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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뜻밖의 재회

완벽한 파혼을 위하여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4. 뜻밖의 재회

오전 8시 50분. 태경그룹 사옥 12층 브랜드전략팀 사무실.

지은은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잠을 설친 탓에 눈이 뻑뻑했지만, 오늘 오전까지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었다.

사무실에서는 평소처럼 전화벨과 키보드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동료들은 그녀의 파혼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때, 사내 공지 메일이 도착했다.

[긴급] 태경홀딩스 대표이사 주재 신규 브랜드 사업 최종 점검 회의 건

지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발신처는 전략기획실이었다.

원래 신규 브랜드 출시 전략안은 전략기획실장인 차민석이 홀딩스 경영진에게 서면으로 보고하고 승인을 받는 절차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공지 내용에 따르면, 홀딩스 측의 요구로 금일 오전 10시 30분 태경그룹 사옥 20층 대회의실에서 대면 보고 회의가 개최된다는 것이었다.

회의 참석자 명단을 내려다보던 지은의 손가락이 순간 멈칫했다.

- 주재: 태경홀딩스 대표이사 차현우

- 참석: 전략기획실장 차민석, 브랜드전략팀 실무 책임자 윤지은 대리 외

차현우.

태경그룹 회장의 장남이자, 차민석의 이복형. 그리고 태경홀딩스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최고경영자.

지은은 모니터에 적힌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차현우는 개인적으로 거의 모르는 사람이었다. 민석과 5년을 만나면서 가문 행사나 명절 때 멀찍이서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였다. 서늘한 인상에 말수가 적었고, 아버지가 참석한 자리에서도 좀처럼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지방 출장 중이라고 들었는데, 갑자기 회의를 직접 주재한다고?’

민석의 어머니에게까지 파혼 소식이 전해졌으니 현우 역시 알고 있을지 몰랐다. 다만 그것과 이번 회의가 관계있을 거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지은은 기획서 부록과 세부 데이터 파일을 다시 점검했다. 어차피 이 전략안의 처음부터 끝까지 제 손으로 직접 작성한 자료였다. 차민석이 총괄 책임자로 보고하는 상황이었지만, 실무 내용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 상세하게 설명할 자신이 있었다.

*  *  *

오전 10시 25분, 태경그룹 사옥 20층 대회의실.

유리창 너머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회의실에는 이미 홀딩스 측 임원들과 실무자 몇 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은은 차민석과 함께 대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민석은 말끔한 슈트 차림이었지만, 평소보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는 지은을 흘끗 바라보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오늘 보고, 내가 주도해서 발표할 거니까 넌 질문 나올 때 데이터만 잘 보조해.”

지은은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숙였다. 발표를 맡은 사람이 민석이라는 사실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회의실 안쪽 중앙에 차현우가 앉아 있었다.

짙은 네이비색 슈트를 입은 그는 참석자들이 들어오는 동안에도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단정하게 넘긴 머리와 깔끔한 옷차림은 몇 차례 가족 모임에서 마주쳤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민석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차현우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앉으세요. 시간이 없으니 바로 시작하죠.”

현우는 참석자들이 자리에 앉자 곧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잠시 차민석을 지나쳐 그 옆에 앉은 지은에게 닿았다.

지은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현우는 다른 참석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짧게 인사를 받은 뒤 자료로 시선을 돌렸다.

“전략기획실 보고부터 듣겠습니다.”

보고가 시작되었다. 차민석은 준비해 온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화면에 띄우고 특유의 사교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발표를 이어나갔다. 신규 브랜드의 시장성, 브랜드 이미지, 예상 매출 목표 등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현우는 별다른 반응 없이 자료를 살펴보았다. 그러다 민석의 발표가 끝나자 서류 한쪽에 표시해 둔 부분을 짚었다.

“잘 들었습니다, 차 실장. 그런데 몇 가지 확인할 부분이 있네요.”

현우는 화면에 띄워진 유통 전략 페이지를 바라보았다.

“예상 매출 규모에 비해 초기 유통망 확보 예산이 낮게 책정되어 있습니다. 주 타깃층으로 설정한 2030 세대의 소비 패턴과 제안된 오프라인 매장 입지 조건도 조금 맞지 않는 것 같고요. 이 부분부터 설명해 주시겠어요?”

민석은 잠시 자료를 확인했다.

“아…… 그 부분은 저희가 초기 마케팅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온·오프라인 믹스 전략을 취하다 보니 예산이 낮아진 측면이 있습니다. 오프라인 매장은 그룹 계열 유통망을 우선적으로 이용할 계획이라…….”

“계열사 유통망을 이용해도 비용은 발생합니다. 입점 수수료나 매장 운영비가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현우가 서류를 한 장 넘겼다.

“온라인 판매 비중을 높이겠다는 건 알겠는데, 그에 따른 고객 확보 비용은 어디에 반영했죠?”

민석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세부 마케팅 예산에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정확한 산출 근거는 실무 쪽에서 확인을…….”

“그럼 작성 담당자에게 직접 듣죠.”

현우는 민석 옆에 앉아 있던 지은을 바라보았다.

“윤지은 대리.”

지은은 허리를 바로 폈다.

“네, 대표님.”

“기획서 작성에 참여했다고 들었습니다. 방금 질문한 부분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어요?”

“대표님, 윤 대리는 실무 지원을 담당한 친구라 전체적인 전략 맥락은 제가…….”

“차 실장.”

현우가 민석의 말을 끊었다.

“일단 윤 대리 설명부터 듣죠. 관련 자료를 직접 검토한 사람인 것 같으니까.”

차민석은 입을 다물었다.

현우의 시선이 다시 지은에게 향했다.

지은은 태블릿 PC를 켜고 관련 페이지를 화면에 띄웠다.

“설명드리겠습니다, 대표님. 초기 유통망 예산이 낮게 책정된 것은 계열사 혜택 때문이 아닙니다.”

지은은 화면에 표시된 수치를 가리켰다.

“기존 오프라인 매장 중심의 출점 방식 대신 자사 온라인몰을 통한 D2C, 즉 소비자 직접 판매 비중을 60퍼센트까지 높이는 방식으로 설계했습니다. 오프라인 매장은 처음부터 대규모로 확보하지 않고, 팝업스토어 세 곳을 한시적으로 운영해 고객 반응을 확인한 뒤 입점 지역을 선정할 계획입니다.”

현우는 지은이 가리킨 페이지를 확인했다.

“그렇다면 온라인 신규 고객을 확보하는 비용도 그만큼 중요해지겠군요. 전환율은 어떤 기준으로 계산했습니까?”

“기존 온라인몰 회원 데이터를 기준으로 추정했습니다. 다만 신규 유입 고객과 기존 회원의 구매 전환율은 따로 계산했고요. 부록 B에 산출 근거가 있습니다.”

지은은 관련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기존 회원의 구매 이력과 신규 고객 대상 사전 조사 결과를 분리해서 적용했습니다. 신규 고객 확보 비용은 유사 브랜드의 집행 사례를 참고했고요.”

현우는 잠시 자료를 살펴보더니 펜으로 한 부분을 표시했다.

“산출 방식은 이해했습니다. 다만 신규 브랜드라면 기존 회원의 구매 전환율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겠어요. 신규 고객 확보 비용을 조금 더 보수적으로 잡는 게 좋겠습니다.”

“네. 그 부분은 저도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아요. 수정할 때 그 근거도 함께 첨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어서 오프라인 팝업스토어 입지와 경쟁사 대비 차별화 전략에 관한 질문이 나왔다.

지은은 사전 조사에서 확인한 고객의 생활권과 방문 목적을 설명하고, 입지 선정 기준을 보완할 필요가 있는 부분도 짚었다. 현우는 중간중간 추가 질문을 던졌고, 지은은 필요한 자료를 찾아 답했다.

약 5분간의 질의응답이 끝나자 현우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설명 잘 들었습니다.”

그는 지은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실무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시네요. 오늘 말씀드린 부분만 보완해서 다시 제출해 주세요.”

“네, 대표님.”

지은은 고개를 숙였다.

민석은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자신이 답하지 못한 질문에 지은이 막힘없이 설명했다는 사실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은은 더 이상 그쪽을 신경 쓰지 않았다. 현우가 표시한 수정 사항을 빠짐없이 메모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  *  *

오전 11시 30분, 회의가 종료되었다.

“오늘 지적한 신규 고객 확보 비용과 팝업스토어 입지 선정 근거를 보완해서 이번 주 안으로 다시 올리세요.”

차현우가 회의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참석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태경라이프 측을 향해 덧붙였다.

“그리고 차 실장.”

“네, 대표님.”

“앞으로 홀딩스에 제출하는 기획서에는 총괄 책임자뿐 아니라 실무 책임자도 함께 기재하세요. 후속 검토 과정에서 작성 담당자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민석의 표정이 굳었다.

“……알겠습니다.”

현우는 더 설명하지 않고 서류를 챙겼다.

지은은 자신의 태블릿과 자료를 정리하며 방금 들은 말을 떠올렸다.

태경라이프에서 5년을 일하는 동안 상급자가 최종 보고를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보고서에서 자신의 이름까지 빠져 있었다.

현우가 그것을 알고 지적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앞으로는 자신이 작성한 자료에 실무 책임자로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됐다.

그 사실이 조금 후련했다.

회의실을 나서던 지은은 복도에서 홀딩스 측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현우를 발견했다.

그가 고개를 돌리면서 잠시 시선이 마주쳤다.

“윤 대리.”

“네, 대표님.”

“오늘 설명 도움이 됐어요.”

“감사합니다.”

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정본도 잘 부탁해요.”

“네. 기한 맞춰 제출하겠습니다.”

그는 짧게 인사를 마친 뒤 직원과 함께 복도 안쪽으로 걸어갔다.

지은 역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오후 2시, 청담동의 조용한 골목길에 위치한 ‘갤러리 모네’.

오후 반차를 낸 지은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프라이빗 룸 안으로 들어갔다. 벽면에는 고가의 작품 몇 점이 걸려 있었고, 중앙 테이블에는 찻잔 두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미경 여사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차민석의 친모이자 태경그룹 회장의 재혼한 아내.

“오느라 고생했다. 앉으렴.”

오미경은 지은에게 자리를 권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차를 내왔지만, 그녀가 앉기도 전에 본론부터 꺼냈다.

“그래. 민석이한테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두 사람이 예식을 3주 앞두고 큰 다툼이 있었다던데.”

오미경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찻잔을 내려놓았다.

“민석이가 철이 없어 쓸데없는 짓을 저지른 모양이다만, 윤 대리도 알잖아. 결혼을 앞두고 남자가 잠시 실수할 수도 있는 일이고. 박 대리 건은 지방 지사 발령으로 정리하도록 했으니 이제 그만 마음을 풀렴.”

지은은 잠시 오미경을 바라보았다.

네 달 동안 가장 친한 친구와 외도를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이 정도 반응이라니. 적어도 아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는 듯했다.

“여사님.”

지은은 찻잔에 손을 대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단순한 다툼이 아닙니다. 저는 차민석 실장과의 혼담을 완전히 철회했으며, 파혼했습니다.”

오미경은 지은을 잠시 바라보았다.

“윤 대리. 청첩장까지 돌린 결혼이야. 그룹 임원들과 외부 인사들이 다 알아. 네 사적인 감정으로 우리 가문의 체면과 그룹의 신뢰를 짓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제 인생이 걸린 문제입니다. 결혼을 계속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

미경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도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며느리 삼을 생각은 없어. 대신 정리할 건 확실하게 정리해야겠구나.”

오미경이 가방에서 인쇄된 서류 한 봉투를 꺼내 지은의 앞으로 밀었다.

합의서.

“읽어보렴. 너희가 결혼 준비 과정에서 지출한 모든 비용은 민석이 명의로 전액 보상해 주마. 거기에 네 마음고생에 대한 위로금으로 3억을 더 얹어주고. 적은 돈은 아닐 거야.”

지은은 서류를 집어 들고 천천히 조항들을 읽어 내려갔다.

1번과 2번 조항은 예상했던 내용이었다.

차민석과 박수진의 외도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을 것. 파혼 사유는 성격 차이와 양가의 결혼관 차이로 설명할 것.

지은은 그 부분을 읽으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 역시 사생활을 세상에 공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서로 합의해서 조용히 관계를 끝낼 수 있다면 그편이 나았다.

하지만 4번 조항에 이르렀을 때 손가락이 멈췄다.

[제4조] 본 파혼은 신부 윤지은의 개인적 사유 및 변심으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며, 신랑 차민석에게는 혼인 파기에 대한 어떠한 귀책사유도 없음을 확인한다.

앞에서는 성격 차이로 합의했다고 발표하자더니, 정작 합의서에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변심하여 파혼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여기에 서명하면 민석의 외도를 문제 삼기는커녕 파혼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까지 인정하는 셈이었다.

지은은 서류를 내려놓고 오미경에게 돌려주었다.

“서명할 수 없습니다.”

“돈이 부족해서 그러니? 5억까지는 맞춰줄 수 있다.”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은이 합의서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제4조를 보시면 파혼이 제 개인적인 변심 때문에 발생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차민석 씨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도 적혀 있고요.”

“그래서?”

“사실과 다르잖아요.”

지은은 합의서를 오미경 앞으로 조금 더 밀었다.

“저는 외도 사실을 외부에 알릴 생각이 없습니다. 서로 합의해서 조용히 끝내자는 조건도 이해할 수 있고요. 하지만 제가 잘못해서 파혼한 것처럼 서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오미경은 잠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윤 대리.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게 네 생각대로만 되는 건 아니야. 서로 좋게 끝내려면 어느 정도 양보할 줄도 알아야지.”

“제가 하지 않은 잘못까지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이 정도까지 이야기했는데도 생각이 같니?”

“네.”

“회사생활은 계속할 생각이고?”

지은은 그 질문에 잠시 말을 멈췄다.

“그건 제 일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래. 민석이가 그 회사 실장이지. 너도 그 아래서 일하고 있고.”

오미경은 느긋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앞으로 얼굴 마주칠 일도 많을 텐데, 서로 불편해서야 되겠니? 지금처럼 일을 크게 만들면 네가 곤란한 상황도 생길 수 있다는 건 생각해야지.”

이미 민석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에는 그의 어머니까지 나서서 회사생활을 언급하고 있었다.

“회사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만약 부당한 불이익이 생긴다면 그때 대응할 거고요.”

오미경은 잠시 지은을 바라보았다.

“그래. 두고 보자꾸나.”

지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미경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차 잘 마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로 부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은은 프라이빗 룸의 문을 열고 나갔다.

*  *  *

오후 3시 30분.

갤러리를 나온 지은은 청담동 거리를 걸었다.

오미경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었다.

차민석은 이미 회사에서 지은의 업무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협박했다. 그의 어머니도 비슷한 말을 했다.

실제로 어떤 불이익이 생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지.’

지은은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입사 5년 차였다. 그동안 준비한 사업도 있었고, 앞으로 쌓아야 할 경력도 남아 있었다. 차민석과 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먼저 회사를 나갈 생각은 없었다.

오전에 있었던 홀딩스 회의가 떠올랐다.

자신이 작성한 자료를 제대로 검토하고, 세부적인 내용까지 질문했던 차현우.

그가 민석의 이복형이라는 사실만 아니었다면 특별히 기억에 남을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지은은 횡단보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때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사내 이메일 알림이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지은의 눈이 커졌다.

발신: 태경홀딩스 대표이사 비서실

수신: 브랜드전략팀 윤지은 대리

[제목: 신규 브랜드 출시 전략안 관련, 원본 작성 자료 및 실무 데이터 제출 요청의 건]

지은은 황급히 메일을 열었다.

오전에 진행한 신규 브랜드 사업 검토와 관련하여 추가 자료 제출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태경홀딩스 차현우 대표이사님의 검토 지시에 따라, 금일 보고된 '신규 브랜드 출시 전략안'의 최초 작성본과 주요 수정 이력, 세부 타당성 검토 데이터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해당 자료는 사내 공식 문서관리시스템을 통해 제출해 주시기 바라며, 기존 최종 보고서와 구분하여 최초 작성 담당자 및 수정 이력을 확인할 수 있도록 정리 부탁드립니다.

최종 보고서가 아니라 최초 작성본과 수정 이력을 제출하라는 요청이었다.

전날 보고서에서 자신의 이름이 빠져 있던 일이 떠올랐다.

현우가 왜 이런 자료를 요구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전 회의에서 설명한 수치의 산출 과정을 검토하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은이 처음 작성한 자료부터 최종 보고서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이 모두 확인된다는 것.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메일을 닫았다.

지금 당장 회사에 돌아가 원본 파일부터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