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영웅이 되고 싶은 소녀
1화 — 영웅이 되고 싶은 소녀
왕국력 352년, 봄.
마왕이 토벌된 지 50년이 흐른 지금, 아르벨 왕국의 수도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상인들은 이른 시간부터 가판대를 정리했고, 빵집에서는 갓 구운 빵 냄새가 골목을 가득 채웠으며, 거리에는 일터로 향하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그런 평범한 아침, 수도 외곽의 작은 주택에서는 한 소녀가 식탁 앞에 앉아 부모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빵을 먹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겠지만, 오늘만큼은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린 채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소녀의 이름은 에린. 올해 16살이 된 평범한 소녀로, 갈색 머리카락과 밝은 눈동자를 가진 아르벨 왕국의 시민이었다. 특별한 귀족 가문 출신도 아니었고, 마법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저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외동딸이었다.
아버지 토마스는 신문을 내려놓았고, 어머니 마리나는 딸의 접시에 빵을 하나 더 올려주었다. 두 사람은 딸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지 궁금했지만, 에린이 지나치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자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치를 보였다.
"왜 그러니? 혹시 학교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사실 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정했거든요."
"오, 벌써? 아버지는 네가 조금 더 고민할 줄 알았는데. 어디 한번 들어보자꾸나."
에린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마치 왕궁에서 중요한 선언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가슴을 펴고, 오랫동안 준비해 온 말을 당당하게 꺼냈다.
"저, 모험가가 될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는 훌륭한 영웅이 될 거고요!"
식탁 위로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토마스는 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아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마리나 역시 빵을 집으려던 손을 멈춘 채 남편과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의 표정을 살피더니,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시 딸을 바라보았다.
"……영웅?"
"네! 영웅이요!"
"요즘 시대에?"
토마스는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가 어렸을 때만 해도 용사의 모험담은 제법 인기 있는 이야기였지만, 이제는 왕국에서 새로운 용사를 선발하지도 않았고 마왕군과 싸워야 할 이유도 없었다.
"에린아, 아버지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지금 영웅이 될 만한 일이 있기는 하니?"
"그건…… 앞으로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요?"
"찾아본다고? 영웅이 될 만한 사건을?"
"아버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사람 같잖아요!"
에린이 억울하다는 듯 항의하자 토마스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마리나는 그런 부녀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숨을 내쉬었고, 딸이 다시 자리에 앉도록 손짓했다.
"모험가가 되고 싶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굳이 모험가여야 할까? 요즘은 여자아이들도 상단에서 일하거나 왕립 학원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잖니."
"어머니, 저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보다 밖에서 돌아다니는 게 좋아요."
"그렇다면 여행 상단은 어떻겠니? 여러 도시를 돌아다닐 수도 있고, 일을 배우면서 돈도 벌 수 있잖아. 네가 좋아하는 여행도 실컷 할 수 있을 텐데."
"그건 그냥 여행하는 상인이잖아요. 제가 원하는 건 모험이라고요!"
에린은 두 손을 펼치며 열심히 설명했다. 숲속에 숨겨진 유적을 발견하고,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모험담이 서점에 진열되는 것이 그녀가 오랫동안 품어온 꿈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응은 영 시원찮았다.
"그런 건 책에서나 멋있게 나오는 거지. 실제 모험가들은 위험한 마물을 상대하다 다치기도 하고, 며칠씩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숲에서 지내야 한다더라."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요."
"지난번에 집에 쥐가 나왔다고 의자 위로 올라간 사람이 누구였더라?"
"어머니! 그건 쥐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그런 거잖아요!"
마리나는 웃음을 참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에린은 얼굴을 붉혔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꿈을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사실 에린이 모험가를 동경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할아버지가 남긴 낡은 모험담을 읽으며 자랐다. 그 책에는 마왕과 싸웠던 용사 일행의 여정이 기록되어 있었고, 낯선 땅에서 만난 동료들과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특히 에린이 좋아했던 부분은 마왕과의 마지막 결전이 아니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산맥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를 구하거나, 식량이 떨어진 마을에 물자를 전달하고, 서로 다른 종족의 사람들이 함께 식탁에 앉아 웃는 장면들이었다.
그녀에게 용사란 단순히 마왕을 쓰러뜨린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웃게 만들 수 있는 존재였다.
"아버지, 어머니. 저도 알아요. 지금은 마왕도 없고, 예전처럼 용사가 필요한 시대가 아니라는 거."
에린은 조금 전보다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토마스는 신문을 완전히 접어 식탁 한쪽에 내려놓았고, 마리나 역시 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도 모험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잖아요. 마물을 잡을 수도 있고, 길을 잃은 사람을 찾아줄 수도 있고요. 꼭 마왕을 쓰러뜨려야만 영웅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런 일을 하려면 먼저 네 몸부터 지킬 줄 알아야 한단다."
"그래서 검술도 배웠잖아요. 마을 경비대장님께서 저 정도면 기초는 충분하다고 하셨어요."
"그 양반은 네가 모험가가 되겠다고 검을 배우는 줄 모르셨을걸?"
아버지의 지적에 에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경비대장은 그녀가 호신술을 배우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으며, 모험가 길드에 가입할 계획이라는 사실까지는 듣지 못한 상태였다.
토마스는 그런 딸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딸이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무조건 반대하는 부모가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위험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허락할 수도 없었다.
"에린, 모험가가 되겠다는 사람을 아버지가 무조건 말리려는 건 아니야. 다만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결정했으면 좋겠구나."
"네. 알고 있어요."
"아니, 아직은 모를 거다. 길드에서 일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각보다 훨씬 고생이 많더구나. 의뢰를 못 받으면 수입도 없고, 다치면 치료비도 직접 내야 한다지."
마리나도 남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식탁 옆 서랍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는데, 거기에는 딸에게 추천하고 싶었던 일자리들이 적혀 있었다.
"사실 어머니가 몇 군데 알아봤거든. 약초상에서 견습을 구하고 있고, 중앙 도서관에서도 보조 직원을 뽑는대. 네가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도서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머니, 언제 이런 걸 다 알아보셨어요?"
"네가 요즘 진로 때문에 고민하는 것 같아서. 물론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보내지는 않을 거야."
에린은 종이를 받아 들고 잠시 내용을 살펴보았다. 약초상 견습, 도서관 보조, 상단 사무원, 그리고 제빵사의 조수까지. 모두 부모님이 딸의 장래를 걱정하며 찾아본 일자리들이었다.
그 마음이 고마웠기에 에린은 쉽게 종이를 내려놓지 못했다.
"……고마워요. 그래도 저는 모험가가 되고 싶어요."
토마스는 딸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무언가를 결심하면 좀처럼 마음을 바꾸지 않는 성격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결국 고개를 저으며 작게 웃었다.
"정말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고집이 센 건지 모르겠구나."
"당신 젊었을 때랑 똑같잖아요. 왕국 기사단에 들어가겠다고 집을 나갔다가 사흘 만에 돌아온 사람도 있었는데."
"여보, 그 이야기는 굳이 지금 할 필요 없지 않겠소?"
"아버지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
에린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토마스는 헛기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리나는 웃으며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조금 전까지 무거웠던 분위기도 어느새 평소의 아침 식사처럼 부드러워졌다.
다만 부모님이 완전히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토마스는 에린에게 당장 길드에 가입하기보다 먼저 모험가들의 실제 생활을 알아보라고 권했다. 가능하다면 길드 직원과 상담을 받아보고, 초보 모험가가 어떤 일을 하는지 직접 확인한 다음 다시 이야기하자는 조건이었다.
에린은 그 정도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좋아요! 그럼 오늘 바로 길드에 다녀올게요!"
"오늘?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는데."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잖아요. 다녀와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전부 말씀드릴게요!"
에린은 남아 있던 빵을 급하게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리나는 서두르다 체하지 말라며 잔소리를 했고, 토마스는 딸이 현관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잠시 후 에린은 낡은 가죽 가방을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섰다.
봄바람이 불어오는 거리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 펼쳐져 있었다. 빵을 사러 나온 사람들, 물건을 실은 마차를 끄는 상인들, 그리고 길가에서 장난을 치며 뛰어다니는 아이들까지 모두 저마다의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에린은 그 풍경을 바라보며 가방 속에 넣어둔 낡은 모험담을 떠올렸다.
책 속의 용사는 마왕을 쓰러뜨리고 세계를 구했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는 마왕도 없었고, 세상을 구하라는 부탁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떤 모험가가 될 수 있을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답을 찾으려면 우선 모험가 길드에 가보아야 했다. 에린은 가방끈을 고쳐 메고 걸음을 재촉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왕도 중앙 광장으로 이어지는 넓은 길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오래전 마왕을 쓰러뜨린 용사 일행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에린은 걸음을 멈추고 석상을 올려다보았다. 비바람에 닳아 얼굴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검을 높이 들어 올린 용사의 모습만큼은 여전히 당당하게 남아 있었다.
"언젠가는 저도……."
에린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잠시 웃었다. 자신이 저 석상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해보지 않은 채 꿈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석상에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다시 길을 걸었다.
왕도 모험가 길드의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커다란 나무 간판에는 검과 방패가 교차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열린 출입문 너머로는 모험가들의 대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에린은 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리고 자신이 오랫동안 동경해 왔던 세계를 향해,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