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프롤로그
프롤로그 중학교 3학년. 평소처럼 야구부 훈련복을 입은 채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씻고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때. 유튜브 알고리즘에 영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원래 같았다면 절대 누르지 않을 영상. ‘하루 종일 야구하다가 왔는데 유튜브에서도 야구를 보고 싶진 않지.’ 그러나 그때는 왠지 모르게 영상을 누르고 싶었다. 홀린 듯 클릭한 유튜브 영상. ‘그 영상이 내 새로운 인생을 이끌었지.’ [필 니크로의 레전드 투구 영상] AI 복원 기술로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과거 영상 속에서, 한 남자가 무심하게 공을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서 떠난 야구공이 그려내는 궤적은 아름다웠다. 회전이 완전히 죽어 실밥이 온전히 보였다. 공은 유유히 춤추는 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순간 가라앉았다. 타자가 배트를 휘둘렀지만, 공을 건드리지도 못했다. 필 니크로의 아름다운 그 궤적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들이쉬었다. 그 아름다운 궤적에 홀려 너클볼을 배우기 위해 곧바로 미국으로 유학 온 지 어느덧 4년 차.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영상이 웬수네.’ 나는 아스팔트 길을 걸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모하게 미국에 왔지만, 이곳의 생활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영어를 전혀 몰라 번역기 앱을 사용하며 생활한 미국 생활. 문화와 언어의 장벽은 너무 높았고, 나는 그들에게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높은 벽은 미국 야구였다. 미국 고교 야구부에 들어가기 위해선 입부 테스트, 트라이아웃을 거쳐야 했다. 문제는 그 트라이아웃 경쟁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각 주에서 괴물이라 불리던 애들이 수백 명씩 몰려들어 강력한 강속구를 뻥뻥 꽂아댔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꽤 유망한 유망주였지만, 미국 야구의 문턱을 넘을 수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 너클볼만 고집하며 4년을 허비한 것이다. ‘결국 나는 너클볼에 재능이 없었지.’ 너클볼에 미쳐 손가락에 피멍이 들도록 악력기를 쥐어짰다. 엄지와 검지 사이 살가죽은 딱딱한 굳은살이 되었다. 은퇴한 너클볼 투수들을 막무가내로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기도 하고, 낯선 타지의 트레이닝 센터를 전전하기도 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했건만. 나의 실력은 오히려 퇴화했지.’ 너클볼을 훈련할수록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직구의 구위와 구속이 퇴보했다. 제구는 흔들렸고, 구속은 떨어졌다. 투수로서 점점 나락을 향해간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바쳤음에도, 지난 4년 동안 단 한 번도 내가 만족할만한 너클볼을 던지지 못했다. 어느덧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4월 초. ‘엄마는 이제 그만하고 한국 들어오라고 하셨지.’ 쓴웃음이 입가를 스쳤다. 스마트폰 너머로 들려오던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했다. 부모님은 4년 동안 내 고집을 믿어주셨고, 내 모든 비용을 감수하셨다. 그런 부모님의 막대한 지원의 결과물이 지금의 나였다. ‘내가 헛짓거리를 너무 오래 한 건가.’ 나는 길가에 덩그러니 놓인 낡은 목제 벤치에 털썩 앉아 머리를 뒤로 젖혔다. 햇빛이 눈을 비춰 눈을 찡그렸다. ‘미국 하늘이나, 한국 하늘이나… 똑같네.’ 낯선 땅에 온 이래 너클볼에만 정신 팔려 단 한 번도 품어본 적 없던 감정.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향수병이었다. ‘향수병이라….’ 나는 직감했다. 향수병으로 느껴지는 이 감정은 단순히 고향을 그리워하는 감각이 아니라고. ‘한계에 부딪혀 도망가고 싶은 거네.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낄 줄이야.’ 솔직히, 좆같았다. ‘정말 열심히 했는데, 그 누구보다 내 모든 걸 쥐어짜 가면서 던졌는데.’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억눌렀다. 야구계에는 그런 말이 있다. 너클볼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점지해 주는 재능이라고. 손가락 끝의 미세한 감각과 공의 흐름을 읽는 본능까지. 하늘이 허락해야만 손끝에서 궤적이 그려지는 구종이라고. “왜… 왜 하필 나는 안 되는 건데? 왜 나는 그 한 번을 못 던지는 건데?” 세상은 나에게 왜 이리 잔인한가. 그저 회전하지 않는 공 하나를 던지기 위해 4년이라는 시간을 쏟아부었다. 4년. 누군가는 고작 4년 가지고 엄살을 부린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야구 선수에게 그 4년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내 야구 인생을 전부 갈아 넣은 시간이지.’ 유소년 시절부터 쌓아온 직구의 구위, 정교한 폼까지. 선수로서 최대한 빠르게 성장해야 할 중요한 시기를 오직 너클볼 하나에 모조리 태워 버렸다. 그리고 그 무모한 도박의 대가는 참혹했다. 미국 고교 야구부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대학 리그? 독립 리그? 어림도 없지. 고등학교 야구부도 못 들어간 나를 어떤 미친 구단이 받아 줘.’ 나는 가만히 손을 들어 손가락을 굽혀 보았다. 악력 훈련으로 굵어진 손가락 마디, 실밥을 눌러 담느라 딱딱하게 굳어진 손끝. 미래가 보이지 않는 내 현실에,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제… 그만할까?’ 미국에 건너온 후 단 한 순간도 야구를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매일 밤 손가락에 피멍이 들고 어깨가 빠질 것 같아도, 내 손을 떠난 공이 날개 달린 새처럼 날아오르는 그 아름다운 궤적을 상상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내가,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내가… 그만두고 싶은 거구나.’ 4년을 버텨온 집착이 식어버린 순간이었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걸었다. 딱히 정해진 목적지는 없었다. 멍하니 주변을 구경하며 발길 닿는 대로, 터벅터벅 걸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무심코 멈춰 선 발끝 너머로 익숙한 건물의 외관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익숙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하루도 빠짐없이 출석 도장을 찍었던 사설 피칭 센터. 어떤 야구부에도 들어가지 못했던 내가 4년 동안 훈련했던 곳이었다. 내 4년 동안의 노력을 함께한 곳. ‘몸이 기억하는 건가?’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날, 발걸음이 자동으로 나를 이곳으로 안내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가슴 속에서는 은은하게 오기가 차올랐다. ‘아니, 차라리 잘됐어.’ 어차피 다 끝난 야구 인생이었다. 야구에 남아 있는 미련을 털어버리기엔 이보다 더 적절한 장소도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마음껏 공을 던지자. 현실은 잊고, 내 마음 가는 대로 실컷 비우고 미련 없이 나가자. 그렇게 끝내는 거야.’ 나는 피칭 센터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카운터 직원의 인사를 받으며 요금 결제하고, 늘 쓰던 3번 불펜 라인으로 들어섰다. 불펜에 비치된 야구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오른손 손바닥 위에서 데굴데굴 굴러가는 휜 가죽 공. 손가락 마디를 구부려 손끝으로 공을 지그시 눌렀다. 지난 4년 동안 수백 번 그립을 고쳐잡고, 수만 번 던졌던 너클볼. 손톱 끝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감각까지. 나는 공을 쥐고 마운드 위에 섰다. “후우…” 긴 한숨과 함께 몸에 힘을 뺐다. 마지막 투구라고 생각하니 익숙한 불펜의 풍경도 그리워질 것만 같았다. ‘그래. 던져야지. 마지막인데.’ 더 이상 잘 던져야 한다는 압박감도, 증명해야 한다는 조바심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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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천히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공에 회전을 주지 않기 위해 손가락 끝으로 공을 밀어내듯 튕겨냈다. 쉬익-. 그리고 그 순간. 내 손에서 나온 공이 실밥이 그대로 보일 정도로 회전하지 않은 채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버터플라이 볼(Butterfly Ball). 너클볼이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날아가는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나비 같다고 하여 붙여진 그 별명. 그토록 원했던 이상적인 궤적의 너클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