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지워진 이름
5. 지워진 이름
모니터 오른쪽 하단에 뜬 사내 문서관리시스템의 알림을 확인하던 지은은 마우스를 움직였다.
태경홀딩스 대표이사 비서실에서 승인된 공식 자료 제출 요청서. 대상은 지은이 지난 3개월간 공들여 기획한 ‘신규 브랜드 출시 전략안’의 최초 기획서 및 버전별 수정 이력, 타당성 검토 데이터 일체였다.
지은은 서버 내부의 폴더를 따라 들어갔다. 최종 보고서 파일 위로 날짜와 버전별로 정리된 파일 목록이 나타났다.
`[Ver 1.0_최초_담당자: 윤지은 대리]`
`[Ver 2.3_1차 검토_담당자: 윤지은 대리]`
`[Ver 3.1_전략기획실 전달_담당자: 윤지은 대리]`
`[Ver 4.0_최종 보고_담당자: 차민석 실장]`
Ver 3.1까지 실무 담당자로 기재되어 있던 윤지은의 이름은 홀딩스로 올라간 최종 보고서에서 빠져 있었다. 보고서 표지에는 총괄 책임자인 차민석의 이름만 남아 있었다.
지은은 화면을 잠시 바라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약혼자의 성과이자 그가 가문 내에서 입지를 다지는 발판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묵인했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렇다고 정해진 업무 절차를 건너뛸 이유는 없었다. 지은은 홀딩스의 요청 내용을 확인한 뒤 직속 상관인 브랜드전략팀장에게 공유했다.
“팀장님, 홀딩스 대표이사 비서실에서 신규 브랜드 전략안 최초 작성본 및 수정 이력 제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팀장은 요청서를 살펴보더니 잠시 머뭇거렸다.
“……어, 그래. 홀딩스 공식 요청이면 승인해 드려야지. 시스템상으로 정식 처리해.”
팀장의 결재가 떨어지자 지은은 문서관리시스템을 통해 요청된 자료를 제출했다. 제출 내역과 결재 기록도 시스템에 남았다.
지은은 신규 브랜드의 팝업스토어 운영 계획과 관련된 협조 공문을 들고 타 부서로 향했다.
2층 공용 공간을 지나던 지은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맞은편 복도 끝에서 걸어오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박수진.
트렌치코트 차림의 수진은 손에 서류 봉투를 쥔 채 걸음을 멈췄다.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지은에게 다가왔다.
민석은 수진을 지방 지사로 발령 내겠다고 했지만, 아직 발령 요청만 올라간 상태였다. 수진은 여전히 홍보팀 대리로 근무하고 있었다.
“……지은아.”
지은은 서류 봉투를 든 채 수진을 바라보았다.
“나…… 실장님한테 들었어. 나 지방 지사로 발령 내신다고.”
수진의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우리…… 그래도 친구였잖아. 내가 죽을죄를 지은 건 맞는데, 꼭 이렇게까지 날 매장시키고 끝내야겠어? 회사에서 구설수까지 만들면서…….”
지은은 수진의 말을 중간에 끊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다 말했어?”
“……뭐?”
“수진아. 너한테 무슨 사과나 변명을 들을 생각 없어. 네가 지방으로 가든, 이 회사에 남아 있든 그것도 더 이상 내 관심사 아니고.”
“지은아…….”
“앞으로 업무적인 일 외에는 연락하지 마. 회사에서 마주쳐도 아는 척하지 말고.”
지은은 수진을 지나쳐 걸어갔다. 뒤에서 수진이 다시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복도 모퉁이를 돌기 전, 지은은 서류를 들고 지나가던 홍보팀 직원과 잠깐 눈이 마주쳤다. 그 직원은 지은과 뒤에 남아 있는 수진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그대로 지나갔다.
지은은 협조 공문을 담당 부서에 전달한 뒤, 홀딩스 사업관리팀에서 추가 검토를 위해 참석해 달라고 안내한 20층 소회의실로 향했다.
“윤지은 대리님, 오셨습니까. 제출해 주신 최초 작성본과 최종 보고서 사이에 수치 산출 조건이 달라진 부분이 있어서 확인차 모셨습니다.”
홀딩스 사업관리팀 담당 과장이 지은을 맞았다. 테이블 위에는 지은이 공식 시스템으로 제출한 최초 기획서와 차민석 명의의 최종 보고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네, 과장님. 어느 부분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여기 18페이지, 최초 작성본의 첫해 예상 매출 산출 부분입니다.”
과장이 펜 끝으로 지은의 원본 문단을 짚었다.
“원본에는 ‘D2C 자사몰 가입자 수가 상반기 내 10만 명을 돌파하고, 팝업스토어 구매 전환율이 4.5% 이상을 유지할 때’라는 전제 조건이 붙어 있더군요. 그런데 최종 보고서에는 이 조건이 빠지고 목표 매출액만 기재되어 있습니다. 조건을 충족했을 때 가능한 수치라는 설명이 없어요.”
지은은 문서를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최초 기획 당시에는 해당 조건을 충족했을 때 달성할 수 있는 매출로 산출했습니다. 실제 결과는 신규 가입자 확보 속도와 팝업스토어 운영 성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요.”
“그런데 최종 보고서에서는 왜 빠진 겁니까?”
“전략기획실로 전달한 이후 최종 보고서가 수정되는 과정에서 생략된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한 수정 경위는 이력을 확인해야 합니다.”
지은은 최초 작성본에서 사용한 데이터와 산출 방식을 추가로 설명했다.
과장은 원본과 최종 보고서를 번갈아 살펴보며 몇 가지를 더 확인했다. 지은은 요청받은 부분에 대해서만 답했고, 자신이 확인하지 못한 수정 사항은 별도로 확인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때 소회의실 문이 열렸다.
차현우가 들어왔다. 다른 일정을 마치고 합류한 듯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진행 상황은 어떻습니까?”
“아, 대표님. 윤지은 대리님이 제출하신 최초 작성본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최종 보고서에서 빠진 매출 산출 조건이 원본에는 기재되어 있더군요.”
현우는 자리에 앉아 두 문서를 살펴보았다.
“윤 대리.”
“네, 대표님.”
“최초 기획 때 설정했던 조건이 최종 보고서에서 삭제된 이유를 전달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전략기획실로 기획안이 이관된 이후 수정 과정은 공유받지 못했습니다. 최초 산출 근거와 조사 자료는 사내 시스템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현우는 최종 보고서에 표시된 수치를 다시 확인했다.
“이 조건이 빠지면 매출 목표를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달라지겠네요.”
그는 옆에 앉은 과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정 이력부터 확인하세요. 누가 어떤 근거로 조건을 삭제했는지 알아야겠습니다. 사업관리팀은 최초 작성본의 전제 조건을 기준으로 재무 타당성을 다시 검토하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최종 보고서에 반영된 목표 매출액도 재검토해 주세요. 현재 수치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지는 확인이 필요하겠습니다.”
현우는 추가로 확인할 항목 몇 가지를 지시했다.
지은은 그 내용을 메모했다. 최초 작성본의 수치가 다시 검토 대상이 됐지만, 그것이 곧 자신의 기획안에 문제가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원본에 남아 있는 근거를 바탕으로 설명하면 될 일이었다.
실무 검토가 끝나고 지은은 소회의실을 나와 엘리베이터 홀로 걸어갔다.
뒤에서 구두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차현우가 서류 봉투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지은은 옆으로 비켜서며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고생하셨습니다, 대표님.”
현우는 지은의 옆에서 걸음을 멈췄다.
“윤 대리.”
“네.”
“앞으로 수정본 제출할 때는 원본 근거와 수정 사유도 시스템에 함께 기록해 주세요. 최종 보고 과정에서 내용이 달라지면 확인하기가 어렵거든요.”
“네, 대표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번에 제출한 자료는 사업관리팀에서 추가로 확인할 겁니다.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담당자를 통해 연락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는 지은을 향해 먼저 타라는 듯 손짓했다.
“수정본은 이번 주 금요일 오후 5시까지 부탁해요, 윤지은 대리.”
“네. 기한 맞춰 제출하겠습니다.”
지은은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문득 생각에 잠겼다. 어제 대회의실에서 처음 제대로 인사를 나누었는데, 현우는 자신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보고서와 참석자 명단에도 적혀 있던 이름이었다. 대표이사가 실무 담당자를 기억하는 것이 특별히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지은은 곧 다른 생각으로 넘어갔다. 사무실에 돌아가면 우선 원본의 매출 산출 조건부터 다시 확인해야 했다.
* * *
태경라이프 브랜드전략팀 사무실.
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시작하던 지은은 사무실 분위기가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탕비실 쪽에서 들려오던 대화가 지은이 다가가자 끊겼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청첩장 디자인이나 예식장 꽃장식을 물어오던 후배 대리도 지은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지은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뒤, 비교적 친하게 지내던 옆 팀의 선배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다가왔다.
“지은 씨, 잠깐 바람 좀 쐴래?”
건물 옥상 정원.
선배는 캔 커피 하나를 지은에게 건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 괜찮아?”
“네? 뭐가요?”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서 그래. 혹시나 해서 말해주는 건데…….”
선배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너랑 차 실장님, 결혼 취소된다는 말이 돌고 있어. 아직 다 아는 건 아닌데, 홍보팀이랑 기획실 쪽에서 이야기가 나온 것 같더라고.”
지은은 캔 커피를 손에 쥔 채 듣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둘이 결혼 준비하다가 크게 다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지은 씨가 먼저 파혼하자고 했다 하고…… 진짜야? 정말 파혼하는 거야?”
“네, 선배. 결혼 진행 안 하기로 했어요. 파혼한 거 맞아요.”
“어머, 진짜로……? 세상에, 3주밖에 안 남았는데 어떻게 해…….”
선배는 놀란 표정으로 지은을 바라보았다.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 눈치였지만, 지은이 말을 보태지 않자 더는 묻지 않았다.
지은은 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헤어졌다는 사실까지 회사에 알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더 나올지는 신경이 쓰였지만.
선배와 함께 사무실로 돌아온 지은이 자리에 앉았을 때, 사내 메신저 알림이 울렸다.
[윤지은 대리. 홀딩스에서 신규 브랜드 기획서 최초 작성본 요청한 거, 왜 나한테 사전에 보고 안 했습니까?`]
차민석의 메시지였다.
지은은 잠시 화면을 확인한 뒤 답장을 입력했다.
[홀딩스 대표이사 비서실의 공식 요청에 따라 브랜드전략팀장님 결재를 받고 사내 시스템으로 제출했습니다.]
`차민석 실장: 그렇더라도 전략기획실이 총괄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실장인 나한테 사전에 확인받는 게 보고 체계 아닙니까? 윤 대리 지금 사적인 감정으로 업무 절차 무시하는 것 같은데, 주의하세요.`
지은은 민석이 무엇을 문제 삼는지 알 것 같았다.
홀딩스에는 최종 보고서에서 빠진 매출 산출 조건과 수정 이력이 전달된 상태였다. 민석 역시 그 사실을 확인했을 가능성이 컸다.
[홀딩스 비서실의 공식 요청에 따라 팀장님 결재를 받고 제출했습니다. 전략기획실에 별도 사전 보고가 필요한 절차라면 확인하겠습니다. 향후에도 사내 규정에 따라 처리하겠습니다.]
메시지를 전송한 뒤 지은은 다시 업무 화면을 열었다.
민석에게서는 더 이상 답장이 오지 않았다.
퇴근을 앞두고 서류를 정리하던 지은의 휴대전화로 낮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선배의 문자가 도착했다.
- 지은아, 아까 내가 말했던 소문 말인데…… 내용이 점점 이상하게 와전되고 있어. 너 상처받을까 봐 말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미리 알고 대응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지은은 휴대전화를 들었다.
- 무슨 말씀이세요?
곧 답장이 도착했다.
- 지금 홍보팀이랑 전략기획실 쪽에서 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네가 결혼 직전에 일방적으로 파혼을 통보했고, 차 실장님 집안에서 합의금을 제안했는데 네가 더 큰 돈을 요구하면서 거절했다는 식이야.
지금 이게 무슨…….
거액의 합의금을 먼저 제안한 쪽은 오미경이었다. 그마저도 민석에게 파혼의 책임이 없다는 내용의 합의서에 서명하는 조건이었다.
자신은 그 조건을 거절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회사에는 자신이 더 많은 돈을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누가 처음 그런 말을 했을까.
오미경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지만, 그녀가 직접 소문을 퍼뜨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박수진도 마찬가지였다.
지은은 휴대전화의 메시지를 캡쳐해두었다.
‘일단 기록부터 남겨두자.’
어제 오미경과 만났던 날짜와 장소, 제안받았던 금액과 합의서 조항을 따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합의서는 그 자리에서 돌려줬으므로 현재 지은에게 남아 있는 사본은 없었다.
통화 내역과 업무 관련 기록도 확인해 둘 생각이었다.
그때 선배의 문자가 한 통 더 도착했다.
- 그리고 지은아. 오전에 홀딩스 회의 다녀온 것도 말이 나오더라. 네가 차 실장님하고 파혼한 뒤에 일부러 형인 차현우 대표님 쪽에 줄을 대려고 한다는 얘기까지 있어.
지은은 순간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결 겨우 참아냈다. 어제 갤러리에서 나눈 대화뿐 아니라 오늘 있었던 업무 회의까지 소문에 얽혀 있다니.
차현우와는 업무상 필요한 이야기만 나누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일까지 민석과의 파혼에 연결하고 있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처음 이런 말을 꺼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