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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없던 일로

완벽한 파혼을 위하여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32. 없던 일로

점심 전, 지은은 오미경에게 짧게 답장을 보냈다.

‘오늘은 퇴근 후에만 시간 낼 수 있습니다. 만나신다면 회사 근처에서 뵙겠습니다.’

답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미경이 호텔 레스토랑의 주소를 보냈다.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고, 약속 시간은 일곱 시였다.

현우의 연락처를 찾아보던 지은은 잠시 망설였다. 오미경이 자신을 따로 불렀다는 걸 남편에게 숨길 이유는 없었다.

점심시간에 현우에게 전화하자 몇 차례 신호가 간 뒤 그가 받았다.

“지은 씨, 점심 먹었어요?”

“아직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오미경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말에 현우는 잠시 조용해졌다. 지은은 민석이 결혼 문제를 거듭 물었고, 그 과정에서 오미경의 금전 제안까지 언급했다고 설명했다. 당시에는 자신이 거절한 일이라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다고도 덧붙였다.

“5억을요?”

“처음엔 3억이었어요. 제가 거절하니까 그 자리에서 바로 금액을 올리셨고요.”

“오늘 만나기로 했어요?”

“네. 그냥 넘어가면 연락이 계속 올 것 같아서요. 제가 직접 이야기하고 끝내려고요.”

“알겠어요. 끝나고 연락 줘요. 제가 데리러 갈게요.”

“늦게 끝나실 텐데 괜찮겠어요?”

“저도 저녁 일정이 있어요. 그쪽으로 가는 건 어렵지 않아요.”

---

퇴근 뒤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유리문 너머의 레스토랑에 불이 켜져 있었다. 홀에서는 잔잔한 피아노 연주가 흘렀고, 직원들은 낮은 목소리로 손님을 안내했다. 지은은 예약자 이름을 말하고 안쪽 자리로 향했다.

오미경은 먼저 와 있었다. 짙은 색 재킷에 작은 진주 귀걸이를 한 모습이 지난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은이 다가가자 찻잔을 내려놓았다.

“바쁜데 나와 줘서 고마워요.”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내일도 출근해야 해서요.”

오미경은 미소를 유지한 채 메뉴판을 밀어 줬다. 지은은 간단한 식사를 골랐다.

음식이 나오기까지 오미경은 회사 일은 어떤지, 결혼생활에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물었다. 지은은 필요한 만큼만 대답했다. 태경라이프의 내부 사정을 자세히 꺼낼 생각도, 현우와의 사생활을 설명할 생각도 없었다.

접시가 놓이고 직원이 물러간 뒤에야 오미경이 본론을 꺼냈다.

“민석이한테 들었어요. 내가 예전에 돈을 제안했던 일을 얘기했다면서요.”

“네. 말했습니다.”

“그 애가 그러더군요. 오억이라고.”

오미경은 포크를 내려놓고 지은을 바라봤다.

“그때는 상황을 더 키우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겠다고 판단했어요. 혼사가 깨졌고, 관련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저는 받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알아요. 그 결정은 존중했어요. 그런데 지난 일을 이제 와서 민석이에게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지은은 냅킨을 무릎 위로 고쳐 놓았다.

“민석 씨가 제 결혼에 관해 계속 질문했습니다. 그만해 달라고도 여러 번 이야기했고요.”

“민석이가 연락을 해요?”

“업무 외적인 연락을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어요. 그런데도 어제까지 제 선택을 설명하라고 했습니다.”

오미경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들에게서 어느 정도까지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대목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민석이와는 내가 이야기해 보죠. 하지만 이 집안에 들어온 이상 지은 씨도 조금은 신중하게 행동해 줬으면 해요.”

“어떤 부분에서요?”

“그날 금전적인 제안이 오갔다는 사실이 회장님 귀에까지 들어가면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수 있잖아요. 당시 일은 내가 판단해서 처리하려던 거예요. 현우도 민석이도 나서서 다툴 일이 아니고요.”

지은은 오미경이 원하는 답을 알아차렸다. 그날의 제안을 파혼 정리 차원으로 받아들이고, 앞으로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저는 그 일을 외부에 알릴 생각이 없어요.”

“그럼 서로 없었던 일로 하면 되겠네요.”

“없었던 일은 아니죠.”

오미경이 지은을 보았다.

“받지 않았다고 해서 제안을 받은 사실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다만 그 일로 누구에게 돈을 요구하거나 문제를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지은 씨가 현우하고 결혼하지 않았다면 나도 이런 이야기를 다시 할 필요가 없었겠죠.”

지은은 물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아무렇지 않게 덧붙인 그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제 결혼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씀이세요?”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일은 아니죠. 형제 사이가 어떻다는 건 지은 씨도 알잖아요. 민석이가 마음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것도 이해해 줬으면 해서 그래요.”

“민석 씨와 제 약혼이 끝난 이유도 알고 계시잖아요.”

오미경은 대답 대신 냅킨을 가볍게 접었다.

“안다고 해서 모두가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이런 사정이 있으니 회장님 앞에서까지 지난 얘기를 꺼내지만 않으면 됩니다. 현우에게도 굳이―”

“현우 씨한테는 이미 말했어요.”

순간 테이블 위로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오늘 오기 전에요. 남편에게까지 그 일을 감출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오미경의 미간이 순간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곧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어머니가 제안하신 돈은 받지 않았고, 앞으로 받을 일도 없어요. 그렇지만 누구에게 어떤 사실을 이야기할지는 제가 결정할 문제예요. 제 결혼을 두고 계속 조심하라는 말씀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오미경은 물잔을 잡았다. 식어 가는 음식 옆으로 직원이 빈 접시를 치우러 다가왔다.

“지은 씨, 내가 지금 협박이라도 하는 것처럼 들려요?”

“그렇게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말마다 선을 긋는군요.”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테이블 옆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제가 너무 늦었나요?”

고개를 든 지은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현우였다.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한 그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안내 직원을 뒤로 물린 뒤, 마치 처음부터 이 자리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던 사람처럼 태연하게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

먼저 반응한 건 오미경이었다. 아들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줄곧 여유를 잃지 않던 표정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 네가 여긴 어떻게 왔니?”

현우는 먼저 지은과 눈을 맞췄다. 그녀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오미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태경에서 일어난 일 중에서 제가 모르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농담처럼 건조한 어조였지만 오미경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그게 무슨……?”

“지은 씨한테 들었어요. 오늘 어머니를 만난다는 것도요.”

현우는 빈 의자를 한번 바라보더니 오미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합석해도 될까요?”

묻는 말투는 정중했지만, 허락을 구하는 눈은 아니었다. 오미경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지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앉으세요.”

현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가 의자를 당기려 하자 오미경이 뒤늦게 말을 꺼냈다.

“현우야. 오늘은 지은 씨랑 둘이 얘기할 게 있어서 부른 거야.”

“알아요. 그런데 지은 씨는 제 아내잖아요. 남편이 아내와 같이 앉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니죠.”

그는 개의치 않고 지은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미경의 굳어진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직원을 불러 물을 부탁했다.

맞은편에 앉은 오미경은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약간 벙찐 모습으로 지켜봤다.

“그럼 지난번 일도 들었겠네.”

“네. 오늘 처음 들었어요.”

“그때는 민석이 혼사가 갑자기 깨진 상황이었어. 내가 어떻게든 조용히 마무리해 보려고 했던 거고.”

“지은 씨가 거절했다면서요.”

“그래. 그러니 이미 끝난 일이야.”

“그럼 오늘 다시 부르실 이유도 없었겠네요.”

오미경의 손가락이 잔의 손잡이에 닿았다.

“끝난 일을 꺼내고 다니면 집안에 불필요한 말이 돌 테니까. 그걸 조심해 달라는 이야기였어.”

“지은 씨가 먼저 꺼내고 다닌 일은 아니에요. 민석이가 물었고, 사실대로 대답한 거죠.”

“네가 민석이하고 지은 씨 사이의 일까지 다 안다고 생각해?”

“모르는 부분이 있겠죠. 그런데 모르는 일까지 제가 대신 판단할 생각은 없어요.”

현우는 물잔을 내려놓았다. 오미경의 말을 기다리는 표정에는 조급함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요. 지은 씨가 거절한 제안을 가지고 다시 조심하라는 말을 듣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제게 알려지면 곤란할 일이라면, 처음부터 그런 제안을 하지 않으셨어야죠.”

오미경은 그를 바라봤다. 잠깐 굳어진 표정에는 당혹감보다 불쾌함이 더 가까웠다.

“내가 너희 둘을 갈라놓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 너무 심하구나.”

“그렇게 받아들이셨다면 죄송해요. 그렇지만 지은 씨한테 하실 말씀은 제가 있는 자리에서도 하셔도 됩니다.”

지은은 곁에 놓인 현우의 손을 봤다. 테이블 위에 편히 올린 손이었다. 그가 오미경을 바라보는 동안 자신을 돌아볼 때만큼은 목소리가 부드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도 더 말씀드릴 건 없습니다.”

지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미경이 그녀를 봤다.

“오늘 만나자고 하신 이유는 들었어요. 저는 돈을 받지 않았고, 누구한테도 다른 설명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입을 다물겠다고 약속할 수도 없어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오미경은 더는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지 않은 접시를 보다가 냅킨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알겠어요. 내 뜻은 충분히 전한 것 같네요.”

그녀는 지은을 향해 눈을 돌렸다.

“앞으로는 이런 일로 따로 만날 필요 없겠죠.”

“네. 저도 그랬으면 합니다.”

현우는 오미경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함께 일어났다. 먼저 나가겠다는 그녀에게 인사했고, 직원이 안내하는 동안 다시 앉지 않았다. 오미경의 뒷모습이 레스토랑 입구 너머로 사라진 뒤에야 지은을 돌아봤다.

“식사는 다 했어요?”

“네. 거의요.”

현우는 지은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가 수저를 내려놓자 그제야 물었다.

“그럼 갈까요?”

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현우가 계산을 마치는 동안 그녀는 가방 끈을 고쳐 맸다. 두 사람이 함께 출입문을 나서자 복도 끝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

차는 호텔 지하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정훈이 운전석에서 내려 뒷문을 열어 줬다. 현우가 먼저 지은이 타는 것을 확인하고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까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앞쪽에서 잔잔한 라디오 소리가 들리다가 정훈이 볼륨을 줄였다.

“제가 연락드린 시간보다 일찍 오셨네요.”

지은이 먼저 말을 꺼냈다. 현우는 재킷 단추를 풀었다.

“일이 예상보다 빨리 끝났어요. 문자 보냈는데 못 봤죠?”

지은이 휴대전화를 확인하자 약 십 분 전에 온 메시지가 있었다.

‘근처에 도착했어요. 나오기 전에 알려 줘요.’

대화에 집중하느라 알림을 놓친 모양이었다.

“못 봤어요. 죄송해요.”

“괜찮아요. 밖에서 기다리다가 아직 자리에 계신 걸 봤어요.”

지은은 창밖으로 물러나는 건물들을 봤다. 조금 전 현우가 빈 의자를 당겨 앉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까는 좀 놀랐어요.”

“들어가지 말 걸 그랬어요?”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말을 고르는 동안 현우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렇게 태연하게 앉으실 줄은 몰랐어요.”

“지은 씨가 괜찮다고 했잖아요.”

지은은 그의 얼굴을 돌아봤다. 오미경이 앞에 있었을 때도 현우는 그녀에게 앉아도 되는지 먼저 물었다. 자신이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는 현우 씨가 오실 줄 몰랐을 거예요.”

“그랬겠죠.”

“태경에서 모르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셨으면서요.”

그가 짧게 웃었다.

“오늘 일은 지은 씨가 알려줬잖아요.”

지은도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현우는 굳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척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다만 오미경 앞에서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던 모양이었다.

“고마웠어요.”

“뭐가요?”

“제가 했던 말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신 거요.”

“지은 씨가 이미 대답했더라고요. 저는 그 말에 동의한 것뿐이에요.”

창밖으로 신호등의 붉은 불빛이 지나갔다. 지은은 손가락에 낀 반지를 가만히 만졌다. 오늘 오미경에게 들었던 말보다, 그 옆에 앉아 있던 현우의 목소리가 더 오래 남을 것 같았다.

차가 집 앞에 멈췄을 때 정훈이 문을 열어 주었다. 현우는 먼저 내린 지은과 나란히 현관 쪽으로 걸었다. 마른 바람에 정원수의 잎이 바스락거렸다.

“참, 금요일 저녁은 그대로죠?”

현우가 물었다. 지은은 걸음을 늦췄다. 그와 함께 식사하기로 한 건 오미경의 연락을 받기 전부터 정한 약속이었다.

“네. 그대로예요.”

“책은 다 읽었어요. 얘기할 것도 좀 생겼고요.”

“그럼 제가 질문부터 해도 되겠네요.”

“뭘 물어보려고요?”

“그건 금요일에요.”

현우가 웃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지은은 그의 뒤를 따라 들어섰다. 오늘 저녁의 대화는 불편했지만, 금요일에 나눌 이야기를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현우가 복도 조명을 켰다. 지은은 구두를 벗으며 그에게 먼저 물었다.

“금요일엔 몇 시에 만날까요?”

현우가 그녀를 돌아봤다.

“지은 씨가 편한 시간에요.”

“그럼 퇴근하고 바로 가요.”

말을 마친 뒤에야 지은은 자신이 다음 약속을 서두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현우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옷을 벗어 놓으러 가는 내내 웃음기를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