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데뷔전(2)
8화 데뷔전(2)
8화 데뷔전(2) 5회 초 강무백이 플로렌스 얄스의 타자 세 명을 잡아내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하고 덕아웃으로 걸어 들어왔다. 스코어는 4대 0. 홈팀 샴버그 부머스가 4점 차로 기분 좋게 앞서 나가고 있었다. 마운드를 내려온 강무백의 현재까지의 성적은 5이닝 무실점. 5이닝 동안 상대 타선에게 허용한 피안타는 고작 단 1개뿐이었다. 그 한 개의 안타마저도 흔히 말하는 바빕 행운의 안타, 빗맞은 타구이나 절묘하게 수비 위치가 없는 곳으로 떨어지는 행운의 안타였다. ‘내야 수비 실책으로 출루를 두 번 허용하긴 했지만,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거고.’ 독립 리그 수비 수준이 얼마나 뛰어나겠는가. 샴버그 부머스의 감독 릭 헤르난데스는 덕아웃 벤치에 앉아 이온 음료를 마시는 강무백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놈은 그냥 굴러들어 온 보물이네, 보물.’ 스프링캠프 전 트라이아웃 당시만 해도 사실상 도박이나 다름없는 선택지였던 18세 신인 강무백. 그런데 그 무모했던 도박이 이런 엄청난 대박으로 터져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나저나… 너클볼 투수인데 볼넷이 단 한 개도 없다는 건 볼 때마다 신기하군.’ 강무백은 훈련할 때부터 볼넷이 유난히 적었다. 본래 너클볼이라는 구종은 투수 본인조차 공이 어디로 튈지 몰라 제구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공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다른 구종을 던지는 투수들에 비해 볼넷 비율이 현저히 높은 편이다. ‘아니지, 생각해 보면 R.A. 디키도 너클볼은 미세한 컨트롤로 어느 정도는 제구가 가능하다고 했어.’ 일반적인 시선들과 달리 일류 너클볼 투수들은 정밀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제구가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강무백이 오늘 던진 투구 중에서 볼이 전혀 안 나온 것은 아니었다. 5이닝을 치르는 동안 타자와 풀카운트까지 가는 끈질긴 승부도 꽤 많았고, 전체 투구 중 스트라이크 비율 역시 61%로 절대 높다고는 볼 수 없는 수치였다. ‘그런데도 볼넷을 단 하나도 내주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풀카운트에서 강무백의 집중력이 좋다는 뜻이겠지.’그 순간. 따악! 타석에 선 타자의 배트가 공을 완벽하게 정타로 때렸고, 시원한 타격음과 함께 공이 담장을 넘어갔다. 샴버그 부머스의 쓰리런 홈런. 점수가 7대 0까지 단숨에 벌어지자, 덕아웃에 서 있던 릭 헤르난데스 감독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개막전부터 아주 기분 좋은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 강무백의 투구 수가 75구였지.’ 5이닝 동안 75구. 보통의 선발 투수였다면 6이닝이나 7이닝까지 던지게 한 뒤, 전체 투구 수 100구 이내에서 마운드를 내려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니면 그냥 지금 내려버리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강무백은 그냥 투수가 아니라 너클볼 투수였다. 팔꿈치나 어깨에 과도한 무리를 주지 않는 너클볼을 던지기에, 일반적인 투수들보다 훨씬 더 많은 투구 수를 소화할 수 있었다. ‘이 정도 페이스면 오늘 완봉도 가능하겠는데?’ 점수 차도 7점 차로 넉넉하게 벌어진 상황이라 굳이 불펜진을 일찍 소모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7대 0까지 벌려놓은 5회 말이 끝나고 6회 초. 마운드 위에는 여전히 강무백이 서 있었다. “감독님, 슬슬 불펜 투수 준비시킬까요?” 투수코치가 다가와 묻자, 릭 헤르난데스 감독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강무백이 완봉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완봉 페이스라고 보기에는 투구 수가 많긴 했다. 거기에 투구 수와 상관없이 슬슬 불펜을 가동하는 정석적인 타이밍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불펜 투수가 몸을 풀어야 6회 위기가 왔을 때 알맞게 교체할 수 있고, 설령 6회를 잘 넘기더라도 선발 투수의 투구 수가 90구를 넘어서기 때문에 7회를 대비해야 하는 까닭이다. ‘근데 강무백이 선발이라면 투구 수는 신경을 덜 써도 되긴 하지.’ 투구 수가 90개에 도달할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운드에서 내리기엔 너클볼 투수 특유의 이닝 이터 장점이 아까웠다. 더군다나 점수 차가 7점 차로 넉넉하게 벌어진 상황이라 불펜 소모를 최소화하고 싶은 욕구도 컸다. ‘불펜에서 몸을 푸는 것만 해도 투수에겐 부담이 가니까.’ 오늘 불펜을 하루 종일 비워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한 이닝 정도만 더 불펜을 비워두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일단 내버려둬. 상대가 출루라도 하면 그때 움직이지.” 마운드 위 강무백의 컨디션은 여전히 쌩쌩해 보였다. 6회 역시 무난하게 틀어막을 것이라는 릭 헤르난데스 감독의 신뢰. 강무백은 감독의 믿음에 보답하듯, 이번에도 무실점으로 6회를 가볍게 정리했다. 이닝을 마치고 강무백이 덕아웃으로 걸어 들어오자, 릭 헤르난데스 감독이 그에게 다가갔다. “캉, 지금 투구 수가 93개인데 더 던질 수 있겠나?” 일반적인 정통파 투수라면 충분히 피로감을 느낄 만한 투구 수지만, 너클볼 투수에겐 그리 무리가 가는 수치는 아니었다. “물론입니다. 200구도 던질 수 있습니다.” 강무백이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 있게 대답했다. 릭 헤르난데스 감독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200구라니, 아직 젊어서 그런지 의욕이 아주 넘치는구먼.’ 스스로 컨디션도 좋다고 여기니 마운드에 더 오래 서 있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마 완봉 욕심도 날 것이다. 물론 아무리 너클볼을 던진다 한들 투수가 한 경기에서 진짜로 200구를 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너클볼 투수라도 200구를 던지면 어깨와 팔꿈치에 무리가 가기 때문일까? 그건 아니다. 너클볼 구속은 70마일 안팎으로, 일반적인 투수가 경기 전 워밍업으로 가볍게 공을 던질 때 나오는 속도다. 비단 너클볼 투수뿐만 아니라 일반 투수에게 70마일짜리 공을 던지라고 하면 200구 정도는 거뜬히 던질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악력이지. 너클볼은 손가락 끝으로 공을 찍어 누르듯 던져야 해서 다른 구종보다 악력 소모가 훨씬 심하니까.’ 너클볼 투수라 해도 투구 수가 120구를 넘어서면 손아귀의 힘이 빠지기 마련이다. 손가락 힘이 풀리면 공에 회전이 걸려 치기 좋은 배팅볼이 되고, 결국 실투를 던질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게 된다. ‘게다가 하체 체력도 고갈되거든.’ 흔히 투수가 공을 던질 때 팔 힘이 중요하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투구의 80% 이상은 하체 힘에서 나온다. 마운드를 강하게 박차고 나가는 힘, 그리고 앞발을 디딜 때 하체를 확실하게 고정하며 생기는 관성의 힘이 상체의 강한 회전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결국 너클볼 투수라고 해도 200구를 던지다 보면 하체의 체력이 떨어져 밸런스가 무너지게 되고, 이는 실투를 유발할 확률을 높인다.‘뭐, 옛날 너클볼 투수들은 150구까지도 던지고 그러긴 했지만.’그 시절에 비해 타자 수준이 많이 오른 지금은 옛날처럼 던지는 건 힘들긴 하다. 6회 말 샴버그 부머스의 공격이 끝나고 7회 초. 마운드에는 여전히 강무백이 들어섰다. 쉬익- 퍼억! “스트라이크! 아웃!” 강무백은 7회 초 선두 타자부터 깔끔하게 삼진으로 처리했다. 이어 다음 타자마저 유격수 쪽 땅볼로 잡아내며 단숨에 2아웃을 만들어 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릭 헤르난데스 감독이 투구코치에게 슬쩍 고개를 돌렸다. “불펜 투수 앉혀라.” 5회에 한 이닝 불펜을 쉬었으나, 6회 말부터는 불펜 투수가 몸을 풀도록 지시했던 헤르난데스 감독이었다. 강무백의 투구 수가 이미 93구에 달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무백을 믿는다고 해도 선발이 90구를 넘겼는데 불펜에 한 명도 대기를 안 시키면 그건 감독 자격이 없는 거지.’ 투구 수가 많기도 하고 만약 주자가 생기면 그때는 교체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뭐, 불펜 투수는 몸 풀다가 다시 앉아야 하기에 썩 달가운 상황은 아닐 것이지만, 사실 야구판에서 이런 일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7회 초가 시작되자마자 강무백이 눈 깜짝할 사이에 2아웃을 잡아내자,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어차피 점수 차도 넉넉하다. 2아웃이니까 혹시라도 주자가 나가면 그때 다시 불펜을 가동해도 늦지 않아.’ 5회 말까지만 해도 7대 0이었던 스코어는 6회 공격에서 1점을 더 보태며 어느덧 8대 0까지 벌어져 있었다. 사실상 플로렌스 얄스 입장에서는 뒤집을 가능성이 희박해진 경기였다. 쉬익- 틱! 플로렌스 얄스의 타자가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으나, 너클볼은 배트 윗부분에 비껴 맞았다. 타구는 높게 떠올라 외야수 글러브 안으로 쏙 들어갔다. 쓰리 아웃. 7회에 깔끔한 삼자 범퇴. 이닝을 가볍게 지워버린 강무백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덕아웃에 걸어 들어왔다. ‘현재 강무백의 투구 수는 101개. 7회는 적은 투구 수로 잘 처리했긴 했는데, 이거 슬슬 내려야 하나?’ 릭 헤르난데스 감독도 너클볼 투수를 운영하는 건 처음이라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하지만 강무백의 눈빛을 보자, 릭 헤르난데스 감독은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마운드를 내려가기 싫다는, 공을 더 던지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강무백은 데뷔전 완봉승이라는 기록 달성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 이런 기회에 완봉을 노리게 해주는 게 맞지.’ 아무리 독립 리그라고 하지만, 완봉승은 의미가 있다. 투수에게 한 경기 완봉이라는 영광은 결코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어깨 부담이 적어 투구 수를 많이 가져갈 수 있는 너클볼 투수라 할지라도 완봉의 기회는 귀하기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8점 차나 나는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노려볼 만하지.’ 릭 헤르난데스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8회에도 강무백을 마운드에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 8회 초, 마운드에 오른 나는 가만히 목 스트레칭을 했다. ‘아, 투구 수 관리를 너무 못했네.’ 원인은 단 하나였다. ‘너무 즐겼나?’ 너클볼을 던지고 그 아름다운 궤적을 감상하는 쾌감에 일부러 볼을 던지며 관람한 탓이다. 물론 의도적인 부분도 있었다. 투수가 볼을 단 한 개도 안 던지는 건 너무 이상하니까. 적당히 볼을 섞어 던질 생각이었는데, 궤적을 감상하며 던지다 보니 어느새 풀카운트가 되기 일쑤였다. 물론 염력으로 공을 제어하는 나로서는 200구를 던지더라도 경기 시작하자마자 던졌던 것처럼 완벽한 공을 뿌릴 수 있다. 헤르난데스 감독님이 그때까지 나를 안 빼고 마운드에 남겨두느냐는 별개의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쩝. 뭐 지금부터 제대로 하면 되지.’ 현재 투구 수는 101개. 쉬익- 딱! “아웃!” 유격수 쪽 평범한 땅볼. 8회 초는 땅볼, 뜬공, 땅볼로 공 6개 만에 쓰리아웃으로 가볍게 끝났다. 덕아웃으로 들어가자, 릭 헤르난데스 감독님이 다가왔다. “캉, 9회도 던질 수 있겠나?” “예, 던질 수 있습니다.” 내 대답에 감독님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스코어는 이미 8대 0. 9회에 올라가 1, 2점쯤 내준다 해도 나를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뭐, 그럴 일도 없겠지만.’ 오른팔을 가볍게 돌려보았다. 100구를 넘게 던졌는데도 큰 무리가 없었다. 약간의 뻐근함이 느껴질 뿐. ‘이 정도는 훈련할 때 느끼는 근육통 정도에 불과해.’ 이번엔 손아귀를 꽉 쥐어보았다. ‘악력은… 이상이 있을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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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클볼 그립만 잡으면 염력을 쓸 수 있으니, 진짜 너클볼 투수들처럼 손가락에 힘을 많이 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몸 상태를 점검하는 사이에 8회 말이 끝나고 어느덧 9회 초가 되었다. 오늘 경기 아홉 번째로 마운드를 향해 걸어 나갔다. 3,000여 명의 관중들도 박수를 치며 나의 등판을 환호하고 있었다. 관중석을 가득 채운 함성과 박수 소리가 마운드 위로 쏟아졌다. ‘이제 아웃카운트 3개 남았다.’ 마운드에 서서 크게 심호흡했다. 중3에 낯선 이국땅에 와서 이렇게 프로 경기를 뛰게 될 줄도 몰랐는데, 지금 이렇게 완봉승을 앞두고 있다는 것.사실 체감이 잘 안됐다. ‘이제 와서야 좀 체감이 되네.’ 모자를 고쳐 쓰고 포수 콜튼 번스의 미트를 바라보았다. 사인은 역시 너클볼, 코스는 한가운데. 투구 자세를 잡고 곧바로 공을 던졌다. 쉬익- 틱! 초구부터 어떻게든 배트에 맞히려고 가볍게 휘두른 타자. 하지만 정타가 될 리 없었고, 공은 무기력한 땅볼이 되어 아웃되었다. 다시 투구 자세를 잡았고, 두 번째 타자 역시 너클볼에 헛스윙을 남발했다. 쉬익- 퍼억! “스트라이크! 아웃!” 두 번째 타자까지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이제 남은 타자는 단 한 명.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투구 자세를 잡는데, 상대 타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체념한 얼굴을 한 타자. 나는 망설임 없이 공을 던졌다. 쉬익- 틱! 타자가 있는 힘껏 배트를 휘둘렀으나, 공은 빗맞은 채 외야로 높게 떠올랐다. 공의 궤적을 확인하자마자 하늘 위로 손가락을 올려 가리켰다. 중견수가 플라이볼을 포구하면서 마침내 경기가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