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데뷔전(3)
9화 데뷔전(3)
9화 데뷔전(3)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소속의 중부 지역 프로 스카우트, 마크 스티븐스. 올해 마흔여덟인 그는 일리노이와 인디애나, 위스콘신 일대의 독립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는 베테랑 평가원이었다. 그가 일리노이주 샴버그 부머스의 홈구장, 윈트러스트 필드에 모습을 드러낸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프런티어 리그는 명색이 독립리그라고 해도 선수들의 수준이 꽤 높은 편이지.’ 마이너리그에서 방출된 유망주나 대학교 시절 한가닥 했던 선수들이 수시로 흘러 들어오는 것. 메이저리그 구단으로선 하위 팜을 채울 원석을 건지기에 꽤 괜찮은 시장이었다. 하지만 오늘 마크 스티븐스가 직접 차를 몰고 이곳까지 온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스카우트 네트워크 사이에서 은밀하게 도는 소문 때문이었다. 샴버그 부머스에 너클볼을 던지는 투수가 있다는 소문. 스프링 캠프 마지막 시범 경기에서 마운드에 올라 타자들을 상대했다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소문이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너클볼러, 필 니크로가 20년 동안 마운드를 지켰던 구단이다. 그의 등번호 35번이 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애틀랜타는 너클볼이라는 희귀한 구종에 대해 남다른 서사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투구 명가라는 구단의 이미지만큼 강한 투수에 대한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다. ‘뭐, 내가 너클볼에 무슨 특별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마크는 관중석 상단에 자리를 잡으며 무심하게 생각했다. 필 니크로가 현역으로 뛰던 시절, 마크는 글도 제대로 못 읽는 어린아이였다. 마크 스티븐스에게 필 니크로란 그저 옛날이야기일 뿐, 개인적인 낭만 같은 건 없었다. 다만 구단 수뇌부와 애틀랜타 팬들의 반응은 다를 터였다. 끊겼던 너클볼의 명맥을 이을 투수가 필 니크로가 뛰었던 애틀랜타에 나타난다? 마케팅 측면에서 봤을 때 팬들이 충분히 좋아할 만한 주제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샴버그 부머스의 개막전 일정을 보고 직접 확인차 달려온 것이었다. 사실 시범 경기 데이터라는 건 신뢰하기 어려웠다. 고작 몇 타자 상대한 게 전부였고, 트랙맨 수치조차 명확히 잡히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현대 야구에서 제대로 된 너클볼러가 새로 등장한다는 것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았다. 마크 스티븐스는 너클볼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시선을 가진 스카우트였다. 회전이 없는 공은 제구가 불가능에 가깝고, 타자의 사소한 컨디션 변동때문에 변수가 많아지는 구종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여기서 몇 이닝 통한다고 해도, 그래봤자 독립리그 수준이야. 상위 리그로 올라가면 당장 밑천이 드러날 확률이 높아.’ 마크 스티븐스는 본인 자리에 초고속 캠코더를 삼각대에 튼튼하게 고정한 뒤, 스카우팅 노트를 펼쳐 들었다.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윈트러스트 필드에 울려 퍼짐과 동시에, 샴버그 부머스의 개막전 경기가 시작되었다. 마운드에 오른 등번호 88번 투수, 강무백. ‘개막전 선발로 나섰다는 건, 팀 내에서 1선발로 평가받고 있다는 뜻인데….’ 솔직히 의외였다. 마크 스티븐스가 강무백에 대해 알고 있던 내용은 시범 경기에 출전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정도가 끝이었다. ‘그런데 구단 내에서는 1선발로 여겨진다는 건 그래도 기대해 볼 만한가?’ 강무백이 포수 미트를 향해 초구를 던졌다. 스피드건에 찍힌 구속은 69 mph. ‘흠, 고속 너클볼도 아니군.’ 마크의 표정이 굳었다. 현대 야구에서 그나마 경쟁력 있다고 평가받는 너클볼은 고속 너클볼이다. R.A. 디키가 고속 너클볼로 사이영상을 받았던 이후로 전통적인 너클볼 투수들은 사실상 보이지 않았고, 본인의 구종에 고속 너클볼을 섞어서 던지는 투수들이 간간이 나타났었다. 심지어 나중엔 시속 86 mph에 육박하는 강속 너클볼을 구사하는 선수들도 있었다. 물론 그 너클볼들도 상위 리그에서 쓰이지는 못했다. 사실상 다른 구종에 비해 실전성이 떨어진다고 평가받은 고속 너클볼. 그런데 그보다 더 실전성이 애매한 고전적인 느린 너클볼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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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둔한 공으로 마이너리그 타자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마크의 머릿속에는 비관적인 의문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마크의 그런 의문이 감탄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9회 초, 마침내 경기가 모두 끝났을 때, 마크 스티븐스는 멍한 표정으로 마운드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9이닝 무실점 완봉승. 스카우팅 노트에 적혀있던 의문점들이 죄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마크 스티븐스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강무백 투구의 데이터뿐이 아니었다. 본인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공의 무브먼트. 불규칙한 너클볼 궤적이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받았다. ‘이거… 진짜 심상치 않은데?’ 사실 이 정도까지 눈으로 확인했으면, 더 이상 볼 필요도 없었다. 독립리그 수준을 넘어 마이너리그에서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유망주라고 볼 수 있었으니까. 이제 돌아가는 대로 주요 유망주 리스트 명단에 이름을 넣고, 상부에 보고서를 올린 뒤 밀착 관찰을 시작하면 될 일이었다. ‘물론 오늘 경기 활약 하나만으로 곧바로 계약을 결정하겠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야구라는 스포츠에서 일시적인 플루크는 흔하게 일어나는 법이다. 오늘 보여준 완봉승 역시, 그저 운이 좋아서 어쩌다 한번 터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더더욱 집중적으로 밀착 관찰을 해야 해.’ 이 투수가 보여준 재능이 플루크인지 아니면 본인의 잠재력인지 판단하려면 말이다. 마크 스티븐스는 노트북으로 미국 고교 야구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 강무백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를 끝내고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경기장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태였다. 마크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부머스 구단 감독실로 달려가 노크했다. 똑, 똑. “들어오세요.” 감독실 안에서 릭 헤르난데스 감독이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서 서 있는 마크의 얼굴을 확인하자, 릭 헤르난데스 감독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이게 누구신가. 애틀랜타의 마크 스티븐스 아닌가? 오늘 관중석에 앉아 있는 건 봤는데, 이렇게 벌써 찾아올 줄은 몰랐군.” 마크 스티븐스는 이 일대 독립리그를 몇 년째 샅샅이 돌아다니는 베테랑 스카우트였다. 샴버그 부머스의 릭 헤르난데스 감독과도 이미 오랜 기간 안면을 튼 사이였다. “오랜만입니다. 감독님.” 마크는 성큼성큼 다가가 릭 헤르난데스 감독의 책상 앞까지 바짝 다가섰다. “오늘 선발로 나온 강무백. 저 선수 뭡니까?” “뭐긴 뭐야. 우리 팀 1선발 에이스지. 오늘 개막전부터 완봉승해 버린 비싼 에이스.” “저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닙니다.” 마크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가라앉았다. “너클볼의 완성도가 정말 높습니다. 100구가 넘는 공을 던졌지만 100rpm 근처에서 벗어난 공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9이닝 내내 던지면서 실투로 보이는 공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재밌는 걸 알게 됐지 뭡니까? 강무백 선수 프로필을 정리하려고 하는데 미국 고교 야구 데이터베이스를 샅샅이 뒤져봐도 강무백이라는 선수의 기록은 단 한 개도 안 나온다는 겁니다.” 릭 헤르난데스 감독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맞네. 데이터베이스에 안 나오는 게 당연하지. 그 친구, 정식 야구 선수로 뛰는 게 부머스가 처음이거든.” “… 미국 엘리트 야구 선수 출신이 아니란 말입니까?” 마크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정식 야구 선수로 뛴 적이 없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100rpm 대의 너클볼을 경기 내내 던질 수 있는 투수가 비선출이라고요?” “나도 처음 알았을 땐 놀라긴 했지. 뭐 한국에 있던 시절 중학교에서 선수로 뛰긴 했다고는 들었네.” 마크 스티븐스는 감독실 문을 열고 나오며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고교 야구 선수가 아니었다? 국적이 한국인이었지. 비자 문제가 있거나, 학교에서 큰 사고를 쳤거나, 인성이 문제가 있거나, 인종 차별 같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거나.’ 마크 스티븐스의 머릿속에선 여러 생각들이 분주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일단 확실한 건 강무백이 오늘 보여준 실력은 앞으로 꾸준히 지켜볼 가치가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마크 스티븐스는 곧바로 숙소로 돌아가 노트북을 켜고 상부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 일리노이주 시카고 교외, 고급 주거지에 있는 커다란 저택 2층 침실. 한 여자가 실크 로브 차림으로 침대에 가만히 엎드려 노트북 화면을 띄워놓고 있었다. 170cm를 훌쩍 넘는 키. 운동선수 출신인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탄탄한 피지컬.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자연 금발, 그리고 블레이저 블루 빛깔의 푸른 눈동자까지. 누구든 길을 가다 한 번쯤 돌아볼 만큼 눈부신 외모를 가진 그녀의 이름은 클로이 베넷이었다. 클로이는 강무백이 다니는 학교의 전교 학생회장이었다. AP 과목을 싹 쓸어 담는 전교 최상위권 성적에 학생회장 직책, 자선단체 봉사 클럽장까지 맡고 있는 클로이는 학교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기인였다. 클로이 앞 노트북 화면에는 미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명문대인 시카고 대학교의 기숙사 신청 페이지가 떠 있었다. 하지만 클로이의 시선은 노트북이 아닌 책상 위에 놓인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오늘도 학교에 안 나왔어….’ 처음엔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12학년 2학기쯤 되면, 이미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은 아이들이 학교를 건너뛰고 쉬거나 놀러 다니는 일이야 흔한 풍경이었으니까. 하지만 4월 말이 지나서 5월 중순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학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 명백히 이상했다. 한국에서 온 케이(K)는 평소에도 출석이 그리 성실한 편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겨우겨우 출석 일수를 채우며 다니던 애가, 이렇게 한 달 가까이 장기 결석을 해버리면 당장 졸업조차 위태로울 게 분명했다. ‘케이는 같이 어울리는 친구도 없는데.’ 졸업 시즌이 다가왔다고 파티를 찾아다니거나 술을 마시러 다닐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수업만 끝나면 늘 어디론가 허겁지겁 사라졌고, 점심시간에도 혼자서 도시락 먹던 아이.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도 주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 늘 혼자 다니던, 흔히 말하는 전형적인 너드에 해당하는 친구였다. ‘그래도 잘생겨서 여자애들에게 은근히 인기가 많긴 했지만.’ 미국에선 기본적으로 마초적인 남자가 인기가 많다. 잘생기고 몸 좋고 잘 노는 인싸형 남자. 다만 최근 들어서 하얗고 이목구비가 깔끔한 미소년을 추구하는 여자들도 많아졌다. 미국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잘생긴 너드에 대한 판타지가 유행을 타고 있다. 그에 해당하는 친구가 바로 케이였다. 걱정과 답답함이 뒤섞인 기분에 몇 번이나 뒤척이던 클로이는 결국 한숨을 푹 쉬고 몸을 일으켰다. 책상 위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화면을 몇 번 터치하자, 등록되어 있는 연락처들 사이에 ‘K’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올해 발렌타인데이 이후로는 먼저 전화를 건 적이 없었지.’ 그날 자신이 큰맘 먹고 건넨 초콜릿을 두고 설탕 들어간 건 안 먹는다며 거절했던 케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상 고백이나 다름없는 멘트까지 날렸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한 것이다. 그 이후 어색해져서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어.’ 클로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