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남겨진 기록
7. 남겨진 기록
태경홀딩스 20층 보안팀 면담실.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면담실 안에는 노트북을 켠 보안팀 직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지은은 직속 팀장에게 면담 일정을 공유한 뒤 정식으로 조사에 참석했다.
“윤지은 대리님. 신규 브랜드 출시 전략안의 작성 경위와 자료 공유 범위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외부에서 발견된 내용은 아직 대외 발표되지 않은 핵심 콘셉트와 타깃 유통망 데이터입니다.”
조사 담당자가 서류를 펼치며 말했다.
“원본 Ver 1.0부터 버전별 수정 이력, 홀딩스 비서실로 제출한 문서의 결재 내역까지 준비해 왔습니다.”
지은은 준비해 온 서류를 테이블에 놓았다.
조사 담당자는 문서를 살펴보다가 조건부 매출 전망이 기재된 페이지에서 손을 멈췄다.
“이 수치는 최종 보고서에 없더군요.”
“네. Ver 3.1까지는 유지됐지만, 전략기획실로 전달된 이후 최종 보고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삭제됐습니다.”
지은은 해당 부분을 짚었다.
“D2C 자사몰 가입자 수 10만 명과 팝업스토어 구매 전환율 4.5%를 전제로 산출한 수치입니다. 외부 제안서에서도 이 조건이 발견된 건가요?”
“현재까지 대조한 내용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해당 내용이 남아 있던 버전들의 공유 범위를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작성 당시에는 브랜드전략팀 내부에서 검토했고, 이후 전략기획실에 전달했습니다. 버전마다 검토 부서가 달랐거든요.”
“공유 권한도 윤 대리님이 직접 관리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작성과 수정 업무를 맡았습니다. 부서 공용 폴더를 통한 추가 공유 내역이나 접근 가능 계정은 제가 모두 확인할 수 없습니다.”
조사 담당자는 지은이 제출한 수정 이력과 결재 내역을 대조하며 내용을 기록했다.
지은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다시 살폈다. 최초 작성본에 있던 수치가 외부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어느 단계에서 빠져나갔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 * *
“추가로 확인 부탁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지은은 사내 문서관리시스템의 알림 내역을 출력한 종이를 꺼내놓았다.
“최근 홍보팀 박수진 대리에게 최초 작성본이 공유됐다는 알림을 확인했습니다. 제가 직접 공유한 파일은 아닙니다.”
조사 담당자가 알림에 표시된 문서 번호와 공유 시점을 확인했다.
“홍보팀에는 보통 대외 홍보용으로 정리된 자료를 전달해서요. 최초 작성본이 공유된 경위를 알고 싶습니다.”
“실제로 파일을 열람했는지는 확인하셨습니까?”
“아니요. 제 화면에서는 공유됐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공유한 계정과 실제 열람 여부는 저희 쪽에서 확인하겠습니다.”
수진에게 자료가 공유됐다는 사실만으로 그녀가 유출에 관여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다만 자신이 직접 공유하지 않은 최초 작성본이 홍보팀으로 전달됐다는 점은 확인이 필요했다.
조사 담당자는 해당 내용을 면담 기록에 추가했다.
오후 들어 보안팀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소문이 사내에 퍼지자, 전략기획실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차민석은 지은을 실장실로 불렀다.
지은이 들어서자 민석은 책상에 펼쳐 놓았던 보고서를 덮었다.
“앉아요, 윤 대리.”
지은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보안팀 조사받고 왔다면서?”
“네, 실장님. 정식 요청에 따라 협조하고 왔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했습니까?”
“최초 작성본의 수정 이력과 자료 공유 범위를 설명했습니다.”
“최종 보고서 이야기도 했겠군요.”
민석은 지은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 원본과 최종 보고서에서 달라진 항목에 관해 질문받았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확인할 수 있는 수정 이력을 말씀드렸습니다.”
민석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윤 대리. 지금 보안팀이 조사하는 건 정보 유출이지, 보고서 작성 과정이 아닙니다. 불필요한 이야기까지 꺼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잖아요.”
지은은 민석을 바라보았다.
“유출된 자료가 어느 버전에 포함되어 있었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온 질문이었습니다.”
“그건 조사팀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죠.”
“저는 질문받은 사실관계만 설명했습니다.”
민석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책상 위에 놓인 신규 브랜드 보고서를 지은 쪽으로 밀었다.
“좋아요. 그럼 이건 어떻게 생각합니까?”
보고서 표지에는 차민석의 이름이 총괄 책임자로 기재되어 있었다.
“홀딩스에서 최종 보고서 수정 경위를 다시 확인하겠다고 합니다. 당신이 오늘 보안팀에 무슨 말을 했는지와 별개로, 이제 전략기획실 전체가 설명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
“확인이 필요한 사항이라면 저도 자료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민석이 보고서를 도로 가져갔다.
“자네는 지금 자기 담당 부분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 프로젝트에 들어간 예산이 얼마인지 알잖아요. 보안 조사 때문에 일정이 밀리면 브랜드전략팀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석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어느정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전부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보안 조사 때문에 사업 일정이 늦어질 가능성은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민석은 책상 위에 놓인 펜을 집어 들었다.
“당분간 프로젝트 실무 담당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세요. 윤 대리는 보안팀 요청에 대응하고, 그동안 신규 브랜드 관련 보고는 다른 직원이 맡는 걸로 하죠.”
“현재 보안팀에서 제 업무를 제한하라는 요청은 없습니다.”
“보안팀이 인사까지 결정합니까? 이 프로젝트 총괄 책임자는 나예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가 제 말은, 업무를 재배치하겠다는 겁니다. 조사받는 직원에게 중요한 보고를 계속 맡기는 게 적절한지도 판단해야 하니까.”
‘결국 나를 빼겠다는 거네.’
지은은 무릎 위에 놓인 손을 가만히 모았다.
“수정본 보완 작업은 마무리 단계입니다. 지금 담당자를 변경하면 산출 근거와 수정 사항을 새 담당자에게 전부 넘겨야 해서 제출 일정도 다시 조정해야 합니다.”
“일정 때문에 하는 말이면 내가 알아서 조정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인수인계 범위와 제출 일정을 팀장님과 협의해서 정식으로 지시해 주십시오. 결정하신 내용에 맞춰 진행하겠습니다.”
민석의 손에서 펜이 멈췄다.
“윤 대리.”
“네.”
“내 지시를 받아들이기 싫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담당자를 변경하신다면 필요한 절차를 진행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민석은 지은을 잠시 바라봤다.
“자네가 이 회사에서 어떤 위치인지 잊은 건 아니겠죠?”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총괄하는 프로젝트에서 누가 어떤 일을 맡을지는 내가 판단합니다. 지금까지 자네가 이 업무를 담당했던 것도 그렇고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지은은 알아들었다.
민석은 자신이 원하면 지은을 실무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시키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실장님.”
“그럼 어렵게 만들지 맙시다. 조사 끝날 때까지 잠깐 빠져 있는 게 자네한테도 나아요. 괜히 더 많은 사람이 이름을 거론하게 만들 필요 없잖아요.”
지은은 민석을 똑바로 바라봤다.
“보안팀 조사에는 계속 협조하겠습니다. 다만 제 업무 변경이 필요하다면 팀장님과 협의해 결정해 주십시오.”
민석은 한동안 지은을 보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브랜드전략팀장 좀 들어오라고 해요.”
잠시 뒤 들어온 팀장은 민석에게서 업무 담당자 변경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실장님, 보안 문제 때문에 우려하시는 건 알겠습니다.”
팀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다만 지금 담당자를 바꾸면 홀딩스에 제출할 수정본 일정부터 다시 잡아야 합니다. 윤 대리가 산출 근거도 가장 잘 알고 있고, 변경 사항도 직접 정리하고 있어서요.”
“그럼 조사 대상인 직원을 계속 담당자로 두자는 겁니까?”
“보안팀에서 접근 권한 제한이나 업무 변경을 요청하면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현재로서는 기존 담당자를 유지하는 편이 일정 관리에 낫겠습니다.”
민석은 팀장을 바라봤다.
“문제가 하나라도 더 생기면 브랜드전략팀도 책임져야 합니다.”
“네, 실장님. 관련 자료와 제출 절차는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실장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민석은 책상 위의 보고서를 다시 펼쳤다.
“……그럼 조사 결과 나올 때까지는 기존대로 진행하세요.”
“알겠습니다, 실장님.”
“대신 홀딩스에 제출하는 추가 자료는 전부 사전에 보고받겠습니다. 어느 단계에서든 문제가 생기면 그때는 담당자 변경을 다시 검토할 겁니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실장실을 나온 뒤 지은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당장은 담당 업무를 지켰지만 민석의 결정 하나에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팀장에게까지 책임을 언급한 이상 앞으로의 보고 절차는 더 까다로워질 터였다.
‘일단 수정본부터 끝내자.’
지은은 자리로 돌아가 홀딩스에 제출할 자료를 다시 열었다.
* * *
지은은 보안팀에 추가 제출할 문서 관리 대장을 들고 태경홀딩스 20층으로 향했다.
대표이사 비서실 복도를 지나가던 중, 서류 가방을 든 차현우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표님.”
지은은 멈춰 서서 고개를 숙였다.
현우는 걸음을 멈추고 지은을 바라보았다.
“보안팀 서류 제출하러 왔습니까?”
“네. 원본 수신 내역과 관리 기록 전달하러 왔습니다.”
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받느라 번거롭겠네요.”
“괜찮습니다.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으니까요.”
“그래도 평소 업무까지 하려면 바쁘겠어요.”
“조금 그렇긴 합니다. 수정본도 마무리해야 해서요.”
현우는 지은이 들고 있는 서류를 한번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는 잘 들어갔어요?”
“네?”
“호텔에서 차 찾으러 왔다고 했잖아요.”
“아…… 네. 별일 없이 왔습니다. 주차비가 좀 많이 나오긴 했지만요.”
말하고 보니 대표이사 앞에서 주차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은은 괜히 멋쩍어졌다.
현우가 웃었다.
“차를 오래 세워뒀나 보네요.”
“네. 며칠 동안 깜빡하고 있었거든요.”
“그럼 꽤 나왔겠는데요.”
“생각보다 많이요.”
지은이 대답하자 현우는 다시 가볍게 웃었다. 업무 이야기를 할 때와 달리 별다른 긴장 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서류 제출하러 가던 길이죠?”
“네. 보안팀에 전달할 자료가 있어서요.”
“그럼 들어가 봐요. 수고 많아요.”
“네. 대표님도 수고하십시오.”
짧은 대화가 끝났다. 지은은 다시 보안팀이 있는 복도 쪽으로 걸어갔다.
차현우는 평소 회의에서 마주했을 때보다 말을 편하게 건넸다. 그룹 대표이사라는 직함 때문에 어렵게만 느껴졌는데, 막상 대화를 나눠보니 생각만큼 어려운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지은은 손에 든 서류를 고쳐 잡고 보안팀으로 향했다.
퇴근 무렵, 보안팀으로부터 1차 확인 결과가 브랜드전략팀에 전달되었다.
[보안팀 1차 조사 중간 결과]
* 윤지은 대리가 사내 정식 결재망을 통해 태경홀딩스 대표이사 비서실로 제출한 최초 작성본 Ver 1.0 파일의 전송 과정에서 승인되지 않은 외부 전송 정황은 확인되지 않음.
* 해당 문서 제출은 정상적인 결재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됨.
* 전체 자료 유출 경로 및 관련 계정에 대한 조사는 계속 진행 중임.
지은은 통보 내용을 재차 확인해 보았다.
적어도 자신이 홀딩스에 자료를 제출한 과정에는 문제가 없었다.
팀장도 결과를 확인하고 지은을 불렀다.
“윤 대리, 일단 제출 건은 이상 없다고 나왔네.”
“네. 확인했습니다.”
“다른 경로도 계속 조사한다니까, 추가 요청 오면 협조하고. 수정본은 기존 일정대로 진행해.”
“알겠습니다.”
지은은 자리로 돌아와 작업 중이던 파일을 다시 열었다.
결재 내역을 준비하고, 면담에 참석하고, 민석의 담당자 변경 지시까지 겪은 하루였다. 그렇다고 정보 유출 사건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최초 작성본에 들어 있던 자료가 경쟁사에 넘어갔다는 사실은 그대로였다.
퇴근 준비를 하던 지은은 오전 보안팀 면담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원본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브랜드전략팀과 전략기획실을 거쳐 여러 직원이 관련 자료를 다뤘다. 부서 공용 폴더를 통해 추가로 공유된 내역은 보안팀에서 확인해야 했다.
문득 며칠 전부터 문서관리시스템에 표시되어 있던 알림이 떠올랐다.
`홍보팀 박수진 대리에게 파일이 공유되었습니다.`
누가 수진에게 원본을 공유했는지, 수진이 실제로 파일을 열어봤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