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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소문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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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소문의 대가

[네가 차 실장님하고 파혼한 뒤에 일부러 형인 차현우 대표님 쪽에 줄을 대려고 한다는 얘기까지 있어.]

휴대전화 화면에 찍힌 문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지은은 조용히 액정을 껐다.

파혼에 관한 이야기가 어느새 돈과 회사 내 인맥에 관한 소문으로 번져 있었다. 정작 민석의 외도에 관한 이야기는 빠져 있었다.

‘내가 돈을 더 달라고 했다고?’

기가 막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금전적인 보상을 내밀며 아들의 외도를 덮으려 했던 것은 차민석의 어머니 오미경이었다. 지은은 그 합의서를 거절하고 나왔을 뿐인데, 회사에는 더 큰 돈을 요구하다 거절당한 여자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지은은 선배에게 소문을 처음 들은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다. 잠시 뒤 돌아온 답은 홍보팀 쪽에서 들었다는 것뿐, 정확히 누가 먼저 말했는지는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박수진을 찾아가 따져 봐야 확인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지은은 선배에게 알려줘서 고맙다는 답장을 보낸 뒤 캘린더 앱을 열었다. 청담동 갤러리에서 오미경과 만난 날짜와 장소, 제시받은 금액, 합의서에서 문제 삼았던 조항을 기억나는 대로 적었다. 파혼 책임을 지은에게만 돌린다는 문구도 빠뜨리지 않았다.

합의서 사본은 없었지만, 기억이 생생할 때 적어 두는 편이 나았다.

지은은 메모를 저장하고 퇴근 준비를 했다. 그제야 며칠째 해결하지 못한 일이 하나 더 떠올랐다. 태경호텔에 두고 나온 차였다.

---

퇴근 후 지은은 지하철을 타고 태경호텔로 향했다.

외도를 목격했던 그날 밤, 지하 주차장에 차를 그대로 둔 채 언니 지혜의 차를 타고 떠났었다. 그 뒤로는 결혼식 취소와 회사 일로 정신이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3층에 도착하자 지은은 익숙한 표지판을 따라 걸었다. C구역 기둥을 지날 때 발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며칠 전 민석의 포르쉐가 서 있던 자리였다.

드레스를 고르던 날에도 두 사람은 만나고 있었을 것이다.

지은은 기둥을 지나쳐 주차 정산기 앞으로 갔다. 차량 번호를 입력하자 예상보다 큰 금액이 화면에 떴다.

‘차까지 두고 나오는 바람에 돈만 더 쓰네.’

한숨을 내쉬며 카드를 꺼내 정산했다. 정산을 마치고 흰색 아반떼 운전석에 손을 뻗는데,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윤지은 대리?”

지은은 돌아보았다. C구역 출구 쪽, 검은색 세단 옆에 차현우가 서 있었다. 슈트 차림에 서류 가방을 든 그는 곁에 있던 호텔 직원과 짧게 인사를 나눈 참이었다.

지은은 운전석 문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퇴근길입니까?”

“네. 차를 두고 간 게 있어서 찾으러 왔습니다.”

현우는 차를 한번 보았지만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주차비 많이 나왔겠네요.”

생각지 못한 말에 지은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네. 생각보다 많이요.”

“여기 기둥 바로 옆이 좀 좁더라고요. 나가실 때 조심하세요.”

업무 회의에서 듣던 말투와는 조금 달랐다. 지시할 때처럼 딱딱하지도, 그렇다고 친한 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 네. 조심히 나가겠습니다.”

“그래요. 조심히 들어가요.”

현우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차에 올랐다. 지은도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앞서 출발한 검은 세단이 주차장 출구로 사라지는 동안 지은은 사이드미러를 확인하고 천천히 차를 뺐다.

차가 기둥 옆을 통과할 때 조금 전 현우의 말이 떠올랐다.

‘여기 자주 오시나 보네.’

지은은 주차장 출구로 올라가 차선을 따라 집으로 향했다.

---

다음 날, 브랜드전략팀에 신규 브랜드 홍보 일정 보류를 알리는 메일이 도착했다.

지은이 홍보팀과 조율하던 사전 마케팅 계획과 팝업스토어 관련 언론 배포 일정이 모두 잠정 중단된다는 내용이었다. 협업 일정부터 다시 잡아야 했다.

지은은 메일의 참조인을 확인한 뒤 홍보팀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님, 팝업스토어 보류 건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제출한 마케팅 데이터에 수정할 부분이 있습니까?”

— 아, 윤 대리님. 그게…… 홀딩스에서 사업성을 재검토 중이라 매출 목표가 확정될 때까지 대외 홍보는 보류하라고 해서요.

“그러면 기존 자료 검토까지 중단되는 건가요? 아직 외부 배포 전이니까 내부적으로 확인할 부분은 먼저 정리해 둘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저희 팀에서는 일단 전략기획실 승인부터 다시 받자는 입장입니다. 추가 협의도 기획실 거쳐서 요청해 주세요.

“지난번에는 담당자끼리 초안 검토까지 진행하기로 했잖아요.”

— 네, 그랬는데 상황이 좀 달라져서요. 지금은 저희가 임의로 진행하기 어렵습니다.

홀딩스에서 매출 전망을 재검토 중이니 홍보 일정 보류 자체는 타당했다. 다만 평소라면 실무자끼리 먼저 맞춰 보던 세부 사항까지 전략기획실의 승인을 요구하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소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보류 범위랑 재개 조건을 메일로 정리해 주시겠어요? 저희도 내부 일정 수정해야 해서요.”

— 네, 그렇게 할게요.

전화를 끊은 지은은 기존 일정표에 표시해 둔 마감일들을 훑었다. 홍보팀 답변을 받아야 할 항목을 표시하고 팀장에게 상황을 공유했다.

‘이래서 일이 늦어지는 건데.’

오후가 되자 브랜드전략팀장이 지은을 소회의실로 불렀다. 팀장은 앞에 놓인 찻잔을 한쪽으로 밀고 말을 꺼냈다.

“윤 대리, 소문 들었다. 차 실장하고 파혼했다며.”

“네. 그렇게 됐습니다.”

“자네 사정에 내가 왈가왈부할 건 아닌데, 지금 팀 입장이 난처해졌어. 알다시피 차 실장이 전략기획실장이고 우리 팀 사업 예산도 기획실에서 검토하잖아. 그런데 홀딩스에서 윤 대리를 실무 담당자로 지정해 원본 자료를 요청하면서 기획실하고 우리 팀 사이에 기류가 묘해졌단 말이지.”

“당분간 홀딩스나 기획실에 제출하는 자료는 전부 나한테 먼저 공유하고 정식 채널로 넘겨. 지난번처럼 대표이사 비서실에서 요청이 오더라도 팀 차원에서 진행 상황을 알고 있어야 하니까.”

지은은 이미 팀장 결재를 받고 제출했다는 말을 꺼내려다 그만두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도 보고 절차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회사 안에서 괜한 말 더 나오지 않게 조심하고. 지금은 어느 쪽이든 민감한 시기니까.”

파혼한 건 나인데, 왜 회사에서까지 눈치를 보게 되는 걸까. 그깟 게 뭐라고.

지은은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한 번 쥐었다 피며 말했다.

“다만 신규 브랜드 기획은 제가 처음부터 담당해 온 프로젝트입니다. 수정 자료도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실무 진행에는 계속 참여하고 싶습니다.”

팀장은 잠시 지은을 바라봤다.

“당장 자네를 빼겠다는 건 아니야. 원래 맡은 일은 하되, 보고 과정만 확실하게 하자는 거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은은 자리로 돌아와 홍보 일정 보류와 추가 검토 항목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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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지은은 오랜만에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왔다.

파혼 이후 언니 집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다시 자신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식탁 위에는 청첩장 샘플 봉투와 신혼집 가전제품 견적서가 놓여 있었다. 벽에 걸린 달력에는 결혼식 날짜를 표시한 붉은 동그라미가 남아 있었다.

지은은 가방을 내려놓고 한동안 식탁을 바라보다가 고무장갑을 꼈다. 달력의 동그라미를 검은 펜으로 지우고, 청첩장 샘플과 견적서를 분리해 버렸다. 커플로 쓰려고 사둔 수저 세트와 컵도 꺼냈다.

컵 하나에는 아직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결혼한 뒤에 신혼집에서 쓰겠다며 상자도 열지 않았던 물건이었다.

이것도 치워야겠다. 버릴 것과 보관할 것을 나누고, 환불할 물건은 영수증을 찾아뒀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오래된 물과 반찬통 몇 개가 전부였다. 배가 고팠지만 요리할 기운은 없어 생수 한 컵을 마시며 소파에 앉았다. 휴대전화 배달 앱을 열었다가 닫고, 냉동실에 있던 만두를 떠올렸다.

그때 언니 지혜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 집에는 잘 들어갔어? 차는 찾았고?

“응. 차 찾아서 주차장에 잘 대놨어. 집 안 청소도 좀 했고.”

— 밥은 먹었어? 내가 반찬 좀 싸서 갈까?

“됐어, 언니. 냉동실에 만두 있어.”

— 또 대충 먹으려고 그러지. 네가 없으니까 우리 집도 조용하긴 하더라.

“좋겠네. 며칠 동안 신세 졌으니까.”

— 그런 소리 하라고 한 말 아니거든. 주말에라도 와. 같이 밥 먹자.

“응. 시간 보고 갈게.”

통화를 마친 지은은 주방으로 가서 냄비를 꺼냈다. 물을 올리고 만두 봉지를 뜯는 사이 휴대전화에 언니의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집에 먹을 것 좀 사두라는, 늘 상 하는 걱정 어린 잔소리였다.

지은은 짧게 답장을 보낸 뒤 불을 줄였다. 작은 원룸 안에 물 끓는 소리가 퍼졌다.

---

다음 근무일, 지은은 홀딩스 사업관리팀에서 보낸 추가 데이터 요청을 처리하기 위해 사내 문서관리시스템에 접속했다.

매출 산출 조건의 근거를 다시 확인하고 최초 기획서 파일을 열려고 하는데 문서 목록에 낯선 알림이 붙어 있었다.

`신규 브랜드 출시 전략안 Ver 1.0`

`공유 알림: 홍보팀 박수진 대리에게 파일이 공유되었습니다.`

지은은 알림을 다시 읽었다. 홍보팀에도 신규 브랜드 관련 자료는 전달됐다. 하지만 대외 홍보용으로 정리한 파일이 대부분이었고, 최초 작성본 전체를 공유한 경우는 드물었다.

‘무슨 일로 원본까지 공유한 거지?’

수진은 아직 홍보팀 직원이니 자료를 받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지은은 알림을 눌러 공유 문서의 이름과 범위를 다시 확인했다. 발신 부서나 실제 열람 여부까지는 이 화면에 나오지 않았다. 누가 보냈는지 확인하려면 공유를 담당한 부서에 물어봐야 했다.

지은은 알림을 그대로 두고 요청받은 데이터를 정리했다.

퇴근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무렵, 팀장이 소회의실 문을 열고 나왔다.

“윤지은 대리. 잠깐 들어와 봐.”

지은은 작업하던 파일을 저장하고 일어났다. 팀장의 손에는 몇 장의 출력물이 들려 있었다. 소회의실에 들어가자 팀장은 문을 닫고 지은에게 앉으라고 했다. 맞은편에 앉은 뒤에도 곧장 입을 열지 않고 종이를 한 장씩 넘겼다.

“방금 홀딩스 보안팀에서 연락 왔어.”

“보안팀이요?”

“우리 신규 브랜드 기획 자료가 외부로 유출된 것 같아.”

지은은 팀장을 바라봤다.

“어떤 자료 말씀이세요?”

“핵심 콘셉트하고 유통 채널별 매출 전망 자료 일부. 경쟁사 사업 제안서에서 우리 내부 자료와 상당히 비슷한 내용이 발견됐다는 거야.”

“그 제안서를 어떻게 확인한 건가요?”

“거기까지는 아직 모르겠어. 보안팀에서 자료를 대조하고 있대. 관련 부서에는 문서 열람하고 공유한 기록을 보존하라고 연락이 내려왔고.”

지은은 원본과 최종 보고서에서 달라졌던 수치들을 떠올렸다.

“최종 보고서에 있던 내용인가요?”

팀장은 출력물에 시선을 내렸다.

“그게 좀 이상해. 최종 보고서에 없는 수치가 포함돼 있다는 거야. 최초 작성본에 들어 있던 조건부 매출 전망하고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던데?”

최초 작성본에는 자사몰 가입자 확보 규모와 팝업스토어 구매 전환율을 전제로 한 매출 산출 조건이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최종 보고서에서는 그 조건이 빠졌다. 최초 기획서를 직접 보지 않았다면 알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 정확히 어떤 부분이 일치한다고 하던가요?”

“그건 아직 조사 중이야. 최초 작성본부터 최종 보고서까지 전부 확인한다고 해. 차 대표님도 보고받고 조사하라고 지시하셨다더군.”

팀장은 출력물을 내려놓고 지은을 바라보았다.

“우리 팀에서도 자료 취급 담당자 명단을 제출해야 해. 윤 대리 이름도 들어가고.”

“……제 이름이요?”

“최초 작성자잖아. 물론 관련 자료를 다룬 사람들은 다 확인하는 거야. 특정인을 의심한다는 뜻은 아니고.”

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절차인데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윤 대리, 혹시 그 자료를 회사 밖으로 전달하거나 개인적으로 보관한 적 있어?”

“없습니다. 홀딩스에 제출한 원본도 팀장님 결재받고 사내 시스템으로 처리했습니다.”

“그 외에는? 업무상 다른 부서에 보내거나 별도로 공유한 내용 말이야.”

“승인된 협업 자료 외에 따로 전달한 적 없습니다. 제가 직접 처리한 내역은 시스템에 남아 있을 겁니다.”

팀장은 지은의 답을 듣고 잠시 출력물을 살펴봤다.

“알겠어. 보안팀에서 공식적으로 확인 요청이 오면 그대로 설명하면 돼. 그때까지 관련 파일은 삭제하거나 옮기지 말고. 공유 이력도 그대로 두고.”

“네,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지은이 팀장에게 재차 질문을 건넸다.

“그럼 지금부터 자료 접근이 제한되는 건가요? 사업관리팀에 제출할 수정본이 남아 있어서요.”

“그건 보안팀 지침이 내려오면 알려줄게. 일단 기존 자료는 그대로 보존하고, 추가로 필요한 건 나한테 먼저 말해.”

회의실 밖에서는 여전히 키보드 소리와 직원들의 전화 통화가 들렸다.

자리에 돌아온 지은은 모니터를 켰다. 화면에는 오전에 확인했던 최초 기획서의 공유 알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홍보팀 박수진 대리에게 파일이 공유되었습니다.`

누가 공유했는지, 박수진이 실제로 파일을 열어봤는지도 아직 알 수 없었다. 그 기록 하나만으로 자료 유출과 연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외부 제안서에 최초 작성본의 수치가 들어 있었다는 말을 듣고 나니, 아침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알림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