수정한 시험 운영 계획이 열려 있었다. 운영 매장은 세 곳으로 줄었고, 판매 실적을 일차 기준으로 삼되 고객 반응을 보조 자료로 남기는 방향이었다. 지은은 매장별 고객 구성과 예상 응답 수를 다시 대조했다. 상권이 비슷한 점포만 선정됐다는 문제는 남았지만, 결과에 그 한계를 명시하면 됐다.
점심 무렵 팀장이 지은의 자리로 왔다.
“내일 전략기획실에서 실무안을 한 번 더 본대요. 윤 대리도 참석해 줘요. 설문 쪽은 설명할 사람이 필요해서.”
“네. 프로젝트 책임자분께 수정본 먼저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분석 보고서 담당도 다시 정할 모양이에요. 실무팀 의견 듣고 결정하겠지만.”
지은은 화면에 표시된 결재선을 확인했다. 자료가 책임자를 거쳐 보고된다면 회의에 참여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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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회의에는 브랜드전략팀과 새 프로젝트 책임자, 영업 담당자가 참석했다. 민석은 자료를 앞에 놓고 예정된 시간을 넘기지 않겠다는 듯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고객 반응을 보조 지표로 넣는 건 확인했습니다. 다만 실제 운영이 끝난 뒤 보고서 형태까지 정해 놓는 게 낫겠어요.”
프로젝트 책임자가 표본 규모와 결과 집계 방식을 설명했다. 지은이 작성한 검토표는 그 자료의 뒤쪽에 붙어 있었다. 민석은 몇 페이지를 넘기다가 지은에게 물었다.
“이 비교표는 윤 대리가 작성했죠?”
“네. 초기 제안서와 수정안을 대조한 자료입니다.”
“그럼 시험 운영이 끝나고 나오는 분석 보고서도 윤 대리가 맡으면 어떻겠습니까? 처음부터 검증 기준을 잡은 사람이 정리하는 편이 빠를 텐데요.”
회의실에 있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부당한 제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사업 초기부터 관여했다곤 해도, 프로젝트 책임자는 따로 있었다. 분석 보고까지 독자적으로 맡으면 결재선이 모호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검증 항목을 정리하고 분석하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결과 보고서는 프로젝트 책임자님이 총괄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운영 중에 매장이나 조사 방식이 바뀔 수 있어서요. 실무 자료와 최종 판단이 따로 움직이면 나중에 수치를 해석할 때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필요한 부분은 제가 담당하되, 보고 체계는 기존대로 두는 편이 효율적입니다.”
프로젝트 책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업 담당자도 현장 수치의 확인 창구를 하나로 정리하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 민석은 잠깐 지은을 응시하고는 자료에 표시를 남겼다.
“좋습니다. 분석 실무는 윤 대리가 지원하고, 보고서는 프로젝트 책임자 명의로 올리죠. 일정이 늦어지지 않게만 해 주세요.”
회의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동료들은 구내식당 메뉴를 이야기하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지은은 자료를 팀장에게 전달하고 잠시 일층에 내려왔다. 아침부터 마신 커피 때문에 속이 쓰려왔다. 로비 한쪽 편의점에서 물을 사려는데 뒤에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은아.”
민석이었다.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지만 여전히 정돈된 차림이었다. 지은은 걸음을 멈췄다. 직원들이 로비를 가로질러 오갔고, 안내 데스크에서는 방문객의 출입증을 확인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아까 회의에서 한 말 때문에.”
“보고 체계는 정리됐잖아. 왜 여기서 얘길 꺼네는 건데.”
“그건 정리됐지. 그런데 내가 너한테 일을 맡기려고 하면 꼭 경계부터 하는 것 같아서.”
지은은 손에 든 물병을 내려다봤다. 차가운 병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내가 맡을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했어. 책임자가 있는 프로젝트니까 그 절차를 따르자는 거고.”
“네가 예전 같았으면 그렇게까지 선을 긋지는 않았을 텐데.”
그 말이 나오자 지은은 더 이상 업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예전하고 지금이 같을 수는 없지.”
민석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로비 안쪽에서 커피를 들고 나오던 직원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가볍게 인사했다. 민석도 별일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이 멀어진 뒤에야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형이랑 결혼한 뒤로 나한테는 말 한마디도 조심하면서, 회사는 그대로 다니겠다는 게 솔직히 이해가 안 돼.”
“회사를 다니는 데 네 허락이 필요해?”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럼 무슨 뜻인데?”
민석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그는 원래 말을 고르는 데 능숙했다. 회의에서나 사적인 자리에서나 자신에게 불리한 말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네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했다면 이렇게까지 묻지 않았어.”
“그렇겠지.”
“그런데 하필 형이야. 나랑 결혼하려던 사람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형이랑 혼인신고를 했는데,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야 해?”
민석은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 차분하게 이어지던 말투에도 날이 서 있었다. 특히 형을 언급할 때면 유독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지은의 눈에도 보였다. 오래전부터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과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결국 그가 못마땅한 건 자신이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는 사실보다 그 상대가 차현우라는 점인 듯했다.
“네가 아무렇지 않은지는 내 문제가 아니야.”
“지은아.”
“우리 약혼이 왜 깨졌는지는 너도 알고 있잖아. 그 뒤에 내가 누구와 결혼할지는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고.”
민석의 턱이 굳었다. 지은은 그가 화를 내는 편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석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어머니도 그 일 때문에 한동안 고생하셨어.”
그 말에 지은이 움직임을 멈췄다. 민석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말을 덧붙였다.
“결혼식까지 준비하다가 그렇게 됐으니 집안에서도 정리할 일이 많았지. 형이 끼어들면서 더 복잡해졌고.”
“정리할 일.”
지은은 짧게 되뇌었다. 오미경이 자신을 마주 앉혀 놓고 금액을 올리던 순간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삼억 원이었다. 자신이 거절하자 오미경은 오억 원까지 제안했다. 그때도 오미경은 집안에서 벌어진 일을 처리하듯 말했었다.
“네 어머니가 나한테 얼마를 주겠다고 하셨는지 알아?”
민석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봤다.
“무슨 소리야?”
“파혼 문제를 조용히 정리하자면서 돈을 제안하셨어. 처음엔 3억, 나중에는 5억.”
로비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오갔다.
“어머니가 직접?”
“그래.”
“언제?”
“네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셨다면 직접 말씀하셨겠지.”
“그런 제안을 했다는 건 처음 들어.”
“그럴 수 있지. 나도 네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야.”
“그럼 왜 이제 와서 그 얘기를 해?”
“네가 계속 내 선택을 설명하라고 하니까.”
민석이 묻고 싶은 게 많다는 건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은은 오미경에게 들었던 말을 모두 다시 꺼내 놓고 싶지는 않았다.
“돈은 안 받았어. 그때 거절했고, 지금도 그 결정은 같아. 네 어머니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제안을 했는지까지 내가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민석의 시선이 그녀의 손으로 내려갔다. 지은은 반지를 끼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앞에서 그 반지를 의식하는 일이 잦았는데, 이제는 손을 움직일 때마다 확인하지 않았다.
“형은 그 일을 알아?”
“그것도 네가 알아야 할 일이 아니야.”
민석은 얼굴을 찌푸렸다.
“넌 나한테 정말 아무 말도 안 해 주겠다는 거네.”
“해야 할 말은 다 했어.”
“어머니가 그런 말을 했다면 나한테 얘기할 수도 있었잖아.”
지은은 이미 끝난 일을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우리는 이미 끝난 사이였어.”
민석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지은은 물병을 다시 쥐었다.
“내 업무와 관련해서 필요한 얘기가 있으면 회사에서 해. 그 외에는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은아, 잠깐만.”
“나 올라가야 돼.”
지은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몇 걸음 옮겼을 때 민석이 다시 부를 것 같았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안내 데스크 앞에 선 방문객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손에 쥔 물병이 조금 찌그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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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로 돌아온 뒤에도 지은은 한동안 모니터의 숫자에 집중하지 못했다. 3억에서 5억으로 올라가던 금액과, 그 말을 듣던 민석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그는 몰랐다고 했다.
믿기 어려운 말은 아니었다. 오미경은 아들의 일을 대신 처리한다는 생각으로 얼마든지 움직이고도 남았을 사람이니까.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넘긴 지은은 다시 검토표로 눈을 돌렸다. 오후에는 영업팀에서 보낸 매장별 자료를 대조하고, 프로젝트 책임자에게 수정된 설문 항목을 전달해야 했다.
지은은 밀린 업무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적어도 회사를 그만둘 이유를 민석에게서 찾을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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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반기는 건 정적이었다. 지은은 옷을 갈아입고 저녁을 먹은 뒤 거실에서 책을 펼쳤다. 페이지를 두어 장 넘기자 현관문이 열렸다. 정훈의 목소리가 잠깐 들리고, 곧 문이 닫혔다.
거실에 있던 지은을 본 현우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먼저 왔네요.”
“네. 저녁은 먹었어요.”
“잘했어요. 저는 밖에서 먹고 왔어요.”
그는 넥타이를 풀어 느슨하게 늘어뜨린 채 지은 맞은편에 앉았다. 곁에 놓인 소설을 보더니 표지를 손끝으로 눌렀다.
“거의 다 읽었어요. 마지막 부분만 남았네요.”
“생각보다 빨리 읽으셨네요.”
“금요일 저녁은 어때요? 약속했던 식사요.”
지은은 머릿속으로 일정을 떠올렸다. 금요일에는 늦게까지 남을 일이 없었다.
“좋아요.”
“그럼 장소는 제가 알아볼게요. 지은 씨가 싫어하는 음식은 없죠?”
“너무 매운 것만 아니면 돼요.”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은은 그가 일정부터 묻고, 자신이 괜찮다고 하자 그다음 일을 정하는 방식이 좋았다. 오늘 로비에서 들었던 말과는 방향이 달랐다. 현우는 왜 약속을 받아들이는지 묻지 않았다.
“오늘 회사는 어땠어요?”
“회의가 있었어요. 자료는 잘 정리됐고요.”
“다행이네요. 그래도 지은 씨 일은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네요.”
더 이어질 질문을 기다리던 지은은 현우가 책을 집어 드는 것을 봤다. 굳이 말하지 않은 부분을 캐묻지 않는 것도 이제는 익숙했다. 지은은 소파에 조금 더 깊숙이 등을 기댔다.
현우가 소설의 뒷장을 살피더니 말했다.
“아직 결말을 안 봤으니까 스포일러는 하지 말아요.”
“제가 먼저 얘기한 적 없거든요.”
“표정으로 알려줄 수도 있잖아요.”
“그럼 책 보실 때 안 쳐다볼게요.”
지은이 읽던 책으로 눈길을 내리자 현우가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 마주 앉아 있는 동안 하루 종일 남아 있던 불편함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낮은 음악이 흐르는 동안 현우는 책장을 넘겼고, 지은도 읽다 만 문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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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지은은 출근 준비를 마치고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업무 메신저에는 신규 브랜드 검토 자료에 대한 짧은 답변이 와 있었다. 프로젝트 책임자가 수정안을 승인했고, 다음 주 실무 일정도 정리됐다는 내용이었다. 지은은 확인 표시를 남겼다.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출근 시간이라 받지 않으려다, 몇 초 뒤 다시 같은 번호가 울리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윤지은 씨죠?”
낯익은 목소리였다. 지은은 현관 앞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저 오미경이에요.”
지은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오미경이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민석이한테 이야기는 들었어요. 우리 한번 봐야겠네요.”
지은은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서 있었다. 어제 로비에서 민석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일을 이제 와서 다시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이야기로 뵙자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니에요.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오미경은 일방적으로 장소를 정하거나 당장 나오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지은이 대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 침묵이 더 신경 쓰였다.
“생각해 볼게요.”
“그래요. 오늘 중으로 연락 줘요.”
통화가 끝났다. 지은은 화면을 내려다봤다. 집 안에서는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현관 아래에는 출근할 때 신는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휴대전화에 방금 걸려 온 번호가 남아 있었다. 지은은 저장하지 않은 채 가방 안에 넣었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다시 짧은 알림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에서 온 문자였다.
‘지난번 제안에 관해서도 정리할 말이 있어요.’
지은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오미경이 이미 거절한 일을 왜 다시 꺼내려는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