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캠프
스프링캠프
계약은 무난하게 끝이 났다. 육성 선수라 최저 연봉은 고정. 다만 내가 원하던 옵션을 넣을 수 있었다. 대신 계약금은 포기해야 했지만."유니폼 수익의 10퍼요?""네, 어렵나요?""흠… 1군에 등록되지 못하면 쓸모없는 조항인데 괜찮으세요? 차라리 계약금을 받으시는 편이 어떠실까요? 저희가 4천 정도는 챙겨 드릴 수 있는데. 김 코치님이 꼭 챙겨주시라고 하셨거든요." "괜찮습니다. 계약금 없이 이 옵션만 넣어주세요.""네. 알겠습니다." 계약 담당 직원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미소를 숨기지 못하는 것을 보아하니, 완전히 땡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네. 뭐, 당연한 반응이긴 하다. 1군 선수가 아닌 이상 마킹 유니폼을 살 팬은 거의 없다. 그것도 육성 선수 유니폼? 애초에 마킹조차 안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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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계약금을 챙겨주라고 했다니. 그건 좀 의외인데. 원칙적으로 육성 선수에게 계약금은 주지 않는다. 코치가 그래도 내 능력을 인정한 모양. 스프링 캠프 전까지 최대한 집 근처 헬스장에서 근육을 키우고, 운동 외 시간은 은하랑 시간을 보냈다. 아직 임신 초기. 입덧도 시작해 내가 옆에 있어주고 싶었지만… 참 야속하게도 스프링 캠프에 참가할 시간이 다가왔다. 스프링 캠프. 정규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몸을 만들기 위한 전지 훈련. 한 해 농사, 팀 성적을 좌지우지 하는 기간. 필요한 짐을 챙겨 김해 국제 공항에 미리 도착했다. 일부러 좀 일찍 나왔다. 1군 선수들은 전부 어제 출국했고, 2군 코치와 감독 그리고 2군 선수들과 나 포함 육성 선수까지 모였다."안녕하십니까.""아, 자네가 김코치가 말했던 유성현 군인가?""네.""난 2군 감독 이용진이라고 하네. 잘 부탁하네." 2군 감독은 인자한 할아버지였다. 상당히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긴 했는데, 코치가 말을 잘 해둔 걸까? 그리고 반가운 얼굴도 만날 수 있었다."안녕하세요, 강혁이 형.""오, 성현아!""거봐요, 형 빠따 툴 때문에 뽑힌다고 했죠?""그러게. 진짜 다행이다. 육성 선수는 우리 두 명이 끝인가?""음… 투수도 한 명은 뽑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는데… 아니 이코노미는 좀."성현아 조금만 옆으로 땡겨주라…""죄송해요, 제가 덩치가 이래가…" 그나마 다행은 거리가 가까운 일본이라는 것. 2시간의 짧은 비행 시간을 끝으로 나하 공항에 도착했다. 역시 오키나와. 한 20도 정도인가? 훈련하기에 딱 적당한 온도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를 타고 전지 훈련장에 도착해 먼저 숙소에 짐을 풀었다."숙소가 3인 1실이네요.""그러게. 너랑 나랑 채기현? 이 사람도 육성 선수인가?"ㅡ끼익."안녕하세요.""아, 안녕하세요." 이 사람이구나? 내가 저번에 봤던 투수다. 슬라이더 궤적이 특이하던 우투수. 이름이 채기현? 아예 육성 선수끼리 모아뒀네. 차라리 이게 편하긴 하지. "안녕하세요. 두분 트라이 아웃 참가하셨던 분들 맞으시죠?""네. 최강혁이라고 합니다.""유성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둘 보다는 나이가 좀 있어 보였다. 키는 꽤 큰 편. 185 정도 될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잡담이라도 하려는 찰나 집합이 걸려 급하게 훈련장으로 나갔다."자, 다들 주목!" 이용진 감독님은 모인 선수들의 얼굴을 한번씩 훑어보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다들 알다시피, 우리 1군에 선수들이 많이 빠졌다. 이것이 뭘 뜻하는지 모르는 선수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침묵에 휩싸인 선수들. 저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잘만하면 1군으로 갈 기회가 있다. 선수들의 눈빛이 활활 불타기 시작하고, 감독은 만족한 듯이 웃다가 내 표정을 보고 잠깐 멈칫했다."크흠. 하지만 과도한 의욕은 독이 되는 법. 특히 너희들은 몸이 재산인 사람인 것을 항상 명심하고, 훈련에 힘 쓸 수 있도록. 알겠나!?""""네!""""오늘은 숙소에 들어가서 푹 쉬고, 일찍 자도록. 내일 7시부터 훈련을 시작할 예정이니." 다시 돌아온 숙소에서 어색함을 풀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했다."31살이요? 진짜요?""진짜라니까." 강혁이 형이 놀라서 소리쳤다. 그리고 나도 말을 안 했지만 많이 놀랐다. 저 얼굴에 31살? 내가 생각한 나이보다 6살은 많았으니까. 엄청 동안이었잖아? "저는 19살입니다. 말 편하게 하세요, 기현이 형.""와, 나랑 띠동갑 차이라고? 그럼 몇 년 생이야?""저 2010년 생이요.""와, 2010년에도 사람이 태어났구나.""솔직히 저보다 연하라고 했을 때 저는 장난 치는 줄 알았다니까요. 지금도 사실 안 믿겨요. 저게 어떻게 19살?" 둘이서 낄낄거리며 나를 놀리는데, 딱히 타격을 입진 않았다. 내가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라.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고, 기현이 형이 말을 놓았다. 사실 나랑 12살, 강혁이 형이랑 9살 차이라 이게 맞기도 하지. 군대 이야기가 나왔다."형님 군대는 현역 다녀오셨어요?""나? 현역 다녀왔지.""오, 몇 사단이요?""3사단. 너도 다녀왔어?""네. 이제 전역하고 반 년 정도 지났어요.""이야. 빨리 다녀왔네." 군대라. 나도 빠르게 다녀올 예정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어버렸네. 음, 열심히 해서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다면 병역 면제던가?"성현이는 아직이지?""네. 그런데 아마 상근으로 갈 것 같은데요?""상근??""제가 아이가 있어서.""…뭐?"'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라는 표정이 되어버린 기현이 형. 아니, 19살에 결혼해서 애가 있을 수도 있지. 미국에서는 꽤 흔한 일인데."이제 6주차에요.""와, 세상에. 그럼 지금 와이프 놔두고 스프링 캠프 참여한거야?""돈은 벌어야죠…""그러고 보니 형님 결혼은요? 31살이라면서요?""나? 5년 전에 결혼해서 애도 있어. 이제 2살. 사진 보여줄까?""뭐야, 여기서 나만 솔로에요?""강혁이 형, 그렇게 됐습니다. 형님 모솔은 아니죠?""…아니거든?""반응을 보니 모쏠이네. 이거.""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음날, 본격적인 스프링 캠프가 시작되었다. 아침에는 몸을 깨우는 가벼운 러닝과 스트레칭. 이후에는 근력 운동과 필라테스. 타자는 배팅 훈련, 투수는 유연성 훈련. 생각보다 체계적인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2군 스프링 캠프라고 하기에는 숙소도 좋고, 밥도 잘나왔다. 마이너 리그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 물론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게 어딘가. 내 기대보다도 환경이 훨씬 좋았다. 감독이나 코치는 나에게 딱히 터치를 하지 않고 내가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지곤 했다. 어련히 잘 하고 있어서 그런가? 그런 것 치고는 다른 선수들에게는 엄청나게 잔소리를 하던데. 특히 2군 투수 코치가 굉장히 말이 많았다. 일본인 같아 보이던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자,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간단한 스트레칭을 제외한 훈련은 더 이상 금지다! 가서 빠르게 잘 수 있도록!" 훈련 강도가 나날이 강해지고 있었다. 정석적인 방법이다. 계속 신체에 더 큰 부하를 주면서 몸을 만들어가는 것. 하지만 19살이라는, 신체적으로 최고 전성기 나이라 그런지 딱히 힘들지는 않았다. 매일 훈련이 끝나면 은하와 영상 통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한 달 정도 지나고 나서 상황이 바뀌었다."자, 오늘은 특별 공지가 있다. 내일부터 1군과 함께 훈련한다!" 흔한 방법이다. 1군과 2군의 경계를 없애서 1군 선수들에게는 자리보전을 못 할 수도 있겠다는 부담을 주고, 2군 선수들에게는 나도 경쟁에서 이겨 1군에 합류해야겠다는 의지를 주는 방법. 몸이 아직 완성되진 않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그래도 간단한 대근육 운동과 유산소 정도는 꾸준히 했기에 망정이지, 그거라도 안 했으면 트라이 아웃에서 뽑히지도 못했을 거다."기현이 형. 형님 파이터즈에서 뛰다가 오셨다고 하셨죠?""뭐, 방출당하긴 했는데. 뛰다가 온 건 맞지.""거기도 1군이랑 2군이랑 같이 스프링 캠프해요?""아니. 애초에 1군 2군 가는 곳이 달랐어.""그렇죠? 그런데 갑자기 1군이랑 2군이랑 섞는 걸 보면 저희한테 기회가 온 건 아닐까요?' 희망 회로를 돌리는 강혁이형. 자기 생각에는 1군 선수들이 부진해서 2군과 저울질을 하려고 합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사실 1군과 2군의 벽은 상당하다. 괜히 1.5군, AAAA급 선수라는 말이 생겼겠는가? 프로 스포츠의 세계는 냉정하다. 약육강식. 약한 선수는 사라지고, 강한 선수만이 남는 곳."글쎄. 지켜봐야 알겠지. 나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나름 1군과 2군을 오가며 경력이 많은 기현이 형도 이런 케이스는 처음인 모양. 메이저 리그에서는 굉장히 흔한 편인데, KBO는 다른 모양. 메이저리그에서는 일부로 마이너 리거들도 캠프에 합류시켜 경쟁을 유도하는 편이다. 그렇게 1군과 2군이 같은 훈련장에 모여 훈련을 시작하고, 나는 나만의 루틴을 지키며 몸을 만들어나갔다. 역시나 1군 감독과 코치는 우리 같은 육성 선수에게는 별 다른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 굉장히 의외인 사람이 내게 말을 붙였다."오, 네가 육성 선수로 들어온 녀석이구나?""안녕하세요. 재훈 선배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마, 편히 불러. 뭔 선배님이야. 재훈 삼촌이라고 부르라, 내가 조카라 하께." 황재훈. 타이탄즈의 심장. 4년동안의 MLB 생활을 끝내고 복귀 2년차 시즌. 소위 말하는 부산 성골에 프랜차이즈 스타. 작년 성적은 타율 0.329 / 출루율 0.411 / 장타율 0.564 / OPS 0.975 / 32홈런 / 107타점. 지독한 부상 병동에 시달리며 식물 타선이라고 놀림 받던 작년 타이탄즈의 타선을 홀로 이끌던 선수다. 이런 타자가 4번을 치는데도 꼴등이라니. 얼마나 다른 타자들이 부진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 같은 육성 선수에게 왜 말을 걸지?